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지난 시즌에 비해 비교적 잠잠했던, 그래서 더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던 4대 도시 패션위크. 뉴욕, 런던, 밀란, 파리로 떠난 더블유 에디터들이 직접 보고 겪은 4개 도시의 기록.
런던 비타민 박희정
백스테이지에서 한국 모델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박희정은 타국의 생경함을 확 날려주는 긍정 에너지를 내뿜는 모델이라 더 그렇다. 무대에서는 카리스마 넘치지만 백스테이지에서 만나면 정답게 반기고 영상 취재의 히어로가 되어준다. 이번 에르뎀 백스테이지에서도 그랬고, 친한 모델 친구에게 한국말을 알려주며 시즌을 즐기는 여유도 참 예뻤다.
나쁜데 예뻐
백스테이지를 취재하는 재미 중 하나는 뉴페이스 모델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얼굴을 수집해두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 런던 쇼에서 눈에 띈 모델은 스테인버그. 러시아 태생의 그녀는 질 샌더 쇼로 데뷔한 모델이다. 새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매가 먼저 시선을 강탈하고, 몇 분 더 지켜보면 어딘가 못돼 보이는 인상이 느껴지는데 그게 또 매력적이고 예쁘다. 뾰로통한 표정에서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이 나는 이유는 포토그래퍼, 예술가로도 활동하는 남다른 이력 때문일까? J.W.앤더슨과 시몬 로샤 쇼에서 눈에 띈 스테인버그는 파리 패션위크의 샤넬 쇼에도 올랐으니 앞으로 자주 볼 것 같다.
짚투성이 소녀 (feat. 깃털)
시몬 로샤의 로맨틱하고 소녀적인 감성을 좋아한다. 귀여운 어린 양 두 마리를 안고 있는 그림이 담긴 초대장은 쇼장으로 가는 길을 설레게 했다. 1875년 빅토리아 시대에 열린 이후, 최근 다시 복원된 알렉산드라 궁전 극장에 자리 잡은 백스테이지에 가보니, 테이블마다 건초가 가득 놓여 있었다. 스태프들은 건초로 블레이즈 헤어를 연출하고, 얼굴 미간에는 깃털을 그려 넣느라 분주했다. 시몬 로샤 쇼마다 등장하는 모델 테스 맥밀런의 사랑스러운 자태 또한 반가워 졸졸 따라다니며 영상 취재를 했다. 정교하게 지푸라기로 지은 옷을 선보인 쇼는, 목가적인 무드를 제대로 보여줬고, 아름다웠다.
패션계의 숙제, 기후변화
런던 패션위크 내내 큰 쇼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색색의 피켓을 든 행렬이 패션 피플들과 뒤섞였다. 이들의 정체는 지난 7월 런던 패션위크 진행을 취소하라고 요청했던 기후변화 운동 단체 ‘멸종 저항(Extinction Rebellion)’. 하지만 패션위크는 여느 때처럼 진행됐고 그들은 기후와 생태계가 비상사태에 직면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패션 산업 역시 지구를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한 때. 쇼장 앞에서 좌석 체크를 하는 게 당장 급한 일이었지만, 덕분에 머릿속에 각인해둘 중요한 메시지를 다시금 상기했다.
안나 윈투어의 원픽?
안나 윈투어가 많은 디자이너의 쇼에 모습을 드러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조너선 앤더슨은 신인 때부터 그녀가 특히 아끼는 디자이너다. 런던 패션위크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성장한 그와 안나 윈투어가 쇼 시작 전 백스테이지를 함께 둘러보는 모습을 운 좋게 포착할 수 있었는데,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느껴졌다. 다음에 또 같은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면 인터뷰에 도전해봐야지.
런던의 다크호스
리버티와 협업하는 등 텍스타일이 장기인 매티 보반의 7번째 컬렉션 테마는 ‘Hope + Fear’였다. 그가 느끼는 희망과 두려움은 유니폼에 대담한 데커레이션을 더한 디자인으로 나타났다. 모델이 걸을 때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과장된 실루엣의 드레스가 특히 눈에 띄었다. 확대경처럼 커다란 장식을 얼굴에 씌워 모델의 얼굴이 말도 안 되는 모습으로 보이게끔 한 스타일링 또한 놀라웠다. 리버티의 패브릭과 네온 컬러 소재를 다채롭게 믹스해 사용한 피스들에서는 텍스타일을 다루는 그의 절정의 내공이 느껴졌다. 처음 선보이는 백과 미래적인 느낌의 선글라스, 컬러 페인팅한 포니테일 헤어까지, 재미 요소가 많았던 쇼.
뜻밖의 마놀로 블라닉
런던을 떠나기 전, 스콘과 티 생각이 나 월리스 컬렉션을 찾아갔는데 마침 갤러리에서 <An Enquiring Mind: Manolo Blahnik At The Wallace Collection>이라는 이름으로 마놀로 블라닉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월리스 컬렉션의 걸작 중 블라닉의 개인 기록 보관소에서 직접 고른 신발 디자인을 전시 중이었는데, 시간이 부족해 잠깐의 티타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 전시 입구만 봤지만 여자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주는 입구에 전시된 슈즈 드로잉만으로도 잠시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10월 27일까지 열리니 그사이 런던에 있다면 가볼 만한 전시다.
뭘 좀 아는 언니의 화장품
빅토리아 베컴 쇼가 있던 날, 빅토리아 베컴 뷰티도 정식 론칭했다. 쇼장 의자에 놓인 포스터로만 공개를 알려 궁금했던 터라, 컬렉션 일정이 끝난 후 매장을 찾아갔다. 탁 트인 매장 안쪽에 유니폼 차림의 스태프들이 뷰티 아이템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콤팩트한 스타일의 아이 메이크업 제품 3가지 중 팔레트가 눈길을 끌었는데, 빅토리아 베컴의 트레이드 룩인 스모키 아이를 연출하기 위한 매트 아이 팔레트 ‘Smoky Eye Brick’을 사고야 말았다. 팟 타입의 크리스털 아이섀도 ‘Lid Lustre’, 새틴처럼 발리는 ’Satin Kajal Liner’까지 모두 유해 성분을 배제했다고.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것 또한 브랜드의 중요한 철학. 다만 콤팩트한 제품을 원한 그녀의 주문에 따라 별도의 브러시가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하다. 서울에서도 볼 날이 기다려진다.
심쿵, 서라운드 버버리
빅토리아 시대에서 영감 받은 거대한 사운드 시스템과 거울 설치로 제대로 된 ‘심쿵’ 쇼를 보여준 버버리. 커다란 거울 큐브가 걷히고 나타난 대형 스피커에서 시작된 음악 또한 인상적이었다. 과거에서 영감 받아 미래를 그려낸 리카르도 티시의 버버리 킹덤, ‘에볼루션’으로 새로운 챕터를 보여준 컬렉션은 빅토리아 시대의 실루엣과 디테일에 대한 그의 고민이 어떤 모습으로 정의되었는지 볼 수 있었다. 금발로 변신하고 런웨이에 오른 켄들 제너와 지지 하디드, 벨라 하디드 등 톱모델부터 프런트로에 초대된 블랙핑크 지수와 유아인 등 한국 셀렙은 물론이고 바로 옆으로 나오미 캠벨, 두아 리파가 지나가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던 파워풀한 쇼였다.
런웨이 ASMR
레지나표의 컬렉션은 그녀가 영감을 얻은 시인이자 화가인 에텔 아드난의 작품이 옷으로 다시 태어난 듯했다. 아름다운 컬러 팔레트도 좋았고, 쇼가 열린 홀본 라이브러리의 분위기와도 조화로웠다. 쇼를 보는 내내 눈과 귀가 동시에 바빴는데, 몇몇 룩의 스커트 자락에 장식된 손가락 마디만 한 기다란 구슬이 모델이 걸을 때마다 영롱한 소리를 냈기 때문. 이게 묘하게 듣기 좋고 중독성 있어서 소리 나는 옷이 또 언제 나오나 쇼 내내 기다렸을 정도. 경쾌하게 찰랑이는 스커트 장식과 여성스러운 퍼프 숄더, 커다란 모자는 로맨틱한 무드가 가득했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남성 라인과의 밸런스도 좋았다.
- 디지털 에디터
- 금다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