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를 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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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공의 유니폼을 닮아 ‘보일러 슈트’라고 불리는 점프슈트가 대세다. 단 스패너를 들고 기름때를 묻힐 생각은 꿈도 꾸지 말 것.

검은색 벨트 장식 점프슈트는 드리스 반 노튼, 셔츠는 미우미우, 오픈토 슈즈는 프라다 제품.

분홍색 트위드 재킷, 버튼 장식 점프슈트는 샤넬 제품.

어 플랜 애플리케이션(A Plan Application)을 전개하는 독일 아티스트 안나 블레스만(세계적인 그래픽 디자이너 피터 사빌의 아내이기도 한)은 “난 아티스트 가족 안에서 자랐다. 작업이 일상인 나에게 보일러 슈트는 매일의 유니폼이었달까. 첫 번째 시즌의 파란색 보일러 슈트는 내 일부를 토대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서 “보일러 슈트는 대단히 다용도적인 의상이다. 입기 쉽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은 실용성과 안정감을 가졌다”라고 덧붙였다.

그렇다. 정비공의 것과도 같다 하여 ‘보일러 슈트(Boiler Suit)’라 불리는 점프슈트의 일종이 최근 현대 여성의 활동성을 대변하고 나선 것이다. 이 보일러 슈트를 보면 어떤 셀레브리티보다 1920년대 초기 비행 시대에 장거리 활주에 성공한 여성 비행사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까지 태평양 상공을 난 ‘하늘의 퍼스트레이디’ 아멜리아 에어하트(Amelia Earhart), 호주와 영국 횡단에 성공한 에이미 존슨(Amy Johnson) 등 위대한 업적뿐 아니라 패션 역사에도 이름을 새긴 최초의 여성들. 한 흑백 사진 속 에이미 존슨은 아주 깨끗한 흰색의 보일러 슈트를 입은 모습이다. 우아하고 절제된 매력이 느껴지는 보일러 슈트는 지금 당장 입고 패션 매거진 오피스에 출근해도 손색없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누군가 스패너를 들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비아냥거려도 상관없는 것은 아주 빠르게 입을 수 있는 올인원의 매력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에 쫓기는 현대 여성을 구원하기 위한 디자이너들의 해결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

HERMES

ALBERTA FERRETTI

STELLA McCARTNEY

JILL SANDER

GIAMBATTISTA VALLI

LOUIS VUITTON

ISABEL MARANT

CELINE

BLUMARINE

DRIES VAN NOTEN

에르메스의 토마토색 보일러 슈트부터 어깨선이 구조적인 알베르타 페레티의 보일러 슈트, 스텔라 매카트니의 멀티 집업 장식 보일러 슈트, 루스한 실루엣이 쿨한 질 샌더의 것까지, 여기 거론된 디자이너들의 이름만 보면 더 이상 보일러 슈트가 정비공의 전유물이라 할 수 없다. 드레스 명가 지암바티스타 발리마저 크림색의 단정한 점프슈트를 선보였고, 해변으로 변신한 그랑팔레의 모래 사장을 거닐던 샤넬 걸도 트위드 단추가 장식된 점프슈트를 대거 입고 나타났으니, 이번 시즌 점프슈트의 위상은 가히 보장된 셈이다. 드리스 반 노튼은 남색 보일러 슈트에 아주 화려한 비즈를 달았으며, 특히 벨트가 장식된 또 다른 점프슈트(왼쪽 메인 컷)의 FR36, 38 사이즈는 벌써 빠르게 품절되고 있어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점프슈트가 이렇게 각광받기까지는 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공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습에 대비해 입기 시작한 보일러 슈트는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과 연결되어 ‘사이렌 슈트(영화<킹스맨> 속 훈련 받는 요원들이 입는 복장을 생각하면 된다)’가 됐고, 국빈을 대접할 때도 입어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물론 영국 총리가 입는 것이니만큼 비스포크 명가 턴불 앤 아서(Turnbull & Asser)에서 제작한 것이긴 하지만. 사이렌 슈트는 20세기 산업 현장에 진입한 여성 노동자와 독립적인 여성들이 즐겨 착용하면서 여성의 강인함, 당당함의 상징이 됐다. 이는 현대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보일러 슈트를 독립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여성상에 걸맞게 연출하는 법은? 이자벨 마랑처럼 굽이 있는 슬라우치 부츠에 샹들리에처럼 화려한 귀고리를 매치하거나, 루이 비통처럼 고급스러운 벨트를 스타일링해도 좋다. 날씨가 쌀쌀하다면 터틀넥을 안에 입거나 블레이저를 걸치고, 여름이 오면 두꺼운 통(Thong) 샌들에 탱크톱을 입고, 팔 부분을 허리에 묶는 연출법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킬힐과 와이어 브라가 사라지고 있고, 실용성이 의상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축이 된 마당에 담백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갖춘 보일러 슈트는 독립적인 여성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오롯이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이 될 것이다.

패션 에디터
이예지
포토그래퍼
이준경
모델
서유진
헤어
이에녹
메이크업
이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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