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잘 모르는 앤디 워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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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벨수프와 팝아트, 에디 세즈윅과 팩토리 외에도 앤디 워홀(Andy Warhol)에 대해 탐구해야 할 문제는 여전히 많다. 휘트니 뮤지엄에서 열리는 대규모 회고전을 계기로 소환해본 20대 시절의 앤디 워홀.

(1963). 유명한 아트 컬렉터 에델 스컬을 주제로 한 실크스크린 작품.

<36차례의 에델 스컬>(1963). 유명한 아트 컬렉터 에델 스컬을 주제로 한 실크스크린 작품. ©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앤디 워홀(Andy Warhol)만큼 자신만의 신화를 쓰는 데 성공한 예술가가 있을까? 섬뜩하게 생긴 가발, 캠벨수프 캔, 셀레브리티 초상화, 그리고 에디 세즈윅과 캔디 달링 같은 자칭 슈퍼스타들이 수시로 출몰한 팩토리의 터무니없는 익살스러움. ‘15분 간의 명성(15 Minutes of Fame)’이라는 워홀의 명민한 사회 논평에 덧붙여, 당신은 아마도 워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수십 년 동안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휘트니 뮤지엄은 미국에서 거의 30년 만에 열리는 앤디 워홀 회고전 <앤디 워홀 – A에서 B로, 그리고 다시(Andy Warhol From A to B and Back Again)>를 통해 본격적인 재평가를 제안한다. 진정한 미술가로서 워홀의 경력은 1962년 아트 딜러 어빙 블룸이 워홀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 LA에 있는 페루스 갤러리에서 32개의 캠벨수프 판화를 전시하며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이번 전시는 그보다 앞선 시기에 탄생한 페인팅, 드로잉, 광고 일러스트를 새로운 맥락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워홀이 거실에서 그린 페인팅부터 1960년대에 촬영한 그의 악명 높은 영화, 장 미셸 바스키아나 키스 해링과 함께한 후기 협업에 이르기까지, 작품 350여 점으로 꽉 찬 회고전. 201811월에 시작해 20193월 말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이후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과 시카고 미술 연구소를 순회할 예정이다.

1950년대에 그린 자화상.

1950년대에 그린 자화상. © 2018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LICENSED BY SACK, SEOUL.

이 회고전의 획기적인 면 중 하나는 워홀의 인생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시기인 1950년대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미국 피츠버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49년 스물한 살 뉴욕에 도착한 이후 10년 동안, 그는 젊은 광고 미술가이자 순수 미술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 ‘오픈리 게이’였다. 회고전에서는 그 시기 워홀의 작업, 이를테면 광고 캠페인을 위한 우아한 구두 드로잉, 여장을 한 남성을 그린 볼펜 드로잉, 친구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인쇄한 유치한 일러스트 북, 금박에 그린 남성 누드 등을 볼 수 있다. “워홀의 1950년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놓고 드러나는 동성애 관련 내용입니다. 작품 스타일이 지극히 평범해서 동성애 테마를 오히려 투명하게 전달하죠.” 2019년 가을에 출판될 워홀의 전기를 준비 중인 블레이크 고프니크가 말했다. 그는 특히 극우 매카시 시대의 맥락으로 워홀의 초기 작품 세계를 규정하던 예전의 논의가 근거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워홀은 미술계에서 추상표현주의가 한창일 때 뉴욕 미술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미술 비평가 해럴드 로젠버그가 1952년에 발표한 유명한 에세이에서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과 같은 신인 작가들의 엄격한 개인주의를 열광적으로 칭송하던 시기 말이다. 그 즈음에는 추상적인 주제를 골라 대형 캔버스에 신체를 이용해서 작품 활동(이른바 ‘액션 페인팅’)을 하는 남성적인 미술가들이 주목받았다. 그러나 워홀의 접근법은 그들과는 크게 달랐다. 휘트니 뮤지엄의 부관장이자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인 도나 드 살보(Donna De Salvo)는 워홀이 마크 로스코나 바넷 뉴먼처럼 무의식 속에 빠져들어 작품 활동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고 평한다. “1960년대 초반에 워홀은 어떻게 그림을 설계하고 대상의 정체성을 축조해야 하는지, 매우 신중하게 이해도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작품의 소재가 향수와 수프 캔 같은 상품이거나 할리우드 스타라고 해도요.”

(1954). 워홀이 유명해지기 전, 패션지  디렉터에게 새해 선물로 보낸 것.

<샘과 푸른 야옹이라는 이름의 25마리 고양이>(1954). 워홀이 유명해지기 전, 패션지 <바자> 디렉터에게 새해 선물로 보낸 것. © 2018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LICENSED BY SACK, SEOUL.

워홀은 뉴욕 맨해튼에 도착하자마자 당시 <글래머> 지의 유명한 아트 디렉터 티나 프레데릭스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워홀에게 다음 날 아침까지 구두 드로잉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그 자리에서 워홀을 고용했다. 그렇게 워홀의 첫 일러스트가 <글래머>에 실렸다. 다섯 개의 빨간 펌프스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는 모습의 일러스트였다. 광고 미술가로 유명해진 후에도 워홀은 정기적으로 <글래머>, <세븐틴>, <마드모아젤>에 일러스트를 그렸고, 컬럼비아 레코드의 앨범 커버 작업도 했다. 1955년까지는 <뉴욕 타임스> 사회면에 실린 아이 밀러 앤 손즈(I. Miller & Sons) 구두의 프레스티지 광고를 그린 유일한 삽화가였다. 앤디 워홀이 뉴욕의 패션계에 입성한 것이다. 그는 <하퍼스 바자>의 패션 디렉터에게 새해 선물로 <샘과 푸른 야옹이라는 이름의 25마리 고양이(25 Cats Named Sam and One Blue Pussy)>를 보내기도 했다. 섬세하게 색칠된 석판화 18점이 실린 작은 책이었다.

하지만 순수 미술 영역으로 진출하려는 워홀의 첫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1950년대 중반, 워홀은 본위트 텔러(Bonwit Teller) 백화점 측으로부터 5번가 쪽 쇼윈도의 디스플레이를 맡아달라는 의뢰를 받고서 패션모델처럼 포즈를 취한 여장 남자의 사진을 설치했는데, 이는 다른 게이 예술가도 겁에 질릴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그 사진 바로 옆에는 당시 ‘맷슨 존스’라는 가명으로 함께 작업한 재스퍼 존스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품이 있었다. 워홀의 기억에 의하면 그 두 작가는 여장 남자 사진을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비웃었다. 휘트니 뮤지엄의 도나 드 살보가 덧붙였다. “로버트와 재스퍼가 보기에 앤디는 너무 머리를 쓰면서도 사치스럽게 멋 부리는 사람이었죠.”

(1979). 워홀은 카포티를 자주 그렸다. 뉴욕에 처음 도착해서는 카포티에게 팬레터를 쓰고, 카포티의 어머니가 그만 좀 하라고 할 때까지 매일 집으로 전화를 했다고.

<트루먼 카포티>(1979). 워홀은 카포티를 자주 그렸다. 뉴욕에 처음 도착해서는 카포티에게 팬레터를 쓰고, 카포티의 어머니가 그만 좀 하라고 할 때까지 매일 집으로 전화를 했다고. ©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COURTESY OF WHITNEY MUSEUM.

1950년대 미국에서는 동성애가 불법이었다. 뉴욕 미술계조차 동성애를 확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워홀은 게이가 되는 일에 독보적으로 개방적이었다. 워홀의 전기를 쓰기 위해 많은 조사를 한 블레이크 고프니크는 1950년대 뉴욕 에서의 워홀을 규정하는 데 게이라는 정체성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더 좋게든 더 나쁘게든, 그가 보여지는 방식이나 그가 만든 작품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예요. 거의 부르 짖는 수준이었죠. 이 때문에 워홀 주변의 게이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예술이 높이 평가된 반면, 주류 미술계에서는 견딜 수 없어 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스트 58가에 있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물건으로 가득 찬 유사-게이 레스토랑 ‘세렌디피 티 3’로 곧잘 놀러 다닌 워홀이 당시 잘 그린 드로잉의 주제는 ‘여장 남자’였다. 그는 두 남자가 키스하는 모습을 그리길 주저 하지 않았고, 그가 만난 거의 모든 남자에게 성기를 그려도 되는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1952년, 워홀의 첫 전시인 <트루먼 카포티의 글을 바탕으로 한 15개의 드로잉(Fifteen Drawings Based on the Writings of Truman Capote)>을 보고 한 미술 평론가는 이렇게 평했다. ‘세심하게 연구된 변태스러운 분위기’.

1951년 워홀은 사진가 오토 펜과 친구가 됐고, 펜은 워홀의 삶에서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펜이 이스트 58가에 차린 큰 스튜디오는 패션, 춤, 연극계에서 활동하는 창의적 게이들을 끌어모으는 활기찬 장소였다. 그는 가발, 진주 목걸이, 망사 바지 차림에 여장을 하고 자화상을 촬영하거나 근육질의 헐벗은 손님들과 프라이빗 파티를 열곤 했다. 블레이크 고프니크는 “펜은 워홀에게 게이들 사이에서 성공과 세련됨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줬죠”라고 짚었다. 어린 워홀에게 그 스튜디오는 예술적 협업이 이루어지는 축제의 장소였을까? 워홀은 화려한 색깔의 나비와 꽃으로 펜의 촬영 배경을 만들어주고, 펜의 사진을 원안 삼아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다시, 휘트니 뮤지엄의 도나 드 살보 가 말한다. “워홀은 펜의 스튜디오에서 여러 종류의 서브 컬처와 사람들을 바라본 관찰자였죠. 저는 그 행위가 워홀에게 훌륭한 배출구였다고 확신합니다. 왜냐면 그는 낮 동안에는 잡지사가 원하는 것을 그려야 했거든요. 그러다 밤이 되면 펜의 스튜디오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죠.” 도나 드 살보는 심지어 펜 의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일과 워홀이 1960년대에 시작한 ‘팩토리’ 사이의 연관성도 살폈다. “팩토리는 그들 스스로를 드러낼 장소를 찾던 아이들로 가득했어요. 오토 펜의 살롱에서 워홀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함께 모이게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체험했죠. 1950년대에 오토 펜이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1960년대에 앤디 워홀은 선동가가 됐어요. 사람들이 모이게 놔두면서도 동시에 그걸 계획한 거죠.”

(1957). 워홀이 만나는 남성마다 신체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그려도 되는지 묻던 시기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남자 누드>(1957). 워홀이 만나는 남성마다 신체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그려도 되는지 묻던 시기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 2018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LICENSED BY SACK, SEOUL.

워홀의 ‘사적인 미술’에 공공연하게 포함된 동성애주의는 시간이 흐르며 점점 자취를 감췄다. 도나 드 살보에 따르면, 회고전은 ‘워홀과 그의 스타일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팝아트로 변해가면서 동성애 테마가 어떻게 중첩된 언어로 드러나는지 살펴보는 시작점’이다. “마릴린 먼로나 엘비스 프레슬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읽힐 수 있죠. 초기 뽀빠이, 슈퍼맨, 딕 트레이시 페인팅도 마찬가지예요. 워홀이 어느 순간 이성애자인 강한 남성의 전형에 초점을 맞추게 된 일은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여러 의미를 품죠. 워홀의 게이로서의 성적 관념은 암호화 되고 모호해졌지만, 여전히 작품에 내재했습니다. 누가 어떻게 읽어내느냐에 달렸을 뿐.” 회고전에서는 드로잉과 콜라주 외에 1950년대 워홀 작품들에서 주목할 만한 그림도 소개하는데, 그것들을 통해 워홀이 일찍부터 복사 사진기, 반사식 영사기와 같은 기술을 사용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그가 영사기를 쓰는 유일한 미술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광고 디자인 일을 하면서 영사기를 쓰는 데 익숙해졌을 터. 그 밖에 두 명의 남자가 스텐실로 된 배경 앞에서 키스하려는 모습을 담은 <두 개 의 머리(Two Heads)>(1957)나 검은 스텐실에 둘러싸인 캔버스 중앙에 몇 명의 아이들이 떠다니는 모습을 묘사한 <춤추는 아이(Dancing Children)>(1954~1957) 등을 보면, 워홀이 미술가라기보다 광고 삽화가로 알려진 시절에도 이미 예술적 개념에 깊이 몰두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휘트니 뮤지엄은 회고전을 위해 세개 층을 거의 다 사용한다. <앤디 워홀 – A에서 B로, 그리고 다시>는 2015년 다운타운에 새로 개관한 이 미술관 건물이 한 명의 미술가에게 헌사하는 가장 큰 규모의 전시다. 물론 이번 전시가 워홀의 초기 작품 세계를 연구한 첫 번째 시도는 아니다. 1969년부터 워홀과 일했고, 워홀 사후 주로 런던에서 워홀의 초기작을 중심으로 한 전시들을 기획한 ‘앤디 워홀 시각 예술 재단’의 관계자는 이렇게 회상 한다. “그는 그림을 못 그린다고 했어요. 손이 떨렸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가 엄청난 그림꾼이라는 걸 알아봤죠. 그는 자신이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대충 분류되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종 연막을 쳤어요. 워홀의 속임수였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 속임수를 믿어버리는 실수를 저질렀죠.” 휘트니 뮤지엄 부관장 도나 드 살보는 그간의 앤디 워홀 관련 전시들에 비해 더욱 심화 된 이번 회고전을 통해, 아직까지도 워홀의 미술가다운 진지함 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앤디 워홀을 가장 중요한 전후 미술가 중 한 명으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대규모 회고 전이 열리는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앤디 워홀의 시간이다. “워홀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가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흐리게 한, 형편없는 상업주의를 도입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앤디 워홀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진심을 담아 말했어요.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1960년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에 대해서 말이죠. 그는 도발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도발한 것뿐입니다.”

피처 에디터
권은경
WILLIAM MIDDKE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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