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 미술가의 옷

W

스털링 루비가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패션은 그 스스로 천박한 것으로 치부되지 않기 위해 끊임 없이 예술 방면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모든 것이 겉잡을 수 없는 속도로 변해가는 시절 속에서도 예술 방면과의 협업이 좀처럼 끊이지 않는 이유다. 무엇보다 해체주의적인 디자이너일수록 예술 방면과 조우하려는 욕구는 더욱 맹렬한 기세로 그들을 덮친다.

자신의 흔적을 그림자처럼 지워버린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는 이를 가장 절실하게 증명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는 늘 여러 방면의 예술가들을 자신의 곁에 뒀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많이 손을 내밀었던 사람은 스털링 루비다. 2009년과 2014년, 두 번이나 라프 시몬스는 스털링 루비의 이름을 내세운 컬렉션을 세상에 내놨다. 2016년, 그가 캘빈 클라인에 역임한 후엔 스털링 루비에게 그의 모든 것을 맡겼다. 캘빈 클라인 컬렉션을 위한 소재의 개발은 물론이고 무대 장치에서부터 매자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말이다. 벨기에에서 나고 자란 디자이너와 미국에서 나고 자란 설치 미술가의 만남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좀처럼 예측하지 못했던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세상에 내놨던 스털링 루비가 그의 이름을 내건 패션 브랜드를 선보인다. 알렉스 카츠나 로버트 라이센버그 등과 이름을 나란히 하며 현대 미술의 거장이라 불리는 그가 패션 브랜드를 내세운다는 점은 놀랍도록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패션이 예술을 종종 탐하긴 했어도, 예술이 패션에 발을 들이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말이다.

그의 이름 약자에서 딴 ‘S.R 스튜디오’는 그가 완성한 작품들처럼 다채로운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다. 잭슨 폴락의 작품처럼 혼탁한 색들이 조화를 이루고, 스털링 루비가 곧잘 하는 방식으로 완성된 기괴한 형태들이 돋보인다. 그와 늘 마음을 맞추던 라프 시몬스의 초창기 해체주의적인 관점이 옷 속에 고스란히 녹아난다. 편하고 실용적인 옷들이 만연한 요즘 시절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이유다.

프리랜스 에디터
김선영
사진
Instagram @s.r.studio.la.ca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