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기대작 <기생충>의 박소담 인터뷰.
‘봉준호의 영화, 제목은 <기생충>, 가난한 가족과 부유한 가족이 충돌하는 가족희비극.’ 몇 가지 단서 외에 도무지 곁을 주지 않던 올해의 기대작이 개봉을 앞두고 조금씩 속을 드러낸다. 소녀 같지만 소녀는 아니고, 허물없는 얼굴로 악령이 깃든 연기를 하며 상업 영화계에 등장한 박소담. 이제야 비로소 진짜 그녀를 알게 된 기분이다.
오랜만의 화보 촬영인데, 어제 잠은 잘 잤나? 저녁에 연극 <앙리 할아버지와 나>를 보고 12시 좀 넘어 집에 들어갔다. 얼굴에 팩을 붙이고 좀 있다가 떼고 자야지, 했는데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웃음).
<기생충>은 4월에 첫 예고편을 공개하기까지, 참 은밀했다. 예고 편을 접한 사람들이 저마다 감상과 추측을 쏟아냈다. ‘이거 대체 무슨 영화야?’부터 ‘이 사회의 기생충 같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사실은 신흥 재벌이 기생충이라는 말을 하려는 거 아닐까?’ ‘누가 분명 죽는다!’까지. 나는 작년에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SF 영화인 줄 알았다. 이 일련의 사태에 대해 한 말씀 부탁한다. 큰 관심을 받으니 기분이 아주 좋다. 우리끼리도 즐기면서 찍었는데, 많은 이들이 기다려준다고 생각하니까 설렌다. 어서 개봉일이 다가왔으면 좋겠다. 영화를 본 사람들과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기생충> 팀 단톡방에서 주도적으로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사람은 누군가? 딱히 한 명을 꼽을 수가 없다. 우리 다 말이 많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말 많이 하나 보자’고 할 정도로 서로 말이 많다.
작년 5월 크랭크인해 4개월간 촬영하고 긴 후반 작업을 거쳤다. 〈기생충에 임한 시간은 어떤 경험이었나? 오디션을 보지 않고, 감독님에게 먼저 연락이 와서 작품을 한 건 저예산 영화를 할 때 말고는 처음이었다. 놀랍고 신기했다. 송강호 선배님의 딸 역할이라는 말을 듣고는 이 작품을 꼭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현장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즐기면서 촬영했다. 선배님들이 “넌 왜 항상 신나 보이니?”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나는 전원이 백수인 가난한 집에서 오빠보다 맏이 같은 면이 있는 기정이로 나온다. 상황 판단 빠르고, 사람 대하는 일을 그리 어려워하지 않고, 순발력도 좀 있는 편이고. 그런 점은 실제 나와 좀 비슷하다.
현장을 즐길 수 있는 여유는 어디서 나왔을까? ‘내 말’을 할 수 있는 연기가 그리웠다. 말이 너무 하고 싶었다. 무슨 뜻이냐면, <검은 사제들>에서 귀신 들린 역이나 <설행-눈길을 걷다〉의 수녀 역은 역할의 특징상 일상적인 언어와 거리감이 있는 대사를 주로 했다. 평소에 우리가 하는 말과는 성격이 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기생충>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입에 착 붙었다. 오랜만에 현실감 있는 말을 이렇게 저렇게 해볼 수 있어서 무척 즐거웠다.
봉준호 감독이 최우식과 박소담은 정말 남매처럼 닮아서 시나리오를 쓸 때 둘의 사진을 비슷한 표정별로 묶어보고 그랬다더라. 사실 <옥자> 캐스팅을 앞둔 시점에서 감독님을 만난 적이 있다. 미자 역할을 위해 어린 얼굴의 배우를 찾으셨는데, 만나자고 약속을 잡고 보니 내 나이가 생각보다 너무 많다는 걸 아신 거다(웃음). 이왕 만나기로 한 거 같이 차나 한잔 마시자고 하셔서 2시간 정도 수다를 떨었다. 우식 오빠와 셋이 처음 만나는 날에는 감독님이 ‘두 사람 모두 최대한 추레한 모습으로 나와달라’고 주문하셨다. 그래서 머리도 안 감고 나갔다. 우리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시더라.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만 했는데 실제로 같이 앉아 있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고 하셨다.
봉준호 감독이 <마더>의 마지막에서 김혜자가 버스 타고 가는 신을 찍을 때 일화 아나? 버스 유리창을 관통하는 빛이 최적인 상태를 잡기 위해 테스트해보니, 가장 알맞은 시간대가 새벽 4시경이어서 그때 찍었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봉테일’의 진면목을 현장에서 확인했나? 우리 영화에 동선 이동이 많은 편인데, 그 동선에 맞게끔 카메라 움직임이 사전에 다 계산돼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움직이면서 이 대사를 하면 카메라가 저기서… ’ 식으로 동선과 대사와 카메라 위치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그게 진짜 가능한가?’ 싶었는데, 가능했다! 사전에 짜놓은 완벽한 콘티로 모든 것의 합이 맞아떨어졌을 때 엄청 짜릿하다. 감독님 머릿속에 그 모든 게 다 정리돼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감독님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크게 반응은 안 하다가 갑자기 뭐가 생각난 듯 메모를 하신다. 안 그렇게 보여도 늘 뭔가를 하고 있는 분 같아서 그것도 신기하다.
틸다 스윈턴도 봉준호가 부리는 그 디테일의 마법을 직접 체험하고 나서 더욱 그를 좋아하게 된 게 아닐까? 배우들이 자기 연기를 알아서 하도록 자유롭게 풀어주셨다. 내 자유대로 연기한다는 게 크게 불안하지 않았던 이유는, 풀어주면서도 그 안에서 잡아야 할 것은 명확하게 잡아주셨기 때문이다. 또 이전까지 나는 ‘폐 끼치지 말고 내 것이라도 잘하자’ 주의였는데, 영화 한 편을 완성하는 데 수많은 사람의 손길이 존재한다는 걸 처음 제대로 실감했다. 감사한 일이다.
송강호와는 이준익 감독의 <사도>를 같이 한 적이 있다. 그 작품에 서는 영조의 눈에 든 기고만장한 후궁으로 나왔는데, 이번 작품에서 그와 훨씬 접점이 많았을 것 같다. 송강호라는 배우에게서는 뭘 발견했나? ‘봉준호 감독님만큼 디테일에 강한 분이구나’. 상대 배우의 모든 시도를 다 받아주신다. 연기를 다르게 할 때마다 선배님이 모두 다른 리액션으로 받아주고, 그에 따라 또 다른 연기가 나오는 식으로 ‘주고받기’가 가능해서 신났다. 사실 <사도> 때는 영조 귀 닦을 물을 들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떨렸다(웃음). 이번에는 부녀 사이니까 느낌이 좀 다르겠지 싶으면서도 대선배님 앞이라 긴장했는데, 우리 현장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가족 관계로 얽혀서 그런지 화기애애 했다. 선배님이 내가 처음에 많이 긴장했다고 하면 안 믿으신다. 아직까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검은 사제들>이 개봉한 게 2015년이다. 그해에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과 <사도>가 개봉했고, 그전부터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를 활발하게 찍었다. 신인여우상도 여러 개 받았지만, 청룡영화상과 부일영화상 등등에서는 신인상을 건너뛰고 바로 조연상을 받았다. 언론에 ‘무쌍 배우 전성시대’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던 때다.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나? 정말 바쁘게 살았다. 인터뷰를 하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기자님들이 있었다. 그러다 지치지 않겠냐고, 천천히 가라고. 그때는 힘든 줄도 몰랐다. 그렇게 3년을 내리 달리다 1년을 쉬면서야 깨달았다. ‘아, 사람이 좀 쉬어 가면서 일해야 하는구나.’ 이 일은 즐기지 않으면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왜 즐기지 못하나 싶었다. 문소리, 박해일 선배님과 장률 감독님의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를 찍을 때는 소속사가 없었다. 어느 회사에 속해도 연기를 즐기지 못할 것 같아서 온전히 혼자 마냥 쉬었다.
쉬면서 어떤 결론을 얻었나? 내가 정신이 없으니까 새로운 걸 잘 못 받아들이겠더라. 한때는 내가 뭘 잘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한 달에 오디션을 19개까지 보느라 멍할 때도 있었다. 내 정신이 건강해야 하고, 스스로를 파악하는 눈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판단이라는 건 결국 가족이나 회사도 아닌, 나 자신이 해야 하는 거다.
왜 연기를 하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현장에 가면 신이 난다. 김혜수 선배님이 어느 인터뷰에서 ‘작품을 선택한다는 건 나의 가장 가까운 미래에 함께할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좋아한다. 내가 데뷔할 때는 ‘무쌍의 매력’이라는 표현도 없었고, 나는 눈 크고 코 높은 사람이 배우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다가 처음 경험한 단편 영화 현장에서 사람들이 함께 작업하는 일의 힘을 알고 재미를 느낀 게 시작이다. 내가 인복이 있는 편이다. 매번 ‘이보다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싶은데 또 만나곤 한다.
봉준호 감독이 박소담의 나이를 미처 짐작하지 못한 것처럼, 당신은 스물아홉인데도 담백한 소녀성이 있다. 그 이미지는 배우에게 어떤 의미인가? 내 평범함이 주는 친근함과 낯섦이 동시에 있는 것 같다. 상업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평범한 얼굴로 그리 평범하지 않은 캐릭터를 맡았는데, 거기서 재미가 일어난 게 아닐까 한다. 한예종을 졸업한 해부터 운 좋게도 신인 여배우를 찾는 오디션이 꽤 많았다. 이준익, 이해영, 류승완, 이원석 감독님… 그 타이밍과 맞물려서 엄청난 행운을 얻은 셈이다. 행운이 따르니 용기도 얻었고.
감독들은 당신의 마스크를 보고 뭐라고 하나? 일단 이준익 감독이 “조선의 눈을 가졌다”라고 말한 건 안다(웃음). 단편영화를 찍던 시절부터 내가 이 평범한 얼굴로 어떻게 카메라 앞에 서냐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러면 이런 말이 돌아오곤 했다. “우리는 소담 씨 같은 얼굴 좋아해요.” 나 같은 얼굴이 뭐지? 하다가도 완성된 영화를 보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고 그랬다. 이준익, 류승완 감독님은 내가 도화지 같아서 많은 걸 그려낼 수 있을 거라는 말을 해주셨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배우가 그런 말을 들으면 굉장히 힘이 난다.
배우는 부름을 받는 존재인데, 어느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비슷한 이미지와 기대감의 다른 배우와 대체 가능하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일 같다. 박소담이라는 배우의 대체 불가능한 성질은 뭘까? 성격. 낯을 가리지 않는 편이고, 새로운 상황에 놓이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그리 두렵지 않다. 이렇게 마주 앉아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즐겁다. 작품을 만드는 일이 공동체 작업이기도 해서, 사람과 어울리는 걸 즐기는 성격이 이 일을 하기에 장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생충>이 쟁쟁한 감독들의 작품과 함께 칸 영화제 경쟁부문 후보로 올랐다. 이제 곧 칸 영화제로 향한다. 주변 영화인들 통해 사전 조사 좀 했나? 너무 아는 게 없어서 뭘 물어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칸은 어떤 분위기일까? 다음에 또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는데, 내가 그 자리를 즐길 수 있을까? 일단 예쁜 드레스부터 골라야겠다.
-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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