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와 가능성, 도전이 꿈틀거리는 패션의 도시 뉴욕과 런던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매력으로 넘친다. 2018 S/S 시즌 이 젊음의 도시에서 발견한, 반짝이는 신진 디자이너들을 더블유의 사심을 담아 추천한다. 생기발랄한 바이브가 꿈틀거리는 이들이 직접 들려주는 야심 찬 디자인 스토리.
신여성
2014 F/W 시즌, 소규모 컬렉션을 시작으로 파워풀한 여성상을 그려온 디자이너 마르타 야쿠보프스키(Marta Jakubowski)는 2018 S/S 시즌, 비로소 첫 런웨이 쇼를 펼쳤다. 영국패션협회의 든든한 지원과 함께 눈여겨봐야 할 신인으로 떠오른 마르타의 디자인 스토리.
폴란드 출신에 독일에서 자랐고, 런던을 베이스로 활동하는 디자이너 마르타 야쿠보프스키는 간결하면서도 반전이 있는 옷을 만든다. 영리하면서도 기품 있고, 약간의 장난끼도 느껴지는 그녀의 디자인은 왠지 뚜렷한 주관과 예술적인 심미안을 가진 여성과 어울릴 법하다. 과감한 커팅과 컬러 플레이를 즐기는 그의 옷에선 당당함마저 느껴질 정도다. “여성의 파워, 강인함, 자신감이 이번 컬렉션의 주제였어요. 제가 생각하는 여성스러움 역시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견고한 힘과 확신에서 비롯하죠. 이번이 첫 런웨이 컬렉션이었는데, 음악, 조명과 함께 옷의 움직임이 그대로 전해져서 몹시 흥분한 순간을 잊을 수가 없네요.”
2014년 로열 칼리지 오브 아트 석사 과정을 졸업한 마르타 야쿠보프스키는 후세인 샬라얀, 알렉산더 왕, 조너선 선더스에서 경력을 쌓았다. 세계 각지를 거치며 쌓아온 다문화적 경험이 그녀의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줬을지 궁금했다. “어릴 적엔 좀 특이했어요. 독일에 있을 땐 이름 때문에 제가 폴란드 사람처럼 느껴졌고, 반대로 폴란드에 있을 땐 독일 사람 같았어요. 독일에서 학교도 다녔고, 독일어가 편했기 때문이죠. 두 곳 어디에도 속하지 못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고, 런던과 뉴욕에서 살면서 차츰 긍정적인 부분을 발견했죠. 어디든지 쉽게 적응할 수 있어서 이제 더는 남과 다르다거나 슬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어린 마르타를 패션으로 이끈 장본인은 바로 그녀가 ‘가장 멋진 여인’으로 꼽은 할머니다. “폴란드에 계신 할머니 댁에 가서 여름 내 내 머물곤 했어요. 할머니는 제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놔 두셨죠. 매일 다르게 옷을 차려입기도 하고, 할머니의 힐을 신고 돌아다니거나 고모의 선글라스를 써보고, 주얼리로 치장하기도 했어요. 긴 머리를 빗지도 않고 다녔어요. 방학이 끝났을 때 만난 엄마는 절 못 알아보시기도 했죠.”
마르타의 디자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각적이고 입체적인 커팅과 구조적 디테일이 지속적으로 눈에 띈다. “패턴 커팅하는 작업을 정말 좋아해요. 패턴 작업을 통해 색다른 모양이 만들어질 때 희열을 느끼죠. 저는 디자인할 때, 드로잉하는 것보다 3D적 시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미니멀하면서도 건축적인 의상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몸의 형태와 움직임에서 영감을 받죠.” 그녀가 미술과 조각에 관심이 많고, 협업을 한다면 자동차 분야에 도전해 보고 싶은 이유도 바로 실루엣, 형태의 중요성과 맞닿아 있다.
톰보이 소녀
<포브스>는 2016년 디자이너 세이디 윌리엄스(Sadie Williams)를 예술계에서 주목해야 할 30세 이하의 30인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 이유만으로 세이디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만, 긍정적인 에너지와 유쾌한 상상력이 넘치는 컬렉션을 보고 나면 그녀를 더 좋아할 수밖에 없어진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 석사 졸업생, 셀프리지가 꼽은 ‘Bright Young Thing’의 주인공, 디자인 박물관이 선정한 ‘2014년 올해의 디자인’ 수상, 2017년 스와로브스키 컬렉티브 수상자, 2017-2018 세계 울마크 상 후보자 등 2013년 졸업 이후 매해 차곡차곡 커리어를 다지며 런던 패션계의 대표 신인으로 급부상한 세이디 윌리엄스. ‘톰보이’, ‘반짝반짝’, ‘크래프트’를 자신의 디자인 키워드로 꼽은 그녀는 그래픽 패턴과 프린트, 다양한 소재의 실험과 활용으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컬러의 변주와 패턴 디자인은 제가 어릴 적부터 좋아한 분야예요. 고등학교 이후부터 프린트 디자인도 해왔죠. 학부 시절 담당 교수님께서 패션 텍스타일을 전공하길 권유하셨고, 그 계기로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공부하게 됐죠. 비로소 ‘아, 이게 바로 내 길이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저는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소재와 컬러를 탐구하고, 다양하게 적용해보는 게 우선이에요.” 세이디는 마크 제이콥스, 조너선 앤더슨, 케이티 힐리어 등 쟁쟁한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경험을 쌓으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재원이다. “신진 디자이너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는 런던만의 커뮤니티가 있어 좋아요. 디자이너끼리 서로 의견을 주고받고, 함께 나아갈 방향성을 공유하죠. 다른 도시에서 디자이너로서 자기만의 레이블을 론칭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잖아요.” 실제로 세이디 윌리엄스는 2015 F/W 시즌 데뷔부터 영국패션협회의 신인 지원 프로젝트인 뉴젠(Newgen)을 통해 개성 넘치는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이고 있다. 세 살 생일 때 부모님이 선물해주신 푸른색 중국풍 드레스를 자신의 첫 번째 패션 모멘트로 꼽는 그녀.
2018 S/S 시즌은 현대 사회에서 벗어나 부족적인 특징, 움직임 같은 것에서 영감을 찾았다. “키보 키프트 (Kibbo Kift)족에 관한 책을 선물 받았는데 그들의 세계에 매혹됐어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0년대에 영국에서 형성된 그룹인데, 초현대적인 아이디어와 신화적인 관념이 결합된 삶을 추구하며 자신들만의 부족을 꾸려갔죠. 아웃도어 생활을 하고, 직접 수공예품을 만들었고요. 의식용 드레스와 장식품을 통해 전쟁과 현대 산업 사회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유토피아적 공동체였던 셈이죠. 그들의 심미안이 흥미롭게 느껴졌는데, 자연으로부터 얻은 가공되지 않은 모티프에 강렬한 그래픽 요소를 가미한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런 키보 키프트의 영감을 바탕으로 ‘거친 투박함’과 ‘천진난만한 소녀’를 합친 기이한 조화를 텍스타일, 크래프트맨십을 통해 표현했어요. 그래픽 프린트 작업과 여러 프린트 디자인을 직접 손으로 콜라주한 디테일은 물론 톤다운 컬러로 직접 염색한 소재도 찾아볼 수 있을 거예요.”
걸스카우트가 떠오르는 아기자기한 요소들, 컬렉션 곳곳에서 느껴지는 스포티즘, 경쾌함, 소녀 감성은 세이디의 어린 시절에 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실제로 전 톰보이 같기도 했고, 소녀 취향이 넘쳐나기도 했죠. 아버지와 함께 축구 경기장을 다니며 스포티하고 아웃도어적인 요소를 자연스럽게 흡수한 것 같아요. 휴가 때 저희 가족은 폭스바겐 캐러밴을 타고 영국과 프랑스 해안을 오가며 여행을 하거나 뮤직 페스티벌에 가기도 했어요. 콘월(Cornwall)에 있는 천막(Teepee)에서 캠핑도 자주 했죠. 반면에 친구들과 있을 땐 여느 여학생들처럼 예쁘게 꾸미고, 헤어 액세서리를 사 모으고, 매니큐어를 바르며 놀았어요. 스파이스걸 노래를 틀어놓고 춤도 췄지요. 전 물론 스포티 스파이스 역할이었고요!”
사람의 이야기
이번 시즌 가장 강렬했던 런던 패션위크 장면 중 하나는, 신체적 핸디캡을 가진 모델과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등장한 티텀 존스(Teatum Jones) 쇼다.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휴머니스트 디자이너 듀오, 캐서린 티텀(Catherine Teatum)과 롭 존스(Rob Jones).
2018년 새해는 보이지 않는 것들보다, 현실적인 일에 집중하고 싶다는 티텀과 존스는 2016년 울마크 프라이즈 수상자이자 리버티 백화점, 하비 니콜스, 네타포르테 등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디자이너 듀오다. ‘모던, 볼드, 텍스타일.’ 세 가지 특징은 심플한 듯하지만 예측하지 못한 디테일에 놀라움을 선사하는 티텀 존스만의 디자인을 대표한다. 기발한 소재와 형태의 시도 속에 전해지는 여성스러움 역시 이들 디자인의 핵심이다. “정직하고 뚜렷하며, 연약하기도 하지만 용기와 강인함을 품은 것이 티텀 존스만의 여성스러움이라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패션을 만들죠. 대담하고 리듬감 넘치는 텍스타일 사이 사이에 그 이야기를 짜 넣고, 모던하고 정교한 실루엣을 통해 들려주는 거예요.”
신체적 장애부터 다양한 인종, 체형을 가진 모델을 앞세워 파격적인 컬렉션을 선보인 2018 S/S 시즌은 그들이 얼마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패션으로 풀어내려 애쓰는지 보여준다. “이번 테마는 ‘The Body Part 2’였어요. 지난 2017 F/W가 첫 번째 파트였는데, 인간과 신체 사이의 관계를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관찰하고 느낀 점을 전달하고자 했죠. ‘호스 위스퍼러’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나타샤 베이커(Natasha Baker)를 오마주한 컬렉션이기도 해요. 나타샤는 장애를 가진 영국 마장마술 선수로 금메달을 11개나 땄어요. 그녀는 어릴 적 횡단척수염 진단을 받아 가슴 아래로는 다리까지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상태지만, 수천만 관중 앞에서 말과 교감하면서 그 누구보다 우아한 마장 마술을 펼쳐 감동을 줬어요. ‘다양성’은 티텀 존스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죠. 몸을 주제로 한 컬렉션이었기 때문에 캐스팅에 있어서도 새롭고 다양한 가능성을 시도했 어요.” 부드럽게 흐르는 실루엣 위에 입힌 파스텔 컬러도 인상적이었다는 말에 디자이너 듀오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타샤의 여성스러운 면모와 오픈 마인드, 주변을 긍정의 기운으로 물들이는 성격이 행복함을 주는 파스텔 컬러와 닮았다고 생각했죠. 유동적인 우아함과 드레이프 실루엣을 극대화하기도 했고요.”
런던의 젊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텍스타일 선구자’, ‘혁신적인 디자이너’로 평가 받는 티텀 존스는 2013 F/W 시즌 첫 프레젠테이션을 열었고, 2016 F/W 시즌 런웨이에 데뷔하며 비범한 신예로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각각 레이븐스본과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여성복을 공부한 티텀과 존스는 함께 웃고 우는 삶, 그리고 함께 디자인 할 수 있는 삶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진중하면서도 괴짜 같은 구석이 있는 듀오는 휴머니스트답게 UN과의 협업도 꿈꾼다. 다양한 인간사에 관심이 있는 그들이 패션 디자인 외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미국 서부에서 말들이 뛰노는 목장을 운영하는 상상을 해봐요. 영화음악을 작곡해보고도 싶어요.” 자유분방하고 두려움이나 한계가 없는 패기로 가득 찬 그들에게 티텀 존스의 디자인을 비유할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 있다면 무엇인지 물었다. “기하학적 무늬의 그릇에 담긴 모로코의 컬러풀한 베지테리언 타진(Tajine, 모로코식 스튜)요. 여기에 한국 스타일의 김치를 사이드로 곁들이고, 마지막으로 영국의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는 코스랄까요?”
기묘한 이야기
세상의 잣대와 미에 대한 기준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컬렉션을 선보이는 바퀘라(Vaquera)의 디자이너 브린 토벤시(Bryn Taubensee), 패트릭 디캐프리오(Patric Dicaprio), 클레어 설리(Claire Sully), 데이비드 모지스(David Moses). 순수한 열정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이들의 기묘한 원더랜드.
지난 2017 F/W 시즌 처음으로 뉴욕 패션위크 스케줄에 이름을 올리며 데뷔 쇼를 치른 바퀘라. 2013년에 론칭했지만, 룩북이나 프레젠테이션이 아닌 정식으로 선보이는 컬렉션은 지난 겨울이 처음이다. “판매와 상업적인 목적이 아닌, 비전과 열정을 담은 옷을 만들고 싶었어요.” 처음엔 패트릭 디캐프리오 혼자 시작했다가 지금은 브린 토벤시, 데이비드 모지스, 클레어 설리가 합류하며 디자이너 네 명의 공동 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그들의 합류는 바퀘라를 좀 더 대중 속으로 들어가 상업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의미와 메시지가 있는 옷을 만들겠다는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후드 바이 에어의 후계자일까, 뉴욕의 베트멍일까. 이들과의 공통점이라면 고정 관념에 대한 저항일 것이다. 기존의 필드에서 벗어난 ‘Anti Fashion’을 외치는 이들의 첫 쇼에 뉴욕 패션위크의 관심이 쏠렸다. 특히 이때 선보인 티파니 주얼리의 푸른색 파우치를 그대로 드레스로 만든 옷은 순식간에 SNS를 타고 번졌고, 컬렉션 기간 중 업로드된 최고의 피드 중 하나로 꼽혔다. “세상의 모든 게 패션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어요.” 티파니 파우치를 드레스로 만든 연유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바퀘라는 스토리를 기반으로 컬렉션을 만드는 유니섹스 브랜드다. 코르셋과 드레스를 입은 남자, 여자인지 남자인지 선뜻 구분이 안 되는 모델처럼 성의 경계가 무너진 듯한 관점은 컬렉션 전반에 두드러진다. “사람의 성별로 그 사람이 입는 옷을 정의하거나, 반대로 그 사람이 입은 옷이 성별을 정의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성별에 대해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이 달라요.” 그들의 세계에서는 남자가 입는 옷, 여자가 입는 옷의 경계란 없다. 물론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하는 미에 대한 기준도 없다고 말한다. 영감의 원천 역시 패션의 역사, 스트리트 스타일, 유니폼, 서브 컬처 등 예상치 못한 다양한 소재에서 가져온다. 이를테면 지난해 선보인 캡슐 컬렉션, ‘Handmaid’s Tale’ 역시 같은 맥락이다.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 ‘Hulu’에서 <하녀 이야기> 책을 원작으로 한 TV 시리즈에서 비롯한 것이다. 복잡하고 난해한 주제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방식, 유머가 깃든 디자인을 추구하는 그들은 모든 것을 어렵거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에 거부감을 일으킨다. “바퀘라의 고객은 클럽에 갈 때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장 보러 갈 때는 이브닝드레스를 입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예상치 못한 시도나 행위를 즐기는 사람들이죠.” 상황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만큼이나 이들의 여가 시간은 어떨지 궁금했다. “조개껍데기를 모아요!” 발랄하고 엉뚱한 답변은 이들의 순수한 디자인 세계에 대해서 수긍하게 한다.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 중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미국 문화와 근원에 해박하고 사회적 관심이 높다는 점이다. 외모와 성별, 인종의 경계를 넘어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고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이들의 열정은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룩들로 표현된다. “패션이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어요.”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일만 남았다.
여자이니까
버킷백으로 히트작을 남긴 브랜드 만수르 가브리엘이 지난 시즌 처음 레디투웨어 컬렉션을 선보이며 영역을 확장했다. 디자이너 레이첼 만수르(Rachel Mansur)와 피오리아나 가브리엘(Floriana Gavriel)의 여심 공략법은 이번에도 통할까.
“만수르 백?” 중동의 부호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만수르 가브리엘. 2년 전 버킷백이 뜨겁게 유행한 중심에 이들이 있었다. 브랜드는 모를지언정 형태만으로 국내에서 카피 제품이 쏟아져 나왔을 정도다. 눈에 띄는 세부 장식 하나 없이 가방의 입구 부분을 가죽끈으로 조이는 형태에 네이밍만 적힌 디자인은, 과시적이지 않고, 담백하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뜨겁게 어필했다.
뉴욕을 베이스로 활동하지만 고급 가죽과 패브릭, 수준 높은 가공법을 위해 모든 소재와 제작은 이탈리아에서 진행한다. “클래식한 디자인, 정제된 실루엣이 시작이에요. 무엇보다 색감과 재질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죠.” 부드러운 파스텔과 깊고 어두운 무채색까지, 풍부하지만 미묘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된 다채로운 컬러 팔레트는 만수르 가브리엘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언어다.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RISD)에서 텍스타일을 전공한 레이첼 만수르와 독일 브레멘 예술대학교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피오리아나 가브리엘은 2010년 LA에서 만나 사업 파트너가 되었고, 2012년에 뉴욕으로 건너와 브랜드를 론칭했다. “네타포르테를 비롯한 하이엔드 리테일 숍을 통해 가방 컬렉션을 처음 선보일 수 있게 되었어요.” 지금은 바니스 뉴욕을 비롯해 버그도프 굿맨, 봉마르셰, 도버 스트리트 마켓 등 1백여 개의 굵직한 리테일 숍에 안착했다. 이들은 3년이 지난 2016년 슈즈 컬렉션을 론칭했고, 지난 시즌엔 ‘See Now Buy Now’ 형식의 첫 레디투웨어 컬렉션까지 확장하기 이른다. “가방으로 시작했지만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선보이고 싶었죠. 우리에겐 투자자가 따로 없어서 천천히 진행했고 꾸준히 성장해왔어요.”
레디투웨어를 선보인 것은 처음 브랜드를 만들 때부터 계획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말한다. 가방과 신발처럼 소품 디자인에 도가 튼 이들이 레디투웨어 컬렉션을 접근하는 방식은 어떨까. “모든 제품의 출발은 같아요. 아름다운 형태, 풍부한 색감, 고품질, 이탈리아의 수준 높은 장인 정신. 여기에 우아하고 기본에 충실하면서 재미있는 요소가 있어야 해요.” 어떤 제품에서도 본인들의 색이 드러나는, 강한 브랜드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데 주력할 뿐이다.
만수르 가브리엘의 가치는 제품에서 비롯하지만, 우크라이나 작가 탄야와 젠야가 만드는 쿨하고 세련된 비주얼도 큰 몫을 차지한다. 인스타그램의 피드만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세심하고 예민하게, 이미지 작업에 주력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릇, 물 병, 꽃 등을 활용한 스틸라이프 사진은 제품이 등장하지 않지만 사진이 표현한 색감으로 제품을 연상시킨다. 최근 연속적으로 피드를 장식한 꽃과 나뭇잎 사진으로 이루어진 프로젝트 북, 〈La Flower Market〉은 이들이 만든 첫 프린트 프로젝트다. “그래픽 디자인과 사진을 좋아하기 때문에 다양한 아이디어와 제품을 디자인 형식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죠. LA 플라워 마켓은 저희 둘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의미 있는 장소기도 하죠. 이 특별한 장소를 모두와 공유하고 싶었어요.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발상으로 이루어진 프린트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이어질 거 예요.” 2년 전 소호에 첫 매장을 연 이후 지난해 두 번째 매장을 매디슨 애비뉴에, 올해 초 LA 멜로즈에 세 번째 매장을 열면서 일 년에 하나씩 매장을 오픈했다. 한 해 한 해, 자신들의 페이스대로 브랜드를 꾸려가는 이들에게 조급증이라는 건 없다. 그저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 이미지 작업을 하며, 프로젝트를 통해 원하는 일을 하고 많은 이들과 소통하고 싶을 뿐.
너이길 원했던 이유
크로맷의 베카 매카렌 트랜(Becca McCharen-Tran)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체형과 사이즈, 인종, 그리고 성별은 구분 없이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지녔고, 이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강력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그런 옷을 만든다.
크로맷(Chromat)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를 따지자면 2016 S/S 뉴욕 컬렉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디지털과 테크놀로지에 심취해 있던 당시 인텔과 손잡고 선보인 3D 프린터 옷은 패션지는 물론 국내 인터넷 매체와 일간지에서도 웨어러블 패션의 발전된 예로 다뤄졌다.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드레스의 형태가 확장되어 웅장한 실루엣이 만들어지는 아드레날린 드레스와 땀이 나오면 통풍구가 열리는 에어로스 브라 모두 몸에 반응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든 획기적인 아이템. “저는 건축가가 건물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옷에 대해 생각해요. 건축가에게 건물은 기능적인 체계죠. 날씨, 환경, 사용자에 반응할 수 있도록 만들잖아요. 옷도 몸을 위한 도구로 똑같이 생각할 수 있어요. 사람의 관절, 온도, 생체 정보에 반응하도록 말이죠.” 인텔과의 협업에 대해 묻자 베카 매카렌 트랜은 이렇게 설명한다.
2015 S/S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컬렉션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공통점이 쉽게 발견된다. 몸을 분절한 듯한 라인, 건축적 형태에서 비롯한 구조적인 골격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건축을 전공했고, 건축적인 디자인에서 영감을 가장 많이 얻는다. 스포츠와 수영, 란제리로 구성된 홈페이지의 세 카테고리가 크로맷을 정의할 수 있을까? “그럼요, 저희는 미래 지향적인 보디 웨어를 만드는 브랜드예요.” 인물로 설명하자면 비욘세, 마돈나, FKA 트위그스, 젠다야, 테일러 스위프트, 티아라 뱅크스, 니키 미나즈와 같은 이들이 대변할 수 있겠다. 강한 개성과 자아를 지닌 이들 말이다. “우리 브랜드의 유일한 미션은 자신감을 심어주는 영향력 있는 옷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런웨이에 등장하는 모델은 슈퍼모델과는 다른 지점이 엿보인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체형, 다양한 연령, 다양한 외모, 2XL 모델도 크로맷 쇼에는 등장한다. 이들은 베카의 친구들이자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비롯해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이 멋진 친구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하이패션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여지는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요. 하지만 대부분 패션 월드에서 자신과 주변 사람을 발견하긴 힘들죠. ‘내가 이상하게 생긴 건가?’라는 의문을 가진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죠.” 3월부터는 전 세계 노드스트롬에서 크로맷의 3XL 제품도 만날 수 있다. 한편, 인종과 사이즈의 관념에 저항하는 방식은 쇼뿐만이 아니라 캠페인과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작년 홀리데이 시즌 선보인 크로맷 베이브(#chromatbabes)는 다양한 체형, 치수, 인종, 나이, 성별을 존중하고 한정된 미의 기준을 없애고자 한 캠페인. 소셜미디어의 콘셉트와 방향을 정할 때 같이 작업하는 모델, 여러 시즌 동안 런웨이에 서준 모델, 패션 디자이너 친구(당시 임신한 채로 촬영했다) 셋이 서로를 껴안고 소통하는 사진은 창의적인 커뮤니티가 서로를 어떻게 존중하고 지지하는지를 보여준다. 다가올 2월 뉴욕 패션위크에서 선보일 2018 F/W 컬렉션에 대해 문득 궁금해졌다. “주제는 ‘하이 서머’예요. 여름의 카약 여행, 야외 스포츠, 수상 스키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허드슨강의 보트 위에서 매운맛 치토스를 먹으며 이번 컬렉션을 입어줬으면 해요.”
- 패션 에디터
- 백지연, 이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