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관이라는 공간의 의미와 목적이 달라지고 있다. 예술과 문화의 근거지이자 발상지로서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수시로 벌어지는 서울의 오래된 여관을 찾았다. 기록되지 못한 역사와 사라지는 풍경이 만들어낸 한 편의 패션 다큐멘터리가 그곳에서 펼쳐진다.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2–1번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이 있다. 보안여관은 1936년에 지어진 오래된 목조 건물로 2004년까지 여관으로 운영 되었다. 1930~40년대 식민지 시절 서정주, 김동리 등 문인들이 거쳐간 한국 근대 문학의 발상지였던 곳으로 2009년 갤러리로 재탄생했다. 그동안 보안여관에서는 전시, 무용, 연극, 워크숍, 동네 프로젝트 등 생활 밀착 형 예술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2017년에는 보안여관 바로 옆에 신관 ‘보안 1942’를 새롭게 지어 좁은 폭 사이로 구름다리 하나를 두고 마치 과거와 현재가 혈관으로 연결된 듯한 독특한 구조가 완성됐다. 이제 보안여관은 서점, 레지던시, 식문화 공간 등으로 확장을 거듭하며 어엿한 문화 예술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2018년 11월, 보안여관은 새로운 탄생 11주년을 기념하여 <BOAN11: AMOR FATI>라는 프로젝트를 한 달 동안 개최했다. 2007년과 2018년 사이 보안여관에서 일어난 활동을 파노라마로 펼쳤을 때 가장 빈번하게 언급된 다섯 개의 단어는 다음과 같다. 도시, 풍경, 기억, 여관, 통의동. 보안여관은 ‘기록되지 못한 역사’와 ‘사라지는 풍경’의 아카이브를 구축해온 한국 동시대 예술가들을 주목했다. 11주년 프로젝트 중 하나인 기획 전시 <내일 없는 내일>에는 권용주, 믹스라이스, 무진형제, 박찬국, 백현주, 여다함, 한성우 등 7인의 예술가가 사라진 기억과 흔적의 유산을 그들 각자의 작업으로 풀어냈다. 과거의 흔적을 토대로 동시대 담론과 화두를 땅 위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보안여관이 추구해온 가치와 상통하는 작품들이 1층부터 2층까지 설치되었다. 2009년에도 같은 장소에서 <휘경: 사라지는 풍경> 전시를 열었던 권용주 작가는 재개발 현장에서 얻어진 부산물을 재조합한 기이한 형상의 조각 작품을 선보였다. 박찬국 작가의 영상 작품 ‘망한도시 개발전문’은 작가가 폐교, 아파트에 버려진 수영장, 동대문 신발도매상가 옥상 등에서 보낸 시간과 경험을 담고 있다. 퍼포먼스 기록 영상인 백현주 작가의 ‘Right To Be Left_남겨지는 것의 권리’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떠오른다. “이 여관이야말로 돈 없고 외로웠던 예술가들의 꿈이 시작되고 때로는 치열한 토론의 장이기도 했죠, 그 당시 마구 들어오는 서구 문물들, 모던보이 시대 퇴폐적이고 무정부주의적 문물들이 들어오고, 치열하고 혼란스러웠던 삶을 이기고 어둠에서 밝은 불을 켜듯 예술은 그렇게 피어났을 겁니다.”
서울 곳곳에서 여관이 예술이 꽃피는 장소로 탈바꿈하는 장면이 포착되고 있다. 지난 10월에 열린 ‘솔로 쇼’는 임시적 성격의 공간에서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흥미로운 미술 시장을 제시하고자 기획된 행사였다. 가나아트갤러리, 갤러리 조선, 스페이스 윌링앤딩링, 조현화랑, 학고재 등 총 16개 갤러리가 연합하였고, 갤러리별로 1명 작가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곧 재건축에 들어가는 작은 규모의 3층 건물에서 5일간 짧고 굵게 열렸다. 1천5백여 명이 이곳을 찾았고, 작품 판매율 역시 70%에 이르는 성공적인 행사로 마무리되었다. 전시가 끝난 후 텅 비어 있는 건물을 장소 헌팅차 방문했다. 사람이 산 공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대낮인데도 어둡고 스산했다. 여전히 ‘해담하우스’라는 간판이 달려 있지만 전화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수십 년에 걸쳐 건물의 공사와 보수를 거친 흔적이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 있을 뿐. 1960년대 지어진 해담하우스는 처음엔 여관으로, 이후에는 1인 가구가 거주하는 고시텔 형태로 작년 6월까지 운영되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숙박업소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낡은 리셉션의 직사각형 창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떠오르는 창문, ‘19세 미만 청소년 출입 금지’ 스티커, 붉은 글씨가 써진 부적, 미수신 편지들이 어지러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건물은 곧 재건축에 들어갈 예정이다. 달팽이 껍데기처럼 8개 방으로 나뉜 공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곳에서 포즈를 취한 모델의 뒷모습이 어쩌면 이 건물의 마지막 장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를 잠시 창신동으로 돌려보자. 여기 아트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 또 다른 오래된 여관 건물이 있다. 시대여관이라 불리는 이곳은 일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한때 화제를 모은 #토마손(トマソン)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포착된다. 토마손은 ‘불필요해진 건축 장치’를 뜻하는 신조어로 건물 보수 과정에서 사람들의 무심함 때문에 만들어진 쓸모없지만 초현 실적인 사진을 의미한다. 마치 탱크가 뚫고 지나간 듯한 벽과 창에 난 커다란 구멍, 벼락을 맞은 듯 완전히 날아가버린 천장 등 시대여관은 공간 자체가 설치 작업처럼 느껴진다. 동대문 허름한 여관 골목은 1940년대 피난민이 모여 살던 곳으로 쪽방촌이 형성되어 있다. 옥상에서 전경을 내려다보면 낡은 기왓장부터 허름한 판자들이 얼기설기 뒤섞여 기이한 모자이크 형상을 만들어낸다. 시대여관 역시 창신동에서 70년 이상 자리를 지켜온 곳으로 2005년까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그 이후 10년 넘게 방치되어 있다가 지금은 젊은 작가에게 전시 공간을 제공하는 대안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다. 지금까지 9번의 전시회가 열렸는데, 작년 5월에는 육효진 작가가 자신이 고시원에서 거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쪽방촌을 주제로 한 오브제 설치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젊은 작가 ‘OmyoCho’의 개인전 <언급되지 않을 것들의 흔적>이 열렸는데 공간 자 체가 주는 영감이 있다고 작가들은 말한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도시의 이면,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공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주거 조건. 여관이라는 공간이 지닌 특수성과 역사성은 문화유산이 되어 아트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어쩌면 사회와 시대의 변화에 예민한 촉수를 가진 아티스트들이 사라지지만 보호할 가치가 있는 장소와 공간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는 것은 아닐까. 시대여관 갤러리는 앞으로도 전시 장소를 필요로 하는 아티스트들을 위해 계속 무료로 개방될 예정이다.
- 패션 에디터
- 이예진
- 피처 에디터
- 김아름
- 포토그래퍼
- 김형식
- 모델
- 김성희
- 헤어
- 강현진
- 메이크업
- 이영
- 로케이션
- 보안여관, 시대여관, 해담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