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감 결핍은 내 피부처럼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네”라고 으르렁대던 지코는 지난 9년 동안 델 것처럼 뜨거운 시간을 통과했다. 이를 악물고 달려온 결과, 지금 지코의 손에는 곧 세상에 나올 첫 번째 정규 앨범 <Thinking>이 들려 있다.
RC카를 깨부수는 장면을 촬영할 때 보니 스트레스가 많았나 보다. 더 큰 걸 준비했으면 사달이 났을 거다(웃음).
“잘못 씹다간 이빨 다 나간다”고 말하던 ‘터프 쿠키’의 현현이었달까. 2014년이었지. 블락비로 데뷔하고 3년 만에 발표한 첫 솔로곡이었다.
그 후로 솔로 작업보다 프로듀서로 참여한 음악을 들을 기회가 많았다. 맞다. 피처링이나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린 곡이 대다수다. 늦어도 9월 말이나 10월 안에는 첫 번째 정규 앨범이 나온다. 실은 작년 말에 발표할 예정이었는데, 올해 ‘킹 오브 더 정글(KOZ)’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오픈하고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여러 일이 한꺼번에 닥치는 바람에 발매 시점이 계속 미뤄졌다. 이제는 정말 내야 할 때인 듯싶다.
박재범이 진행하는 네이버 NOW의 <브로큰 GPS>에서 맛보기로 음원을 공개했다. 지코를 떠올리면 언제나 링에 오르기 직전의 파이터 같은 인상이 강했는데, ‘존재를 계속 깜빡하는 이유’, ‘조심히 발 디뎌봤자 덧없어’ 등의 가사가 들려오니 어쩐지 낯설더라. 한편으로는 모종의 변화가 반가웠고. 이전과는 작업 방식이 좀 달랐다. 나에게 말을 걸고 대답을 듣는 방식으로 앨범을 만들었거든. 가끔 거울을 들여다볼 때면 여러 개의 목소리가 말을 거는 듯한 경험을 하지 않는가. 스스로 장하고 자랑스럽게 여길 때가 있는가 하면 ‘너 진짜 고생하면서 산다’, ‘왜 이렇게 인생이 타이트하냐’라고 되뇌며 약해지는 순간이 온다. 나이가 들고 점차 세상을 알아가면서 약한 부분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것 같다. 문득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어린애로만 남는다면 스스로를 해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제삼자의 시선에서 스스로를 타자화하며 곡을 쓰다 보니 트랙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앨범 타이틀도 <Thinking>으로 정했다.
이센스와 저스디스가 그랬듯 래퍼가 자신의 첫 앨범에 물기 짙은 자전적 서사를 녹이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로 자리 잡은 것 같다. <Thinking>의 경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지금까지 프로듀서로 발표한 곡만 해도 상당한데, 그동안 너무 많은 이야기를 던지지 않았나 싶다. 저마다의 삶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데 구태여 나의 복잡한 서사에 귀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치더라. 감정에 심취하다가도 핸들을 완전히 꺾어서 쉽게 공감하고 가볍게 소비할 수 있는 장르로 노선을 튼 트랙도 많다. 곰곰이 생각했던 고민이 결국엔 아무것도 아닐 때가 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갈아엎어서 허탕 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래서 8개월이나 걸렸나 보다(웃음).
이쯤 되니 이번 앨범이 노리고 있는 과녁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차트에서 뜨겁게 사랑받는 것과 평단에서 오래도록 회자되는 것 가운데 무엇이 더 기쁠 것 같나? 전부. 보통 클럽이나 파티에서 신나고 싶을 때 내 음악을 찾지 않나. ‘지금 우울하니까 지코 음악 들어야지’ 같은 경우는 거의 없지 싶더라. 이번 앨범을 통해서는 여러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아티스트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흥이 사라진 지 오래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달리 스스로 무채색에 가까운 인간이라고 느끼거든. 슬픔이나 위로받고 싶은 우울함 등등의 감정을 꽤 오래 파헤쳐온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유독 대화를 거는 트랙이 많아졌다. ‘살다 보니 이렇지 않아? 너도 똑같이 생각해?’ 이런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면 음악으로 대화를 나눈 셈이겠지.
<Thinking>을 기점으로 다른 유형의 리스너가 유입될 수도 있겠다. 이번 앨범에 가장 처음으로 피드백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중학생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래퍼 페노메코. 듣고 나더니 음악적 스펙트럼이 더욱 넓어졌다고 평하더라. 래퍼를 넘어서 뮤지션으로 영역을 넓힌 것 같다는 피드백도 심심찮게 들었다.
한편 올해의 시작은 ‘KOZ’의 설립으로 알렸다. 작년에 치른 첫 단독 콘서트의 타이틀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만큼 완벽했던 프로젝트가 없었다. 기획, 연출, 퍼포먼스, 편곡까지, 솔직히 말해 ‘베스트’라고 생각하거든. 그때 공연은 언제 어디에 가져다 놓아도 자신이 있다. 가장 자부심을 가진 콘텐츠가 KOZ였기 때문에 회사 이름도 여기서 가져왔다. ‘음악이 만든 생태계에서 내가 최고의 포식자다’, 이런 배짱도 담겨 있고.
다양한 레이블이 있지 않은가. 박재범과 그레이가 속한 AOMG는 특유의 농밀하고 섹시한 바이브가 느껴지는 반면 이센스와 XXX를 내세우는 BANA는 ‘전부 필요 없고 마이 웨이를 걷는다’는 식의 굽히지 않는 ‘대’가 느껴진다. KOZ에게는 어떤 색깔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선, KOZ는 힙합 레이블이라고 규정짓기 애매하다. 래퍼나 R&B 아티스트에 국한해 영입할 생각이 전혀 없거든.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열어둔 채 포괄적인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펼치고 싶다. 괜찮은 어린 친구 5~6명이 있으면 아이돌 그룹을 기획할 수도 있고, 배우나 개그맨, 사진가, 디자이너 등등 경계를 두지 않고 영입할 계획이다. 지금 물망에 오른 친구도 두어 명이 있다.
언젠가 “레이블이 음악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서 10개가 세상에 나오면 8개는 망한다. 솔직히 나라면 자신 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지코가 쥐고 있는 선명한 자신감은 대체 무엇에서 오나 늘 궁금했다. 이미 증명해봐서 방법을 안다. 아이돌, 래퍼, 프로듀서를 거치며 다양한 포지션을 모두 경험해봤다. 그러면서 쌓인 노하우가 확실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대성한다고 호언장담까지는 하지 못하지만 언젠가 무조건 빛을 볼 거라고 확신한다. 올해로 스물여덟을 맞는다. 숫자로만 접근하면 당연히 어린 나이지. 그런데 아티스트의 나이는 셈법이 좀 다른 것 같다. 데뷔하고 첫 음악을 발표한 순간부터 한 살인 셈이다. 2011년 데뷔했으니 올해 아홉 살이다. 올드해졌다기보다 할 수 있는 영역이 훨씬 넓어졌다고 접근하는 편이다. 지금이야말로 적기지. 올해 KOZ를 설립한 이유이기도 하다.
보스가 된 이후로 생긴 변화가 있나?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데 미친 듯이 고뇌하게 됐다(웃음). 워낙 정신이 없어서인지 건망증이 심해졌다. 언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놓치는 부분이 많아진 것 같기도 하고. 생각 없이 살 때보다 오히려 건설적으로 살기 힘들다.
그래서 메모를 하는 건가?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종이와 펜을 들던데. 그렇다. 적으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휴대폰으로 메모하는 습관도 들였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을 적지 않으면 꼭 까먹더라.
그런데 정말 아이폰 유저가 아닌가 보다(웃음). 인터넷에 떠도는 포스팅 봤나. 자취해본 적 없는 장기하, 학과 대표였던 오혁을 시작으로 평소 이미지와 다른, 반전을 가진 연예인 리스트에 ‘갤럭시 쓰는 지코’도 있다. 봤다. ‘충격 반전’이란 제목으로 떠돌더라(웃음). 특별한 이유는 없고, 일하기 편해서 쓰고 있다. 원격으로 음악 공유하기에 너무 간편하지. 거의 7년째 갤럭시를 사용 중이다.
<쇼미더머니 8>이 한창이라 얘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 없다. 멀찍이서 보더라도 이제는 새로운 ‘판’이 형성되겠구나 싶더라. 20대 초반인 래퍼의 수가 상당하다. 신기했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내가 랩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힙합을 듣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당시 힙합이 얼마나 비주류 문화였는가 하면 한 학년에 힙합 듣는 사람이 5~6명에 불과했다. 그중 하나가 페노메코였고(웃음). 그런데 지금은 힙합이 주류 음악에 속하지 않은가. 학창 시절 내가 즐겨 듣던 음악과 지금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인 래퍼들이 음악을 시작하던 당시 유행한 음악은 결이 완전히 다르다. 각기 다른 세상에 기대고 있는 셈이랄까.
그럼 철저히 리스너 입장에서 ‘리스펙트’하게 되는 래퍼가 있나? 앨범 완성도 면에서는 켄드릭 라마,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트렌드세터로서는 카니예 웨스트, 대중과 마니아를 동시에 휘어잡는다는 점에서는 드레이크. 랩만 놓고 봤을 때는 무조건 제이지다. 제이지를 이길 사람은 현재로는 없다.
래퍼는 아니지만 촬영하는 내내 틀었던 썬더캣의 음악은 어떤가. 일단 내가 아니라 포토그래퍼가 튼 음악이었다(웃음). 평소에 썬더캣 같은 뮤지션의 음악을 잘 못 듣는다. 음악적 장치가 너무 빼곡해서 듣고 나면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힘들더라. ‘여기서 이런 코드 진행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베이스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네’ 따위를 생각하다 보면 음악이 어느새 끝나 있다. 예전에는 정보 주입에 대한 욕심이 강해서 음악을 밀린 숙제하듯 챙겨 들었는데, 요즘엔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듣지는 않는다. 너무 잘하는 음악을 들으면 오히려 괴롭거든. 마찬가지로 그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림을 온전히 아름다운 이미지로만 받아들이겠나.
같은 방식으로 지코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국내에도 있나? 크러쉬. 걔는 거의 정점에 있다. 듣다 보면 ‘얘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싶다(웃음).
일에서 완전히 분리되어서 요즘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들뜨는 순간이 많이 없어진 것 같다. 신나거나 웃는 순간이 절대적으로 줄었다. 반대로 사색에 잠기는 시간은 늘어났고. 이런 상태 자체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음악이 취미라는 무서운 소문도 들리더라. 일단 음악은 더 이상 취미가 아니다. 요즘은 운동 아니면 넷플릭스 둘 중 하나다. <기묘한 이야기>, <블랙 미러>, <빌어먹을 세상 따위>, <러브, 데스 + 로봇>을 재미있게 봤다. 최근에 나온 트래비스 스콧 다큐멘터리 <트래비스 스콧: 날 수 있어>도 대박이다.
오래 작업한 정규 앨범이 조만간 발매되고, 이제는 어엿한 보스 자리에 있지 않은가. 오롯이 하루를 휴식하며 보내는 시간이 이전보다 많아졌겠다. 글쎄, 스스로에게 휴식 시간을 좀처럼 주지 않는 편이다. 무언가 하지 않더라도 항상 의자에는 앉아 있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박한 이유가 무엇인가? 아직은 쉴 때가 아닌 것 같아서?
언제쯤 자신을 놓아줄 수 있을 것 같나? 이번 앨범이 잘 풀리면 휴가를 며칠 보낼 생각이다. 조용하고 차분한 무드를 좋아하거든.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한 호텔을 잡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마냥 쉬고 싶다. 그저 맛있는 것만 먹고 지낼 거다.
그때 어떤 음악이 흐르면 좋을 것 같나? 쳇 베이커의 ‘I Fall In Love Too Easily’.
- 패션 에디터
- 김민지
- 피처 에디터
- 전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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