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이별, 다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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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 권의 에세이만 꼽는다면, 정우성의 <내가 아는 모든 계절은 당신이 알려주었다>를 읽겠다.

연애와 관계를 그리는 수많은 에세이가 허무하게 느껴지는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과 이별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서다. 그 뻔하고 지루한 시간을, 당사자에겐 거대해도 타인에겐 그저 그런 이야기로 일반화될 사건을, 굳이 구체적 활자로 확인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너무 건조할까? 스스로 ‘내 연애사 별 것 없다’고 치부하며 살 때, 저 밑바닥에 있던 내밀한 감정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잡지 <GQ>와 <에스콰이어> 피처 에디터를 거쳐 미디어 스타트업 <더 파크>의 대표로 꾸준히 글을 쓰는 정우성의 에세이 <내가 아는 모든 계절은 당신이 알려주었다>(한겨레출판)이다.

이 책은 시집처럼 서정적인 제목을 하고서 가끔 불어오는 찬 바람처럼 잊고 있던 어느 감각을 깨어나게 한다. ‘썸’이라는 말보다 조심스런 구애라고 말하고 싶은 설레는 순간, 구구절절한 사연 대신 기억과 경험이라는 사실을 통해 담담하게 기술되는 언어, ‘사랑과 이별을 거쳐 다시 사랑’이라는 반복되는 삶 속에 기본적으로는 늘 혼자이기도 한 일상의 단상과 통찰. 사랑과 이별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냉정이나 열정 어느 쪽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나 이 에세이가 기억을 깨우는 ‘찬’ 바람처럼 느껴지는 건 관계 앞에서 담백하고 정연한 정우성의 문장들 덕분일 것이다. “나는 당신이 말을 예쁘게 해서 좋아요” “당신은 좀 더 칭얼댈 필요가 있는 것 같아. 그래도 괜찮아요” 같은 예쁜 대화를 주고 받던 작가의 기억이 흐를 때면 고전 영화의 한 장면을 엿보는 기분도 든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사랑하는 사람. 당신은 나의 애인입니다.”이제는 죽은 말이 된 줄 알았던 ‘애인’이라는 부름이 낯설고도 반갑게 다가온다.

“지나고 보면 담백해지는 것만이 중요했다. 산책은 산책일 뿐이라서, 그 짧은 시간의 모든 자극에 마음을 다 빼앗겼다 해도. 혼자서 부풀린 마음은 혼자만의 것이라는 걸 그땐 몰랐다.” -‘사랑은 간청해선 안 됩니다’ 중

이제 사랑이나 연인, 관계와 연애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 같은 건 잘 믿지 않는다. 영원한 것에 대한 기대, 마냥 행복한 사랑에 대한 전망도 일찌감치 버려두었다. 하지만 대화만은 하루하루 소중해졌다.”  – ‘내게 예쁜 말을 하는 사람’ 중

“우리는 이별을 선언하는 순간을 기준으로 길게는 몇 개월 혹은 몇 주 전부터 이미 이별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어?’ 중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아무도 곁에 두지 않았다. 외롭다고 징징대느니 혼자 산책하는 시간이 좋았다.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이 오만 가지나 되는 요즘 같은 시대에도 그런 말로 칭얼대진 않았다. 그건 품위의 문제라고도 생각하니까.” – ‘우리, 좀 지루해도 괜찮아요?’ 중

피처 에디터
권은경
포토그래퍼
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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