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이 가라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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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리는 넘어가 바다로’라고 말하던 비와이는 북미 9개 도시 순회 투어를 앞두고 있었다. 비와이 가라사대, 한국에서 시작한 한국적 힙합은 이제 ‘출전’ 준비를 마쳤다.

광택이 도는 패턴 셔츠는 펜디 제품.

이틀 뒤에 출국한다 들었다. 1월 24일부터 북미 9개 도시를 순회하는 ‘The Movie Star’ 투어를 개최한다고. 가사에 썼듯 드디어 ‘외화 벌고 원 환전’하는 것인가? 그렇게 썼지(웃음). 사실 이번 투어로 큰돈을 만져보겠다는 생각은 없다. 돈은 부차적이다. 작년 7월 <The Movie Star> 앨범을 발매하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도 내 음악이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뜻이 전달되지 않아도 사운드만으로 굉장히 만족스러워할 거라는. 한 구석에는 밑도 끝도 없 이 객관적인 피드백을 얻고 싶은 마음도 있다. 어쨌든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음악 시장을 보유한 나라에서 한글로 쓴 랩을 들려주는 셈이니까.

공연에서 어떤 곡의 반응이 가장 뜨거울 것 같나? <The Movie Star>의 타이틀곡인 ‘가라사대’. 하우스 리듬을 기본으로 트랩을 버무리고 가스펠, 오케스트라까지 동원한 곡이다. 요즘 이런 시도가 너무 재미있다. 힙합 아래 여러 장르를 교차시키는 작업. 게다가 가사의 99%가 한글이어서 외국인에게 들려주면 대개 놀라거나 흥미로워했다. 뮤직비디오에 달린 댓글만 보더라도 외국인이 작성한 내용이 과반수다.

이번 공연에서도 ‘실력으로 입 다물게 만드는’ 퍼포먼스를 기대해도 좋나? 아마도. 2년 전 미국에서 처음 공연했을 당시에도 나의 존재조차 모르는 일반 관람객이 적지 않게 있었다. 공연 초반에는 팔짱을 끼고 ‘얼마나 잘 하는지 보겠다’는 태도였는데 막판에는 서로 뒤엉켜서 정신없이 놀았다(웃음).

비와이는 돈이 아닌 실력으로 ‘플렉스’하는 래퍼라는 인상이 있다. <쇼미더머니5>에서 우승한 3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쌓아온 커리어에 비해 과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 같다. 환경이 갑작스레 변하고, 얼떨떨한 상태에서 레드카펫을 밟았으니까. 오래전부터 꿈꿔온 랩 스타의 삶이 코앞에 있다고 믿었을 거다. 화려한 미국 래퍼들처럼 살아야만 진정한 힙합이라고 생각해서 어딜 가든 구찌와 루이 비통을 걸친 거고. 한동안 성공에 취해 살았는데, 그런 모습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당시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가 88만 명이었는데, 1년 사이 20만 명이 팔로를 취소했을 정도였으니까. 2017년 정규 1집 <The Blind Star>를 발매하며 이런 생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 것 같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나란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만든 앨범이었으니까. 그리고 주변에 워낙 자산가가 많다. 그들 앞에서 돈으로 자랑하는 게 하룻강아지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웃음). 경제, 사회적 지위를 떠나 그런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무언가가 진짜 플렉스라는 생각이 든다.

견장 장식 셔츠와 반짝이는 시퀸 팬츠, 옥스퍼드 슈즈, 반지는 생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제품.

작년 <The Blind Star>의 후속으로 발매한 정규 2집 <The Movie Star>에서는 어떤 ‘극한’이 엿보였다.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변칙적으로 뒤바뀌는 리듬은 어느새 비와이의 색깔로 굳어진 듯하다. 랩에서 리듬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라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경우 라임을 잘 갖고 노는 편이다. ‘가라사대’의 2절에서 빠르게 랩을 내뱉는 대목에서도 라임을 굉장히 계산적으로 디자인했다. 셋잇단음표의 리듬이라 박자가 3개로 쪼개지는데 ‘배고파도’, ‘계속하고’, ‘패권 잡어’ 처럼 네 글자로 이뤄진 라임이 계속되면서 기묘한 긴장감을 만든다. ‘찬란’도 93bpm으로 템포는 일정한데 4/4, 6/8, 3/4으로 박자가 변칙적으로 바뀌니까 템포가 요동치는 것처럼 들린다. 힙합 좀 듣는다는 사람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디테일이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노래를 못 따라 부르지… 안다. 내가 좀 변태적이다(웃음).

앨범 전체적으로 영화 음악을 차용한 흔적도 엿보였다. 영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웅장한 사운드를 좋아한다. 특히 한스 짐머가 영화 <인셉션>을 위해 작업한 사운드트랙은 빠짐없이 전부. 마블에서 나온 히어로 무비의 오랜 팬이기도 한데, 그중 아이언맨의 성장 서사는 큰 귀감이 된다. 그가 착용하는 슈트는 계속해서 진화하지만 가슴에 달려 ‘뼈대’라고도 할 수 있는 원형 아크 원자로는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이지 않나. 앞으로의 음악적 성장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아이언맨 같았으면 좋겠다. 중심과 본질은 변치 않되,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계속해서 업그레이드하는.

타이틀곡 ‘가라사대’ 뮤직비디오를 보면 수많은 군중 앞에서 랩을 이어간다. 문득 ‘비와이는 영웅이 되고자 하는 걸까’란 생각이 스쳤다. 누군가 당신이 봉황의 눈을 가진 영웅 관상이라고 말한 것도 언뜻 떠오르고… 하하. 관상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The Movie Star>를 기점으로 스스로 어떤 거대함을 품은 사람이라는 점을 비추고자 했던 것 같다. 타이틀곡 ‘가라사대’의 뮤직비디오에는 흑마 한 마리가 등장하는데, 말이 언어와 동물을 동시에 뜻하는 동음이의어인 만큼 한글 가사를 들고 말처럼 세계로 나가겠다는 메시지를 담기도 했고.

앨범의 첫 번째 트랙에서 ‘내 소리는 넘어가 바다로’란 가사를 유독 힘주어 부른 이유를 알겠다. 재미있는 게, 국내 힙합 신에서 ‘탈한국인’이나 ‘탈김치’라는 표현은 칭찬으로 통한다. 한국에서 한국인이 아니어야, 미국 흑인 래퍼의 자세를 취해야, 피부가 까매져야만 멋있어지는 거다. 물론 과거엔 나조차 미국 래퍼가 되고 싶은 한국인이었던 것 같다. 이후 <The Movie Star> 작업을 하면서 한국에서 힙합 음악을 하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지. 지금 내가 하는 음악이 나만의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연기하며 만든 것인지 고민했을 때 철저히 후자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더이상 연기하며 살지 않겠다, 주인공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The Movie Star>를 작업한 것 같다. 힙합의 본토는 미국이라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니까 더는 그들을 정답으로 삼을 필요도 없어졌다. 지금 나의 오리지낼리티를 담아 작업하는 발밑이 곧 본토나 다름없는 셈이지. 차갑고 도시적인 뉴욕 힙합, 칠(Chill)하기 그지없는 LA 힙합처럼 저마다의 스타일이 있듯 한국적 힙합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는 것 같다.

한국적 힙합, 솔직히 명확히 와닿진 않는다. 지금 누가 그런 음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XXX의 프랭크가 만드는 사운드는 지구에서 그만 구현해낼 수 있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힙합이 미국에서 시작된 음악이지만 한국에서 어떻게 하면 랩을 잘할 수 있는지 교과서적 선례를 남긴 사람은 버벌진트고. 작년 ‘데자부 그룹’이란 레이블을 설립하며 영입한 비앙, 심바 자와디는 돌연변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개성이 강하다. 그들의 음악은 어떤 정의도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단지 비앙, 심바 자와디의 음악일 뿐이다. 그들이 만든 음악의 본토가 어디인가 생각했을 때 정답은 한국밖에 없다. 미국이 아닌, 한국이었기에 가능한 음악이다.

사실 누구나 오리지낼리티를 갖고 싶어한다. 단지 그를 찾기 어려울 뿐이지. 본인의 오리지낼리티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한국에서 신앙을 가장 멋지게 풀어낸 래퍼. 물론 나보다 앞서 신앙을 말해온 래퍼는 있었지만 결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음악에서 신앙을 말하는 것이 더는 따분하지 않고 멋지게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증명한 것 같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작년 카니예 웨스트가 발표한 앨범 <Jesus Is King>만 하더라도 그의 정신적 지주인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나 다름없었다. 평단에서 굉장히 센세이셔널한 앨범이라 평가받기도 했고. 음악에서 신앙을 말하는 것이 ‘오그라든다’는 인식이 점차 전복되고 있는 것 같다.

광택이 도는 테크니컬 셔츠와 안에 덧입은 줄무늬 셔츠, 카고 팬츠, 두꺼운 벨트는 지방시 제품.

래퍼들에게 카니예 웨스트, 켄드릭 라마, 드레이크 가운 데 어느 쪽의 행보를 지지하는지 물으면, 잘은 몰라도 대답에서 그 사람의 성향만큼은 유추할 수 있다. 비와이의 경우 철저히 카니예 웨스트의 편에 서 있나? 맞다. 카니예는 힙합 음악을 하지만 힙합에만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진짜 예술이 뭔지 알고, 진짜 예술을 하는 사람이다. 켄드릭 라마도 좋아하지만 그는 어딘가 재야의 고수, 달인처럼 다가온다. 워낙 잘하니까. 나는 달인이 되고 싶진 않다. 하나의 심벌로 남고 싶다면 모를까.

작년 데자부 그룹을 설립한 것도 심벌로 향하는 하나의 여정이겠네? 맞다. 단순히 힙합뿐 아니라 세상에 위대한 예술을 남기는 집합체를 만들고 싶었다. 이런 작업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비앙, 심바 자와디라는 아티스트를 찾은 셈이고. 꿈에서의 체험을 현실에서도 그대로 겪는 현상을 데자뷔라고 부르지 않나. 내가 일찍이 비슷한 경험을 했고, 앞으로도 계속 데자부와 다름없는 현상을 만들어나가고 싶다.

보스로서 타고난 기질이 있나? 지금도 ‘대표님’이라고 불리면 그렇게 어색하다(웃음). 스스로 대표, 보스라는 호칭보다 ‘리더’에 가깝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아직 많이 부족하지. 그릇을 키워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년 프로듀서로 참여한 <쇼미더머니8>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 프로그램이 거듭할수록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 깨닫게 됐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확실한 것은, 참가자로 출연할 때가 훨씬 재미있다는 사실이다(웃음). 경연 때 가장 소름 돋는 랩을 내뱉으면 그만이니까. 그것만큼은 자신이 있다. 무대에서 어떤 ‘충격’을 던지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잘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프로듀서로 참가한 작년은 여러모로 달랐다. 많은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됐고, 솔직히 버거울 때가 많았다.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과 프로그램을 함께했고, 프로듀서이다 보니 그들의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서 스스로 얼마나 갇혀 있었으며 부족한 인간인지 깨닫게 됐다. 좁디좁은 우물 안에서 벗어나서 좀 의식적으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검정 코튼 재킷과 셔츠, 나일론 팬츠, 슈즈는 보테가 베네타, 크리스털 장식 모자는 큐 밀리너리 제품.

무대에서의 퍼포먼스 때문인지 몰라도, 비틀거리고 헤매는 비와이는 어쩐지 좀 낯설다. 그럼 음악을 하면서 가장 어렵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언제인가? 계속해서 새로움을 제시해야 하는 채무감에 시달릴 때.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예술이니까. 그런 면에서 어떤 경우에도 새로움을 잃지 않았던 카니예 웨스트, 마이클 잭슨, 다프트 펑크, 조르지오 모르더를 절로 리스펙트하게 된다. 물론 새로움을 제시해야 하는 난관이 해결되면서 음악이 다음 단계로 진화했다고 느껴졌을 때, 그게 그렇게 짜릿하고 재미있을 수 없다. 그런 하루는 작업실에 종일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서 미친 듯이 논다.

음악을 저만치 뒤로하고, 철저히 삶에서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것도 있나? 열등감이 제일 힘들지. 과거 열등감이 원동력이 되던 시절도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타고나게 가진 게 없다는 사실이 원동력이 되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자꾸 큰 것에 눈길이 가고 당장 손에 쥐어진 인기와 성공에 감사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열등감이 좋게 발현되면 다행이지만, 그런 감정은 대개 좋지 않게 끝나기 마련이니까. 맞다. 모든 것이 허무해진다. 그런데 열등감이 나에게는 굉장히 큰 유혹이다. 밤만 되면 슬그머니 인스타그램을 켜곤 ‘이 사람은 이걸 했는데 넌 못했지’라며 스스로와 싸우기 시작한다(웃음). 이상하게 무의식이 자꾸 그쪽으로 이끌어가는 것 같다. 다행히 요즘엔 그런 감정들에서 많이 벗어났다.

<더블유> 3월호가 출간되기 전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짬이 난다면, 어느 도시에서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나? LA에서 하늘이나 바라보며 시간을 축내고 싶다. 인앤아웃에서 햄버거를 해치우고 친구 집에 들러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거나, 여자친구와 함께 드라이브하며 해가 지는 곳까지 달리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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