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한 지성과 예민한 감성으로 주목받는 동시대 소설가 셋의 신작을 또 다른 소설가와 시인에게 건넸다. 독자가 된 작가는 책이 남기는 질문에 그들 각자의 촉수를 세워 응답했다.
당신은 누구에게 일기장을 맡기고 싶은가?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마음산책)
오늘도 누군가의 브이로그를 본다.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다. 브이로그에 입문한 사람들은 대부분 ‘별거 없는데 계속 보게 된다’라고 말하곤 한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브이로그는 자극적이고 화면 전환이 빠른 유튜브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식물처럼 자라고 있다. 자극적인 제목을 달기에는 내용이 매우 부실하고, 전하려는 메시지도 희미하며, 인기를 끌려는 야망이나 목적도 딱히 없다. 그저 자신이 사는 하루의 일상을 지루하고 무해한 방식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할 뿐이다.
별거 없는데 계속 보게 되는 게 브이로그의 요상한 매력이라면 그게 브이로그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별거 없음을 우리 삶에 초대하고 받아 들이는 것 말이다. 브이로그를 보면서 자극이나 현란함, 주제 혹은 재미를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 인간이 하루를 얼마나 평평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냈는지 구경한다. 별일 없는 나날에 대해, 그 무의미에 반발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장을 보고, 식사를 하고, 지인을 만나 한잔하고, 뚜벅뚜벅 집으로 돌아와 아이스크림 먹는 모습을 보는 데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낮은 기대치를 연습하는 게 브이로그가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은 그런 의미에 서 매우 브이로그적이다. 그녀의 글에는 커다란 줄기가 되는 사건도 없고, 추적해야 할 (어떤) 과거도 없다. 어떤 공간에서 마주친, 지독하게 사소한 단상들이 자극적인 서사 없이 이어진다. 소설 속 화자는 병원 대기실에서 만난 동행자가 없는 낯선 여인, 박물관에서 스쳐 지나간 어떤 여인, 서점에서 마주친 옛 애인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그리고 지나가버린다. 그런 가벼움이 좋다. 스쳐 지나간 사람의 발목을 잡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소설이고 서사일 것이다. 끝난 사랑이 뒷북을 치며 다시 찾아와 인물들의 삶을 망쳐놓는 것은 서사 전개에 요긴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삶에는 기승전결이 없지 않은가. 한 사건이나 치명적인 타인에 따라 삶이 전개된다면 그 삶의 주인은 사건이지 내가 아닐 것이다. 내 삶에는 사실 별다른 중요 서사나 중심인물이 없을뿐더러 매우 너저분하고 별것 없다. 끝난 사람은 그냥 지나가버린다. 스쳐 지나간 어제의 일상은 죽는 날까지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은 또 다른 지루한 오늘일 뿐이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별다른 인과나 얽힘이 없다. 어제와 오늘은 남남인 적이 더 많았다. 대신 이런 삶을 받아들일 때 나는 일상을 조금 더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다. 사라진 것들은 꾸준히 사라진 채 내버려두는 것이 브이로그이고,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중심 사건에서 풀려난 이야기들은 조각으로 떨어져 나가며 여러 공간에 심어진 채 자라나기 시작한다. 결국, <내가 있는 곳>과 브이로그는 우리 삶에, 흥미진진한 서사가 없다는 지독한 사실을 유쾌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갑자기 중요한 사건이나 서사가 들어찰까 두려웠다. 나는 화자의 일상에 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브이로그 유튜버가 대스타가 되어서 일상이 화려하게 바뀌거나, 아니면 갑자기 불행한 일을 겪어서 일상이 무너져버릴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큰일이나 서사는 눈길을 끌지만, 그만큼 휘발성이 커서 금방 우리를 떠나기 때문이다. 별거 있어서 보기 시작한 것들은 별거 없는 순간을 견디지 못 하게 만든다. 반면, 일기적인 일화들을 사소하고 감각적으로 쌓아 올린 줌파 라히리의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님’을 지속하는 힘, ‘별거 없음’에 내성 쌓기를 알려주기도 한다. 그녀의 책이 위로를 가져다주는 이유다.
<내가 있는 곳>에는 화자의 친구가 한 일기장을 화자에게 맡기는 일화가 있다. 일기장은 친구의 딸이 쓴 것이다. 거기엔 자주 출장을 가고 집을 비우는 엄마에 대한 내용이 가득하다. 평소 시부모와 휴가를 보내야 하는 고통에 대해 수시로 토로한 친구는 집을 비우고 도망치는 삶이 묘사된 그 일기장을 집에 두고 싶지 않다. 화자는 묻는다. “그래서 넌 늘 출장을 다니면서 한 달에 두 번씩 도망치는 거 아니니?” 친구는 떠나고 싶다. 반면 딸의 시선에서 본 자신의 모습을 아주 없애버리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이 일기장을 어딘가에 묶어놓고 싶어 한다. 말뚝에 매여 있고 싶기도 하므로. 줌파 라히리에게도 두 버전의 삶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모험에 찬 서사물과 그 이면의 이야기. 그녀가 서사에 기반한 다른 작품들을 남긴 동시에, 서사가 없는 삶의 파편들에 관한 이야기를 묶은 <내가 있는 곳>을 남긴 점은 흥미롭게 집 밖을 나도는 모험에 찬 삶과 그 이면의 삶을 함께 보존하고 싶었던 걸까. 없애버리기 싫고, 집에 두는 것도 꺼려지는, 두려울 정도로 지루하며 사실적인 일기장을, 소설이라는 형태로 독자에게 맡겨놓은 건 아닐까. 글 |문보영(시인)
방관자의 죄는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다카하시 히로키의 <배웅불>(해냄출판사)
학교 다닐 때 따돌림을 당한 적이 없다. 축복이다. 그런데 저주받은 축복이다. 누군가가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심심치 않게 목격했다. 학년이 오르고, 학급이 바뀔 때 희생자는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으며 전혀 새로운 희생자가 등장하기도 했다. 아직도 가끔, 그와 관련된 장면이 나오는 꿈을 꾼다.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을 때리듯 누군가가 머리를 쥐어박히고 낡은 책상처럼 무릎이 꺾인다. 나는 곁눈으로 지켜본다. 똑바로 바라볼 자신은 없다.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되돌아올 폭력의 크기에 압도당해 있다. 순식간에 장면이 바뀐다. 나는 가해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친다. 순간,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무기가 되어 나를 덮친다! 잠에서 번쩍 깬다. 이마와 목, 등과 허리가 흠뻑 젖어 있다. 피처럼 진득진득한 이 땀은 폭력의 희생자가 흘린 것이 아니다. 폭력의 방관자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편안한 침대 위에서 전해지지 못할 죄의식에 시달리며 흘린 것이다. 하찮은 땀이며 위선의 땀이다. 이는 다카하시 히로키가 쓴 소설 <배웅불>의 주인공인 중학생 ‘아유무’가 어느 날 밤 침대 위에서 흘릴 땀이기도 하다.
아유무는 학교 폭력의 방관자다. 방관자들은 자신의 안전에 직접적 위협이 오기 전까지 경계 위에서 줄타기한다. 그 줄 위에서 희생자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고(‘가슴을 쓸어 내리고’), 어떤 때는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를 건네기도 하며(‘남은 콜라 다 마셔’), 방관의 시간이 길어지면 그것마저 희미해져 위에서 아래로 깔아보기도 한다(‘너한테 줄 수 없어’).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아유무와 우리는 줄 위에서 내려온다. 그때의 일은 서서히 잊힌다. 폭력적 사건들은 어느 곳에서나 벌어지는 흔한 일 중 하나로 격하된다. 시간은 우리를 용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용서가 사라진 시대에 도착하고 말았다.
어느 가수와 배우가, 누구의 매니저가 과거 학창 시절 누군가를 괴롭혔다는 사실이 뒤늦게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유물처럼 환한 빛 아래로 끌려 나온다. 사람들은 앞을 향해 손가락질 한다. 당사자는 쏟아지는 비난에 밀려 사죄하고 방송에서 하차하며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하러 가기도 한다. 인과응보. 등가교환의 법칙. 공소시효의 역능. 그런데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폭력은 재생산되고 피해자는 쌓여 간다. 구조의 문제? 나쁜 놈 뒤에 더 나쁜 놈이 있고, 더 나쁜 놈 뒤에 더 흉악하고 난폭한 놈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돌아보아야 할 구조는 방관자의 죄를 집요하게 묻지 않는 현실에도 자리 잡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이를 ‘풍요로운 침묵’으로 표현한다. 팔짱을 낀 채 연민을 느끼고, 위로의 눈빛을 건네지만 침묵을 깨뜨리지는 못 한다. 그것의 결과는 두 가지다. 피해자의 신체와 영혼은 처참히 무너지고, 우리는 무시무시한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의 목격자이자 관객이 되어(‘한심 하기는, 너희는 관객이니까 고개 돌리지 말고 제대로 봐야 해’) 피해자의 눈을 마주 보아야 한다. 그 눈은 손가락이다. 우리가 가해자들을 가리킬 때, 비난할 때 썼던 그 손가락.
모두가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이건 태어나면서 짊어지게 되는 ‘원죄’를 추궁받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피해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모른 체한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 가깝다. 우리들이 꿈을 꾸며 흘리는 식은땀과 드문드문 가슴을 옥죄어오는 죄의식은 누구의 책임인가 하고.
배웅불은 ‘저승으로 돌아가는 조상의 영혼을 배웅하기 위해 피우는 불’을 의미한다. 소설 속 따돌림과 폭력의 피해자인 미노루는 배웅불을 피우는 날, 잔인한 폭력에 노출된 이후 마치 신과 같은 존재인 ‘저승님’처럼 분노를 폭발시킨 다. 아유무 역시 미노루의 분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아유무는 이렇게 소리친다. “나는 (너에게 폭력을 행사한) 아키라가 아니야! 아키라는 아까 숲 밖으로 도망쳤다고!” 미노루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대꾸한다. “나는 처음부터 네가 제일 열 받았었어!” 글 | 김기창(소설가)
그리하여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테드 창의 <숨>(엘리)
나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미스터 포터에서 세일을 시작하고 난 뒤였다. 미스터 포터는 영국의 쇼핑몰 사이트고 내 휴대폰에는 앱이 깔려 있다. 포터에서 알람이 왔다. 시즌 오프. 나는 앱을 열었고 아워레가시의 재킷을 구매했다. 물론 내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후 웹서핑을 할 때면 늘 미스터 포터 광고가 아래쪽에 떴다.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를 귀신같이 알고… 마거릿 호웰, 아크네, 스튜디오 니컬슨…. 백화점의 절반 가격이네… 근데 여름에 굳이 가을 재킷을 살 필요가 있어?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나의 내면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남들이 다 사버리기 전에 사라고! 그래서 나는 샀다. 전적으로 내 선택으로… 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생각했다.
테드 창의 단편소설집 <숨>을 읽고 난 뒤에 그게 내 선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하면 웃긴 일일까. 테드 창은 SF 장르가 낳은 최고의 스타 작가이자, 인류와 지구의 미래에 대해 성찰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가다. 영화 <컨택트>의 원작이자 테드 창의 대표작(이 되어 버린) <네 인생의 이야기>는 언어의 한계를 시간 인식의 틀과 결합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조금 거창한 것 같긴 하지만) 수작이었다. 그런데 그런 작가의 소설을 읽고 겨우 쇼핑 따위를 반성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쇼핑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브랜드가 표방하는 철학과 전 지구적 물류 네트워크와 거대 기업과 그들을 선택하는 의식 구조와 의식 구조를 파악한 알고리듬과 비어가는 통장 잔고까지….
단편 중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시간 여행에 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여타의 시간 여행 작품과 다르다. 과거로 돌아가서 인류의 미래를 구하는 영웅적인 이야기는 없으며 영화 <어바웃 타임>처럼 자신의 연애를 구하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은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를 볼 수 있지만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시간 여행은 두 배의 절망을 안겨주는 장치인 셈이다. 운명은 정해져 있다… 네가 과거로 돌아가도 미스터 포터에서 옷을 사는 걸 막을 순 없다… 그 결과 네가 거지가 된다고 하더라도… 너는 또 사게 될 것이다!
다음 소설을 보자. ‘우리가 해야 할 일’. 테드 창이 과학 학술지 <네이처>의 청탁을 받고 쓴 이 짧은 소설에는 예측기라는 기계가 나온다. 설정은 간단하다. 이 기계는 당신이 몇 초 후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예측한다. 이 기계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당신의 행동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당신이 아무리 발악해도 당신은 당신의 행동을 바꿀 수 없다. 사람들은 예측기를 사용해보고 집단 경기를 일으키며 자살하거나 코마에 빠진다. 그럴 수밖에. 내 선택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이 내 의지가 아니었다니… 너는 이미 옷을 사고 있다!
테드 창이 지속적으로 다루는 테마는 다름 아닌 자유의지다. 자유의지는 철학과 신학에서 꾸준히 탐구된 테마이며 오늘날 세계 질서의 근본 원리이자 아이디어다(아이디어라고 함은 자유의지가 사실상 발명품이라는 뜻이다). 우리 나라만 해도 자유민주주의공화국 아닌가. 기독교 신학의 근간은 자유의지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우리는 그에 따라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진다. 자유가 없으면 책임도 없고 그렇다면 천국도 지옥도 존재할 수 없다. 어차피 내 선택이 아닌데 뭐. 될 대로 되라지! 이 사태를 피하기 위해 철학자나 정치인,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강조해왔다. 인간 영혼의 자유!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썼다. “자유를 위해서 /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 사람이면 알지 (…)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하나 불행히도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이 더 맞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선택은 생물학적, 물리학적 한계 속에 속박되어 있고 알고리듬으로 예측 가능하며, 무한히 갈라지는 평행 우주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일반적인 SF에서는 자유의지를 테마로 할 때 어정쩡한 타협과 영웅주의로 결론 내린다. AI 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 같지만, 인간은 결국 선택을 통해 미래를 바꾼다는 결론(<마이너리티 리포트>나 <터미네이터>가 그렇다. 쉽게 말해 당신이 결심하면 쇼핑을 멈출 수 있다!). 테드 창은 정반대로 나간다. 그는 과학의 결론을 인정하고 수용한다. 그의 소설이 급진적인 질문이 되는 것은 바로 이때다. 정말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 행동과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면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있을까, 라는 질문. <숨>은 이에 대한 테드 창의 답변이다. 비인간적인 SF적 미래에 맞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답변. 이 답변이 궁금한 사람들은 <숨>을 읽어보시길. 참고로 소설 속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메시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 글|정지돈(소설가)
- 피처 에디터
- 권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