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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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작정이라도 한 듯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영화인의 미래를 응원하고 있다.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와 <서치>가 일으킨 바람을 따라, 할리우드를 변화시키고 있는 동양인 배우들의 고군분투기와 그 의미를 짚어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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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의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배우는 드디어 주체적이고 매력적인, 그리하여 영화 속 주인공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근사한 배역을 쟁취하게 됐다.

도대체 할리우드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영미권 매체가 ’아시안 어거스트’라 명명한 2018년 8월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영화인의 대대적인 재발견이 이뤄진 한 철로 기억될 듯하다. 중국계 미국인 존 추 감독이 연출을 맡고 모든 주요 배역을 아시아계 배우들이 맡은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Crazy Rich Asians)>가 8월 한 달간 북미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했고, 존 조를 비롯한 한국계 미국인의 활약이 두드러진 테크 스릴러 <서치>가 평단의 극찬을 받았으며, 10대 아시아계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넷플릭스의 하이틴 로맨스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또한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SNS상에서는 100명 이상의 기업가와 창작자, 사회 리더들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와 아시아계 영화인의 흥행을 기원하며 상영관의 표를 사들이는 #Goldopen 운동이 벌어졌고(한국계 미국인 가수 에릭 남도 이 운동에 동참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주연배우 헨리 골딩과 존 추 감독은 동료 아시아계 영화인의 작품을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서치>의 상영관 중 한 곳의 전체 티켓을 구매했다.

이건 설명이 좀 필요한 센세이션이다. 아시아계 뉴요커가 부유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가 등장하기 전, 아시아계 배우가 주연을 맡은 할리우드 영화를 말하려면 1993년 웨인 왕 감독의 <조이 럭 클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까 지난 25년 가까이 아시아계 배우는 미국 영화의 변방에 머물렀다. “할리우드에 기회는 많다. 하지만 아시아계 배우에게는 늘 적은 대사에 작은 역할만 주어진다. 상점 주인이나 네일 살롱에서 일하는 여성, IT 업계에서 일하는 남자를 연기하길 원한다면 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계 배우가 주연을 맡을 기회는 거의 없다.” 한국계 미국 배우이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 <메이즈 러너>의 주인공 이기홍의 말이 그가 경험했을 수많은 차별을 짐작하게 해준다. 인기 있는 미국 드라마 <하와이 파이브 오>의 주연배우 다니엘 대 김과 그레이스 박은 함께 주연을 맡은 두 명의 백인 배우보다 낮게 책정된 개런티에 항의하며 시리즈에서 하차하기도 했다. “평등으로 향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하와이 파이브 오>의 하차를 결정한 뒤 한국계 미국 배우 다니엘 대 김이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이다. 이처럼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 중심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은 아시아계 영화인이 응당 누려야 했을 수많은 기회의 문을 닫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지난 2016년 백인 중심의 아카데미 시상식을 비판하는 해시태그, #OscarsSoWhite 가 SNS를 강타하며 할리우드 내 다양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졌고, <공각기동대>의 스칼렛 요한슨과 <닥터 스트레인지>의 틸다 스윈턴 등 백인 배우가 동양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을 비판하는 ‘화이트 워싱’ 논란이 사회적으로 촉발되며 다양성을 지지하고 부당함에 목소리를 높이는 환경이 조성됐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티켓 파워를 가진 중국 영화 시장의 가파른 성장도 할리우드가 아시아계 관객의 취향에 좀 더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마련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와 <서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는 바로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탄생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의 흥행이 고무적인 이유는 동 세대 아시아계 인물의 삶의 풍속도를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제대로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옆집 이웃이 아니라, 닌자가 아니라, 게임에 빠진 너드 같은 주인공 친구가 아니라, 부유하고 자신만만하고(<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 유능하고 순발력이 넘치며(<서치>), 사랑스러운 인물들(<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2018년의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배우는 드디어 주체적이고 매력적인, 그리하여 영화 속 주인공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근사한 배역을 쟁취하게 됐다.

할리우드의 ‘아시안 무브먼트’를 이끄는 프런트 러너는 단연 존 조와 산드라 오다. 수많은 팬을 양산한 코미디 영화 <해롤드와 쿠마>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스타트렉: 더 비기닝>의 1등 항해사 술루 역으로 일찌감치 스포트라이트를 선점한 존 조는 아시아계 배우에게 주연을 허하라는 SNS상의 캠페인 #StarringJohnCho(존 조를 주연으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스릴러 영화 <서치>에서 백인 남자 배우의 전유물이었던 중산층 가정의 평범한 아버지를 연기함으로써 아시아계 배우의 활동 영역을 다시 한번 넓혔다. 한편 산드라 오는 올해 드라마 <킬링 이브>에서 활약하며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에미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녀는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의 크리스티나 역으로 이미 미국 내에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산드라 오가 오는 9월 중순 열리는 에미상 시상식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그녀의 존재는 미국 영화와 TV 드라마 시상식에서 유난히 수상 경력이 부족한 아시아계 배우에게 큰 자극이 될 것이다.

요즘 미국에서 가장 핫한 엔터테이너로 손꼽히는 아콰피나도 빼놓을 수 없다. <오션스 8>과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에 출연한 그녀는 코믹 연기에 능한 데다 래퍼로도 활약한다. 아콰피나가 승승장구하는 건 미국의 트렌디한 대중문화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신인 엔터테이너의 활약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밖에 <워킹 데드> 시리즈와 영화 <옥자>의 스티븐 연, <메이즈 러너> 프랜차이즈의 주연배우 이기홍,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의 히로인 콘스탄스 우와 의사 출신의 코미디언 켄 정 등이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아시아계 배우로 거론된다.

할리우드의 아시안 무브먼트는 어디로 향할까?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이 흐름이 앞으로 더 가파른 상승 곡선을 타기 위해서 필요한 건 숫자와 스펙이다. 아시아계 배우가 중심인 영화의 성공 사례와 수상 소식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기회의 문이 열릴 것이고, 그래야 그들의 몸값이 오를 것이다. 올가을부터 시작해 내년 초까지 이어지는 여러 시상식이 중요한 이유다. 미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아시아계 배우들이 뜨겁게 한 달을 점령한 2018년이야말로 욕심을 마음껏 부려볼 때니까.

피쳐 에디터
권은경
장영엽
아트워크
홍승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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