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F/W 러시아 패션위크 바이브 Vol.1
“더블유를 초대합니다.” 러시아에서 자국의 패션위크 (FASHION WEEK RUSSIA)에 초대한다는 메일이 왔다. 베트멍과 고샤 루브친스키를 배출해낸 땅이자 유스(Youth) 컬처를 몰고 온 본거지, 러시아. 아직 4대 도시 패션위크를 경험해보지 못한 에디터에겐 첫 패션위크를 러시아에서 맞게 된 셈이니, 더욱 새로웠다. 모든 것이 생경했던 2019 F/W 러시아 패션위크 바이브!
싸우자 세상아
패션위크 주최 측의 초청을 받아 데뷔한 인도계 영국인 디자이너 ‘크리슈마 사바왈(Krishma Sabbarwal)’은 난민 문제와 브렉시트 문제를 비판하는 자극적인 문구를 직접적으로 옷에 담았다. 찢어서 붙인 듯한 패치워크 룩과 복슬복슬한 귀고리, 동화 속 공주님 잠옷 같은 귀여운 니트 드레스와는 달리, 배경음악으로 거친 힙합이 흘렀고 ‘약탈자’, ‘너희 나라에 가서 네 직업을 다 빼앗아버릴 거야’ ‘비자를 찾는 사람’, ‘EU를 뜨는 영국 : 지연? 취소?’ 등의 문구는 세상과 싸우자는 듯했다. 이제 패션도 사회 문제와 정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최대한의 기회를 드립니다
러시아 패션위크는 컬렉션을 열지 못한 디자이너들에게도 분주한 주였다. ‘팝업 숍’을 열고 자신이 디자인한 제품을 판매할 부스를 차릴 수 있었으니까. 다양한 디자이너들에게 최대한의 기회를 주는구나 싶었다. 그중 에디터의 눈길을 끈 것은 위트 넘치는 양말 브랜드, ‘상트프라이데이(St.Friday)’. 러시아어가 적힌 양말 하나하나를 들고 의미를 물어보는 에디터에게 수줍어하면서도 열의 있게 설명하는 디자이너의 얼굴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결국, 러시아어 욕이 쓰인 양말을 세 개나 샀다.
귀요미 모델
루반(Ruban)의 쇼는 해체하여 뒤집고 자르고 붙인 룩으로 가득했다. 몸에 똑 떨어지는 테일러드 슈트, 재단 선을 본뜬 패턴으로 가득한 코트와 드레스, 뒤집어 입은 듯한 코르셋 벨트까지, 독특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당장 사 입고 싶을 정도였다. 마지막에는 다들 눈에 피어난 하트를 감추지 못했는데,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걸어 나온 아기 모델 때문! 쇼를 눈으로만 감상하던 사람들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른 옷을 축소해놓은 듯한 이 키즈 슈트는 온라인에서도 구매가 가능하다.
발레의 본고장
오전 스케줄이 여유롭던 날, 볼쇼이 극장을 방문했다. 볼쇼이 극장은 공연이 있을 때나 공간 투어 시간에만 제한적으로 열어주기 때문에 내부를 보는 것이 쉽지 않다. 운이 좋게도, 투어 당일이 셰익스피어의 윈터스 테일 프리미어가 열리기 바로 전날이라 발레 리허설 공연을 살짝이나마 볼 수 있었는데, 기억에 길이 남을 만한 순간이었다. 감격 그 자체!
바디 오, 바디
‘오토싸이언(Otocyon)’은 어떻게 하면 여성을 최대한으로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한 디자이너의 흔적이 가득했다. 쇼를 시작하기 앞서, 베이지색 보디슈트를 입은 다양한 몸매의 모델 군단이 나와 몸의 원초적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 시스루 톱을 입은 노년의 모델도 등장했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다양성을 말하지만 인종은 백인뿐이었다는 것.
붉은 광장, 붉은 패션
러시아에서 ‘붉음’은 아름답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래서 모스크바의 유명 관광명소인 붉은 광장의 이름도 아름답기 때문에 붉은 광장이고, 마트료시카에도 유독 빨간 색채가 많다. 컬렉션 역시 강렬한 레드 룩이 많았는데, 온통 빨간색으로 ‘깔맞춤’을 완성한 룩이나 빨간색 스타킹으로 포인트를 준 룩이 눈길을 끌었다.
모스크바의 면면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음악이 머릿속에 맴돌던 거리 위 조명, 동화 속 궁전 같은 크렘린 성, 붉은 광장, 러시아의 전통 패턴, 인형 안에 인형이 계속 나오는 마트료시카, 세찬 눈보라와 시베리아 바람이 휘몰아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반짝이면 재킷을 벗고 벤치에 앉아 있어도 좋을 만큼 따뜻하던 봄날씨까지! 로맨틱한 도시, 모스크바.
상상력 천국
‘H.A.R.D’와 ‘Holy Mhpi’는 사실 디자인을 배우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펼치는 컬렉션이다. 미래적이고 실험적인 디자인에 젊은 에너지로 가득한 룩들이 나왔을 때, 프로 디자이너가 아니라고 심드렁해했던 스스로를 자책했다. 특히 Holy Mhpi의 피날레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두 명의 댄서 모델이 가면을 쓰고 기이한 몸짓으로 춤을 추던 장면은 기괴한 동시에 더없이 쿨했다. 일반적으로 컬렉션의 룩은 어떤 식으로든 판매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지만 돈보다 꿈을 그리며 작업한 학생들의 작품은 그야말로 상상력 천국이었다.
- 패션 에디터
- 장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