그들 각자의 다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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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다른 곳’을 떠올리는 건 도피하겠다는 것보다 현실에서 가능한 나름의 모험을 한다는 것과 비슷하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리는 그룹전 <다른 곳(Elsewhere)>에 참여 중인 세 작가, 노상호, 김희천, 김동희가 저마다 다른 곳을 찾았다. 

노상호 작가.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노상호의 그림에는 온갖 군상이 가득하다. 그는 매일 SNS와 인터넷상에서 이미지를 수집한다. 그것들을 ‘기준 없이’ 인쇄한 후 인쇄 이미지에 먹지를 대고 그려나간다. 속도와 밀도는 공존하기 힘든 일인데, 그는 날마다 정해진 양을 규칙적으로 소화하고 차곡차곡 쌓아간다. 그렇게 그가 채집한 여러 장면이 하나의 그림 안에서 증식해간다. 장면과 장면의 합, 분절된 요소들의 합. 이것은 ‘재조합된 드로잉’이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10월 25일까지 열리는 <다른 곳(Elsewhere)>의 전시장에 들어섰다가, 벽에 걸린 노상호의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해 얼굴이 그림과 붙어버릴 것처럼 바짝 다가갔다. 멀리서 보면 색채들이 현란하게 뒤엉켜 있을 뿐이다. 가까이서 보면 현대 사회인지 어느 장소인지, 현실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장면들, 그리고 용암이나 폭발 같은 재난 상황이 펼쳐져 있다. “전시장 가운데 비치된 작업대는 실제 제가 쓰는 작업대예요. 좁은 집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작업대에 그림을 말아두고 그려요. 완성된 그림은 저도 전시장에서만 확인합니다. 매일 하루 치의 드로잉을 큰 계획이나 계산 없이 쭉 이어가는 식이라 작업 개념상 그림 전반의 흐름이 중요하진 않아요. 그날그날 받은 인상을 즉물적으로 표현합니다.” 

가로 3미터가 넘는 ‘더 그레이트 챕북 3’, 그리고 무채색화 중 세부. 무채색화에도 엷은 농도의 에메랄드 빛과 오묘한 색이 있다. 노상호 THE GREAT CHAPBOOK3 – ELSEWHERE, 2020. 회화, 혼합재료, 가변크기.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가로 3미터가 넘는 ‘더 그레이트 챕북 3’, 그리고 무채색화 중 세부. 무채색화에도 엷은 농도의 에메랄드 빛과 오묘한 색이 있다. 노상호 THE GREAT CHAPBOOK3 – ELSEWHERE, 2020. 회화, 혼합재료, 가변크기.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pic’라는 브랜드로 출시되는 굿즈.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 전경.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ATELIER HERMÈS, INSTALLATION VIEW OF PHOTO SANGTAE KIM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노상호는 만화를 지어 SNS에 올리기도 했다. 이 만화는 이후 <미스테리아>에 실렸다.

이번 전시에서 노상호가 선보이는 신작은 2014년부터 이어온 ‘더 그레이트 챕북(The Great Chapbook)’의 세 번째 버전이다. 이미지가 파편화되고 재조합되는 그의 작업 방식을 상징하는 패치워크 패브릭, 그가 ‘다른 곳’이라는 전시 주제에 맞춰 처음으로 시도한 무채색화도 있다. “제가 만드는 세계에서의 ‘다른 곳’을 좀 더 직접적으로 그려보고 싶어서 색을 뺐어요. 많은 분들이 저를 두고 색을 많이 쓰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작업을 시도한 거기도 하고요. 컬러 작품은 유화 물감을 사용했기 때문에 쨍하죠. 최근 들어 인터넷 환경에서 살아남는 이미지들과 휘발되는 이미지들의 성격에 관심이 생겼어요. 살아남는 것들의 특징 중 하나가 쨍하고 선명한 색채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림을 완성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노상호의 작업은 그림을 스캔해서 인터넷이나 SNS에 업로드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 그의 작업물이 그가 이미지들을 끌어왔던 그 공간으로 다시 향하는 것이다. 그는 가상 환경에서 이미지가 소비되고 파편화되는 것에 관심이 많다. “제 작업 과정에서 핵심이라면 저에게 들어오는 이미지나 정보와 저를 통해 나가는 것들 사이에 제가 필터처럼 아주 얇게 서 있다는 점이에요. 저는 이미지의 소비를 순환시키며 그 가운데 서서 어떤 것을 볼 수 있는지, 어떤 것을 표현하고 그릴 수 있는지 생각하죠.” 그는 인스타그램에 자기 작품을 적극적으로 올린다. 캔버스 틀을 짜지 않고 그림 천 그대로 낭창낭창하게, 혹은 옷걸이에 걸어 전시하기도 한다. 만화 연작 작업도 했다. 인터넷에서 채집한 이미지들로부터 만든 이야기가 다시 인터넷에 떠돌 만한 이야기가 된 셈이다. ‘네모난’이라는 이름으로 혁오 밴드의 앨범 커버 작업들을 한 결과 ‘혁오의 아는 형 노상호 작가’ 같은 기사 제목이 나기도 한다. 물질적인 그림 원본으로 존재하기보다 액정 속 이미지 파일로, 또 다양한 형태로 소비되고 떠도는 그림. 작품 시리즈명인 ‘챕북’은 20세기 전 영국에서 대중화된 얇고 저렴한 출판물 형태다. 노상호의 그림도 전시장 밖에서 소비되고 순환하며 가볍게 팔랑거리고 있다. 그게 작가 노상호의 태도를 말해준다. “제 그림은 일정 기간 동안 큐레이션한 이미지가 저라는 필터를 통해 걸러지며 표현된, 일종의 저만의 역사서라고 생각해요. 작업적으로는 이미지가 소비되고 돌아다니는 것 자체를 은유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김희천 작가.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장에서 나와, 카페 ‘마당’을 가로질러 구석진 곳으로 향하면 영상 작품 한 편을 위한 공간이 자리한다. 영상 속 인물은 ‘Soomnie TV’ 운영자인 브이로거다. 여느 브이로그가 그렇듯 특별할 것 없는 그녀의 일상이 흐른다.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OOTD를 소개하고,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브이로그에 달린 댓글을 읊어본다. 소설가이기도 한 그녀는 ‘다섯 명의 저택 관리인’이라는 소설을 쓰면서 집필 과정을 타임랩스 영상으로 기록 중이다. 이 작품은 김희천의 ‘다섯 명의 저택 관리인 쓰기’(2020)다. 작품을 관람하는 도중 유튜브에서 괜히 ‘Soomnie TV’를 검색하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익숙한 브이로그를 전시장에서 마주하고 있으니, 영상 속 인물이 실재하는 브이로거인지 문득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미디어 작가 김희천은 영상에 VR 게임, 3D 변환, 페이스 스왑(얼굴 바꾸기), GPS 등 디지털 기술을 적용해 작업한다. 이번에 가져온 형식은 브이로그다. 작업에 들어갈 때 그가 가장 먼저 염두에 둔 건 등장인물이 진짜 유튜브 브이로거처럼 보이는 일이었다. “제가 연출가는 아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스스로 리얼할 수밖에 없는 세팅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등장인물은 한 다리 건너 아는 분이에요. 가끔 볼 때마다 유튜브 브이로그를 하면 참 어울릴 사람인데 왜 안 할까 싶었죠(웃음). 그분이 정말 브이로그를 찍듯이 거의 알아서 뭔가를 담길 바랐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OOTD를 할 때예요. 일반적인 영상 작업이나 영화였다면 지루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일 부분이거든요. 그런데 바로 그런 게 진짜 브이로그 같잖아요. 유튜브에서 여러 브이로그를 볼 때 별다른 생각이나 정보값이 없는 상태로도 편히 그냥 보게 되죠.” 

밀실은 김희천이 ‘다른 곳’이라는 키워드를 받고서 직관적으로 금방 떠올린 것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미스터리하고, 그래서 흥미로운 장소. 도산 공원 인근 에르메스 건물을 자주 들락거리는 이들에게는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마침 아뜰리에 에르메스와 ‘밀실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제법 어울리는 사이다. 무려 ‘에르메스’ 매장의 공기를 통과해 지하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걸으면 또 다른 지하 세계가 펼쳐진다.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여유로운 사람들을 지나 으슥한 제3의 장소까지 도착하면, ‘다섯 명의 저택 관리인 쓰기’가 기다리는 거다. 이제 브이로그와 밀실이라는 두 축이 엮인다. 지극히 리얼한 브이로그, 그리고 탐정 소설과 같은 플롯. 브이로거의 일상 속 배경으로 등장하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전시장과 카페는 각각 밀실 살인을 둘러싼 연회장과 은밀한 살롱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현재 부산비엔날레에서 전시 중인 김희천의 ‘탱크’(2019) 스틸 사진. 김희천 탱크, 2019, 싱글채널비디오, 컬러, 사운드, 42분.

현재 부산비엔날레에서 전시 중인 김희천의 ‘탱크’(2019) 스틸 사진. 김희천 탱크, 2019, 싱글채널비디오, 컬러, 사운드, 42분.

아뜰리에 에스메스 전시장 밖 별도의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김희천의 신작 ‘다섯 명의 저택 관리인 쓰기. 김희천 ‘다섯 명의 저택 관리인’ 쓰기, 2020, 싱글채널비디오, 21분.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아뜰리에 에스메스 전시장 밖 별도의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김희천의 신작 ‘다섯 명의 저택 관리인 쓰기. 김희천 ‘다섯 명의 저택 관리인’ 쓰기, 2020, 싱글채널비디오, 21분.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인 ‘바벨’(2015), 2015년 말 커먼센터에서 치른 개인전 <랠리> 등을 시작으로 김희천은 기술 환경의 변화가 우리 삶과 인지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주시해왔다. ‘썰매’(2016)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잃어버린 이, 숭례문과 시청 일대를 서킷 삼은 카 레이싱 게임과 이를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하며 플레이 하는 이, 그리고 신종 자살 클럽을 추적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얽히는 내용이다. 디지털을 옷처럼 입은 페이크 다큐들이 기승전결을 헤집 듯이 빠른 속도로 약 17분 30초 동안 어지럽게 교차한다. 2016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서 ‘썰매’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건 사실 당혹감이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 당혹감의 정체를 좀 알았다. 잊고 있던 사실이나 무뎌진 감각을 그 영상이 일깨워 준 듯하다. 디지털과 디지털 외 실재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중첩되고 극적으로 드러나는 그 모습은, 스마트 기기가 보편화된 이후 분명 달라진 우리의 시공 인지 감각을 문득 예민하게 만들어준다.

“가상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야길 저는 계속 하고 있어요. 가상이라고 하면 현실에서 어딘가에 꼭 ‘접속’을 하는 일이라거나 미래적인 이미지만 떠올리는 건 옛날 담론입니다. 지금은 기술이라는 것 자체가 가장 현실적이에요. 이제 우리는 기술이나 가상에 접속한다는 감각 자체를 느끼기 힘들고, 그저 경계 없는 곳에 살고 있어요. 어느 순간에는 기술에 대해 아예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겠죠.” 지금 가상은 현실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름을 부여한 다른 모든 것과 나란히 존재한다. 다만 갈수록 현실의 해상도는 낮아지고, 가상의 해상도는 선명해진다. 김희천의 작업은 그런 점을 말한다. 페이스 스왑 앱이든 VR 게임이든, 그는 ‘신박한’ 기술을 전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사회를 은유하는 도구로 그것들을 활용하고 있다.

많은 것이 변한 지난 몇 개월 동안, 김희천은 초조함을 느낀 동시에 조금 헷갈리는 기분도 들었다고 한다. “제 작업은 보통 이 세계가 기술에 의해 어떻게 작동하고, 우리가 어떤 식으로 경험하고 있는지를 다뤄요. 그런데 이 세계가 어떻게 됐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신작을 만들면서도 쉽지만은 않았어요. 내가 알던 곳이 이제 다른 곳이 됐다는데, 여전히 전에 알던 곳에 대해 얘기하는 건가 싶었거든요. 그렇다면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야겠는데, 그게 뭔지는 아직 답을 구하기 어려운 거죠.” 요즘 김희천은 앞으로의 작업 방향에 대해 고민을 좀 한다. 마침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진 건지, 최근을 거치며 생각이 달라진 부분도 꽤 있다. “안 그래도 이제 다른 방식의 작업을 시도해볼 타이밍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어요. 일단은 이 시기를 여러모로 건강하게 잘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커요.”

김동희 작가.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특별하고 특이한 점은 ‘중정’이다. 이곳은 전시 오프닝 때면 작은 야외 파티장 역할도 하는 자리다. 지하에 위치한 카페 마당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유리 너머 중정을 통해 살짝이라도 들어오는 자연광이 공간의 인상을 밝혀준다. 이 자리에 김동희의 ‘시퀀스 타입: 3’이 들어섰다. 그는 공간의 기능이나 구조를 바꾸는 식으로 작업하는 작가다. 전시 공간을 디자인하기도 한다. 김동희가 이번 전시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할지 정하기 전부터, 그의 작품이 놓이거나 그가 뭔가를 꾀할 자리는 운명적으로 중정이 아니었을까?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관람하러 올 일이 있을 때마다 중정을 관심 있게 봤어요. 이곳에서의 개인전을 상상해보기도 했고요. 에르메스 건물의 바깥에서 안으로, 또 지하의 전시장으로 내려와 중정으로, 중정에서 다시 이 구조물의 속으로 들어가 하늘을 바라보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시퀀스 타입: 3’을 묘사만으로 이해시키는 건 공간 지각력이 뛰어난 사람에게도 스무고개에 버금가는 일일 것 같다. 전체 형태는 중정의 비율에 맞는 정사각형이고, 내부는 계단식으로 된 건축적 조형물이다. 김동희가 에르메스 건물 내외부의 표면 효과를 본떠 조합한 재료를 외피로 두르고 있다. 벽면 모서리는 가구 디자인처럼 곡면 형태로 처리되어 첫인상이 부드럽다. 구조물 내부에서는 동심의 정사각 형태가 반복되며 계단을 이룬다. 그런데 내부 층층이 거울 조각이 설치돼 있다. 중정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곳이니, 거울은 하늘을 담는다. “이 구조물 안으로 들어오려면 고개를 좀 숙이면서 자연스럽게 땅을 바라보게 돼요. 이때 거울에 비친 하늘이나 벽면을 발견하고서 위쪽으로 시선을 향하게 하기 위한 장치예요.” 김동희는 구조물의 두 출입구를 통해 반복적으로 안과 밖을 오갈 수 있는 동선, 그리고 어느 정도의 스케일과 기능을 포함한 구조물을 만들고자 했다. 계단에 잠시 앉아 고개를 극적으로 꺾지 않아도, 거울을 통해 가을 하늘 일부를 볼 수 있다.

아뜰리에 에르메스 옆 중정에 자리한 건축적 구조물, ‘시퀀스 타입: 3’. 김동희 시퀀스 타입: 3, 2020. 합판, 방수도장, 스테인리스 스틸, 인테리어 필름, 실리콘, 450x450x(h)220cm.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아뜰리에 에르메스 옆 중정에 자리한 건축적 구조물, ‘시퀀스 타입: 3’. 김동희 시퀀스 타입: 3, 2020. 합판, 방수도장, 스테인리스 스틸, 인테리어 필름, 실리콘, 450x450x(h)220cm.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제공

최근 시청각 랩에서 열린 전시 <홀(Hall)>의 설치 장면.

김동희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뿐 아니라 전시 디자이너 역할도 겸했다. 어떤 날에는 시공업자가 돼야 했을 것이다. 판화를 전공한 그가 공간을 기반으로 작업하게 된 건 대학 시절의 경험에서 출발했다. “개인 공간이 부족해서 교내의 빈 공간을 찾았죠. 그 빈 공간이 임시 거처가 되고, 동료들의 전시장도 됐어요. 그렇게 공간 자체를 작업으로 삼는 방법으로 확장해갔습니다. 저는 협업이 필요한 작업이나 전시 디자인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고안한 항목을 물리적, 비물리적인 레이어로 상정하고 오피시티(포토샵에서 레이어의 불투명도에 관한 기능)를 조정하는 식으로 작업해요. 판화 기법에서 레이어 개념이 중요한데, 그 개념을 익혀 공간의 여러 가지 복합적인 영역에 적용하는 데 도움도 된 것 같아요.” 그렇게 한 지역구 안에서 기능을 상실했거나 명확히 인식할 수 없는 다리 밑 폐선 부지, 아파트 쉼터 등에 각기 다른 구조물이 들어서고, 그곳들이 하나의 유기적인 작품이 되기도 한다(<나열된 계층의 집>, 2014). 최근의 전시 <홀(Hall)>에서 그는 세 개의 창문이 난 구조에 응대하는 구조물을 배치했다. 관객은 구조물을 타고 넘어가 앉은 자리에서, 창 너머 풍경을 보며 음악가 장영규가 만든 세 가지 사운드를 감상할 수 있었다.

답이 없어 보이는 공간이 쓸모 있는 공간으로 변신했을 때의 쾌감은 혼란기에 빠진 내 방을 대청소했을 때마저도 느낄 수 있다. 어떤 공간이 지닌 가능성을 발견하고, 변화한 그 장소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새 에너지를 경험했다면 개발과 재건축으로 이룩된 서울 곳곳의 풍경을 그냥 지나치긴 힘들 것이다. “백지 상태보다는 뭘 잘못 만들었거나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다 남겨진 상태의 공간에 흥미를 느껴요. 줄 폐업한 한강 교량 카페들, 방치된 제주도 해녀 체험장, 가치를 다 한 채석장… 어느 아파트 단지들 사이에는 인공 절벽이 있는데, 그 위가 공터예요. 앞은 탁 트인 전망이고 뒤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는 특이한 공터죠. 거기서 뭔가를 해보고 싶어서 구상 중입니다.” 김동희가 어느 공간에 마법을 부리고 일정 시기가 지나면, 그곳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곤 한다. 그 일시적인 측면에 이제 덤덤할 수 있는 건 언제든 다시 만들 수 있는 도면이 있기 때문이다. “제작한 작업을 보관 및 유지 가능한 형식으로 만들기까지, 그 제작 환경을 마련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앞으로 몇몇 작업은 폐기하지 않는 방향을 고려 중이에요.” 도시의 곳곳에 개입해 잠시나마 ‘다른 곳’을 만들어내겠다는 그 동력은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이다.

피처 에디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장현우, 김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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