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로버트 폴리도리의 기억 아카이브
작은 방 하나에도 사람의 역사와 심리가 깃들어 있다. 한 사회와 나라의 상징적인 공간은 얼마나 많은 겹의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사진가 로버트 폴리도리는 역사의 한 순간이 될 장소를 포착해 기억의 아카이브를 쌓아 올린다.
1951년생 캐나다계 미국인인 로버트 폴리도리(Robert Polidori)는 커다란 옛날식 카메라를 들고 상징성이 있는 현장으로 간다. 재난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소리 없는 아우성과 상처를 드러내고, 빽빽하고도 치밀한 빈민가와 판자촌은 도시 속에서 은유를 품은 전경이다. 그렇게 그는 체르노빌로, 아바나로, 뭄바이와 리오데자네이루 등으로 향했다. 이 사진가는 자신이 촬영한 장소를 시간이 지나 반복적으로 카메라에 담으면서 현재는 물론, 현재의 거울과도 같은 과거의 흔적까지 재조명한다. 그중 베르사유 궁전은 그가 1980년대 초부터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복원 과정을 지켜보고 촬영한 장소다. 베르사유는 오랜 세월에 걸쳐 성실하게 복원 과정을 거듭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 곳이다. 창문에 가만히 달린 실크 커튼 하나도 시간이 지나면 소재가 상하는 법인데, 이 화려한 궁전에는 지구 곳곳의 인파가 몰려드니까. 3월 5일부터 19일까지 청담동 박여숙 화랑에 베르사유 궁전이 넘실댔다. 그곳에서 <베르사유 : 고요한 공간의 시학>전을 위해 잠시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작년 연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문명 : 지금 우리가 사는 방법> 전에 출품하긴 했지만, 국내 개인전은 7년 전 청담동 꼬르소 꼬모에서 열린 전시 이후 오랜만이다. 공사 중 텅 빈 공간의 생경함, 낡은 것이 새 것으로 변모하는 과정, 여전히 견고한 위용 등 베르사유가 새롭게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기록한 목격자.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그의 사진은 건축 공간에 깃든 삶과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의 초상’이다. 그는 긴 비행을 하느라 지쳤다고 했지만, 대화하는 데만 2시간이 훌쩍 지나갈 정도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간혹 당신을 건축 사진가라고 소개하는 기사를 접한다. 올바른 소개라고 생각하나? 대부분의 건축 사진가는 건축물을 찍는다. 나는 건축물 자체나 외관이 아닌, ‘건축물의 초상’을 찍는 사람이다. 시간이 지나며 해당 공간에 어떤 흔적이 남는지, 그 공간의 사람들은 그곳을 어떻게 느끼고 사용했는지 등에 흥미를 느낀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설명하는 촬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얼굴을 이런저런 각도로 찍는 것보다 그 사람의 방이나 집을 찍으면 대상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의 방, 집, 공간에는 사람의 심리가 녹아들 수밖에 없으니까.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Super Ego)’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쉽다. 프로이트는 이 초자아가 자아를 조정한다고 봤다.
박여숙 화랑에서 전시 중인 베르사유 궁전의 모습은 장엄하고 아름다우며,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베르사유 이야기를 바로 하기보다 당신의 작업 방식과 생각에 대해 먼저 대화하면 당신을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오랜 커리어 중 촬영 과정이 가장 까다로웠던 촬영지는 어디인가? 문제란 매번 발생하기 때문에 지금 거의 모든 것이 문제였던 곳을 떠올려보고 있다(웃음). 1992년에 두 달을 보낸 리비아. 거기서 납치를 당했다, 8시간 동안. 까다로웠다기보다는 공포스러웠다고 해야 할까? 리비아에는 로마 시대의 유물이 풍부하다. 고대유물관리부라는 기관에서 내준 촬영 허가서를 지니고 촬영 중이었는데, 10대로 보이는 납치범들이 그 허가서를 보더니 이랬다. “고대유물관리부가 대체 뭐 하는 곳이길래 우리 허락도 안 받고 이런 걸 내줘? 여기는 우리 구역이야.”
그래서, 어떻게 풀려났나? 그들이 나를 데리고서 한 지역을 수차례 빙빙 돌다가 군인을 만났다. “이 사람, 여권 있나?” 나는 그때 허가서만 가지고 있었지, 여권은 없었다. “여권 없는 포로는 가치가 없다. 이 자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놔라.” 그 긴 시간의 공포를 아주 짧게 압축하면 이 정도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타한 뉴올리언스나 체르노빌에서의 촬영 경험은 어땠나? ‘카트리나’는 내 작업 중 가장 쉬운 축에 속한다. 사람들이 모두 대피한 상태라 도시 전체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뉴욕> 매거진과 일해서 프레스 패스로 재난 구역에 접근할 수 있었다. 단 한 가지, 6개월을 머물러도 냄새만은 견디기 힘들었다. 죽음의 냄새가 지독했다. 그런가 하면 체르노빌은 ‘핵의 폼페이’ 같았다. 방사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더 두려웠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산업주의가 저지른 범죄의 일종이다. 누군가의 끔찍한 과학 실험과 무책임으로 인해 태어난 범죄 말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은 장소에서 작업을 위해 몇 달간 머무르면, 생과 사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거듭할 수밖에 없겠다. 나는 뉴올리언스에서 10대를 보냈기 때문에 1965년 허리케인 벳시가 강타하는 상황을 열세 살에 이미 겪어봤다. 비슷한 상황의 장소를 재방문하는 건 작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귀환과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카트리나가 지난간 후의 뉴올리언스에서 본 많은 모습은 사람의 시체라기보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폐기된 생명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파괴됐을 때 남는 물질이 뭔줄 아나? 금속이나 세라믹류뿐이다. 인간의 몸은 썩어 없어지고.
당신은 폐허나 어수선한 공간을 많이 찍었다. 촬영을 할 때는 물론 후반 작업을 위해 사진을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어야 할 텐데, 아름다운 풍경 대신 그런 장소를 계속 바라보는 일이 당신의 정신에 끼친 영향은 없나? 20년 전쯤,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행복했던 날이 언제냐고 물은 적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뜻 기억해내질 못했다. 그런데 가장 슬펐던 날을 묻자 모두가 바로 기억하고, 답했다. 인간의 삶은 본래 비극이다. 언젠가 죽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 그리고 에로스를 중요시 여기고, 나머지 것들은 거의 쓸모없다고 봤다. 나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예술가가 예술 활동을 하는 근본적인 목표는 많은 경우 ‘자기 표현’이다. 그런데 당신의 사진은 저널리스트가 기록을 하는 것과 비슷한 속성도 지녔다. 자기 표현을 위한 자유로움과 기록하는 자의 사명감, 그 두 가지가 충돌하지는 않나? 나는 창작자라기보다 매개자다. 사명감을 지녔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어떤 예술가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작업하지만, 예술가로서 내 역할은 나를 표현하는 일이 아니다. 나는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목적과 의미와 아젠다가 있는 이미지를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작업하는 동안에는 오롯이 그 기쁨을 즐기면서 말이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대서사의 한 순간을 기록하는 일이다.
베르사유 궁전 복원 프로젝트 작업을 통해서는 무엇을 기록하고자 했나? 베르사유 궁전은 처음엔 왕과 귀족들의 것이었다. 그러다 대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이 들어섰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프랑스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 역할을 한다. 그곳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한 역사의 층위와 복원을 거치며 디테일이 변화한 층위가 다양하게 섞인 장소다. 조르다노 부르조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를 아는가?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 기억을 용이하게 하는 ‘기억 극장’이라는 개념을 만든 인물인데, 기억술은 로마인들에게 수사학의 한 분야일 정도로 중요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기억 극장이라는 기억 시스템에 기반해 만들길 원했고, 그 말은 궁전 안의 수많은 방이 디자인된 방식이 초기 르네상스의 심리학과 큰 연관이 있다는 말이다. 아까 내가 프로이트의 초자아를 언급하면서 누군가의 방이란 그의 심리적 요소와 관련 있다고 하지 않았나? 베르사유는 집단적인 초자아, 집단적인 기억을 탐구할 수 있는 상징적인 곳이다.
궁을 찍은 사진이 회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년에 국제갤러리에서 칸디다 회퍼라는 사진가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녀도 특정 공간을, 조명과 각도를 철저하게 계산해 촬영하고, 결과적으로 상당히 회화 같은 사진을 얻는다. 베르사유 사진에서 회화 느낌이 강한 것은 의도였나, 우연인가? 대답은 ‘예스’이기도, ‘노’이기도 하다. 사진이 회화처럼 보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거다. 인공 조명은 쓰지 않는 대신 원근을 조절할 수 있는 뷰카메라로, 아주 큰 필름을 사용해 촬영한다. 가장 적절한 시간대에 느린 셔터 스피드로. 그 때문에 여느 사진과 다른 느낌이 난다. 그리고 사진을 스캔한 후 컴퓨터로 색감을 보정한다. 요소가 복잡한 궁전의 방 안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나온 각 요소의 사진 레이어를 한데 모아 합하면, 결과적으로 사진이 그림처럼 보인다. 내 사진은 칸디다 회퍼의 것에 비하면 심리와 감정을 더 담고 있다. 결정적으로, 나는 같은 장소로 회귀하면서 나를 문화의 맥락 속에 쏟아붓는다.
공간의 초상을 카메라에 담는 당신의 집은 어떤 느낌의 공간인가? 인테리어가 궁금하다. 훌륭한 매개자가 되려면 아무것도 없이 살아야 한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소유하지 않는 게 좋고. 우리 집에는 실내 장식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그저 내 작품과 살 뿐이다(웃음).
여전히 고전적인 방식의 커다란 카메라를 이용하는 사진가로서 프린트에서 디지털로 패러다임이 전환된 현상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광고가 이동하는 곳을 따라 패러다임도 바뀔 수밖에 없다. 돈은 누가 가져가냐고? 애플이나 중국의 생산자들이 가져갈 것이다. 몇 년 전 서울 대림미술관에서 출판 디렉터인 게르하르트 슈타이틀 전시가 열린 적이 있다. 슈타이틀은 내 친구로, 그는 대단히 아날로그적인 사람이다. 그 전시 카탈로그에 내가 한 말이 실렸다. “‘디지털은 잊기 위함이고, 아날로그는 간직하기 위함이다.(Digital Is Made To Forget, Analogue Is Made To Remember.)”
적지 않은 한국 블로거들이 바로 그 문구를 인상적이라고 한 전시 감상 포스팅이 여전히 잘 검색되는데, 대부분 슈타이틀이 한 말로 알고 있다. 이번 기회에 출처를 로버트 폴리도리라고 명확히 밝혀두면 되겠다(웃음). 그 말을 하게 된 배경이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 독일에 사는 친구가 크루즈에서 부유한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가르쳤다. 그 시절에는 카메라에 필름을 넣는 것부터 셔터 스피드를 조정하는 법과 밀착 인화지에서 좋은 사진을 골라 잘 현상하는 일까지 다 배워야 했다. 어느 날 컴퓨터와 프린터가 등장하고, 점점 디지털 시대로 넘어갔다. 디지털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건 돈 나가는 일이 아니니까 사람들은 끊임없이 찰칵찰칵 찍어댔다. 그리고 친구의 클래스에서 사람들이 자기 사진을 발표하는 날이 오면, 세 번째 발표자 이후 사람들은 남의 사진을 보는 일에 흥미를 잃었다. 자기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고. 영어에 ‘Been There, Done That’이라는 문장이 있다. 이미 다 가봤고, 다 안다는 거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내보이는 일이 아니라, 수많은 리스트에서 필요 없는 것을 지워나가야 하는 것. 그게 디지털의 속성이다. 나도 아날로그 방식으로 찍은 후에는 디지털 작업을 한다. 3개 국적을 가진 나라는 사람 자체가 하이브리드 속성을 지녔다(웃음).
당신을 그곳에 가게 만드는 촬영 장소들의 공통점은 뭘까? 상징성이 있어야 한다. ‘카트리나’ 작업을 예로 들면, 미국에는 사실 매해 허리케인이 여러 번 닥친다. 카트리나는 100만여 명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을 정도로 대재앙이었고, 그래서 대표성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사람들이 당신의 사진 앞에서 무엇을 느끼길 바라나? 내 사진에서 어떤 감정, 정신, 영혼을 동시에 느낀다면 좋겠다. 나는 추상예술보다 도상학 (상징과 의미를 연구하는 미술사의 한 분야)을 선호한다. 추상예술은 대개 장식적이고, 나쁘다기보다 깊은 의미가 별로 없다. 창작 문법 자체만을 다루는 장식예술에 가깝다. 그러나 도상학적인 이미지에는 여러 층의 의미가 있다. 이것이 실제 세상을 잘 보여주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재난 현장에서 인상적으로 남은 장면이 있나? 집에서 사진을 챙기는 사람들! 삶의 터전을 잃고 대피하는 와중에도 그들은 ‘기억’을 되찾고 싶어서 그렇게 사진을 챙겨 떠나는 거다. 사진이란 그런 것이다.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포토그래퍼
- 박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