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라는 어린 왕자의 메시지는 쿠튀르에도 통용된다. 꿈과 환상을 패션에 대입하며 그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몽상가들이 선사하는 환희의 순간은 아틀리에에서 펼쳐지는 진중한 마스터들의 인고의 시간에서 탄생하는 법이니까. 더구나 장인들의 손길이 닿은 오쿠 쿠튀르의 특별한 면면을 살필 수 있는 특권은 이제 더 이상 VIP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누구나 오트 쿠튀르의 우아한 환상을 엿볼 수 있는 시대. 꿈의 영원한 가치를 믿고 하이패션의 특별함을 동경해온 이들이 선뜻 나서 자신의 미학을 나누고자 하는 시대의 한가운데 우린 살고 있다.
GiambattistaValli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오트 쿠튀르 쇼가 설파하는 특유의 로맨틱한 서정성은 현존하는 남성 디자이너 중 가장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디자이너라는 명성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한다. 최근 쿠튀르 쇼 투어에 푹 빠진 셀린 디옹의 이름을 수많은 VIP 셀레브리티 리스트에 주요하게 올린 채, 여전히 여자의 마음을 홀리는 최고의 디자이너로 추앙받는 그. 일관된 로맨티시즘으로 그의 고객 들을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지만, 새로운 볼거리에 치중한 대중으로서는 다소 볼멘소리를 터뜨릴 만했다.
그렇지만 고전적인 쿠튀르를 향한 여자의 궁극적인 환상을 일깨우는 롱 테일의 극적인 시폰 드레스가 등장하는 순간, 그 아름다움에 누구라도 동공이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 지암바티스타 발리만의 힘이 아닐까. 더구나 그의 열세번 째 쿠튀르 쇼에 기립 박수를 보내는 셀린 디옹을 비롯한 든든한 후원자들이 있는 한, 그는 여전히 ‘행복한 여성의 꿈’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갈 것이 분명해 보였다.
ArmaniPrivé
때론 영감의 원천에 닿기 위해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시의적절한 변화일지도 모른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2017 F/W 아르마니 프리베 컬렉션은 ‘미스터리’라는 주제를 통해 몸에 피트되는 재킷과 남성적인 오버사이즈 팬츠, 가볍고 섬세한 직물에 허리를 잘록하게 강조한 스커트의 조합을 추구했다. 거장이 사랑하는 컬러군의 조합, 이를테면 위스티리어(보랏빛)와 스카이 블루, 그리고 매그놀리아(연한 미색) 등은 여전했지만 예전보다 한층 적절한 조화가 느껴지는 컬렉션으로 변모한 듯 보였다. 과감하지만 은은하고, 익숙하지만 조금 더 새로운 느낌은 결국 미스터리한 여성의 캐릭터로 귀결되었다.
또 크리스털로 완전히 감싼 채 꽃무늬의 윤곽을 강조한 보 장식, 투명한 베일, 그리고 오트 쿠튀르만을 위한 기술로 완성한 특별한 자수 등 모든 룩에는 긴 시간을 견뎌낸 장인의 손길이 담겨 있었다.한편 아르마니의 밀라노 아틀리에, 그 고향 격인 오르시니 궁전의 장식을 재현하기 위해 특별하게 디자인된 방이라는 쇼장 역시 쿠튀르 장식주의의 한 축을 이뤘다. 프런트로에는 소피아 로렌을 비롯해 케이트 윈슬렛, 나오미 와츠, 이자벨 위페르 등 할리우드와 유럽의 여배우 군단뿐만 아니라 탕웨이가 참석해 나날이 커가는 중국 쿠튀르 마켓의 파워를 대변하기도 했다.
Proenza Schouler
지난 7월, 파리 오트 쿠튀르의 변화의 바람 속에 가장 획기적인 이슈가 된 건 로다테와 더불어 뉴욕을 대표하는 프로엔자 스쿨러의 쿠튀르 도전장이었다. 프로엔자 스쿨러라는 뉴욕의 모더니티를 대변하는 브랜드가 유서 깊은 파리 오트 쿠튀르 컬렉션의 스케줄표에 이름을 올렸을 때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상상을 했을까. 우선 그 과정은 이렇다. 지난여름 큰 반향을 일으킨 베트멍의 쿠튀르 출전에 긍정적 평가를 내린 파리의상조합이 이번엔 프로엔자 스쿨러를 게스트 멤버로 초대했고, 잭 매컬로와 라자로 헤르난데스는 뉴욕이 아닌 파리 오트 쿠튀르 기간에 자신들의 리조트와 프리폴 컬렉션을 포함한 2018 S/S 컬렉션을 선보이는 특별한 영예를 안은 것이다. 지난해 베트멍의 뎀나 바잘리아가 그러했듯 쿠튀르 기간에 선보이는 쇼에는 쿠튀르적 접근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으리라. 명민한 듀오는 이번 컬렉션에 아름다움, 낙관주의, 그리고 프랑스 공예에 대한 헌사를 담아냈다.
파리의 여러 아틀리에 장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해체된 러플 장식을 비롯해 꽃, 깃털, 레이스, 자수 등 우아한 여성미를 보여주는 특유의 장식적인 요소가 보다 정교한 수공예를 통해 쇼에 등장했다. 또한 센슈얼한 실루엣을 연출하는 테일러링 기법을 비롯해 란제리의 요소를 단에 적용하고, 유리와 깃털 장식 주얼리로 이전보다 한발 더 나아가 소재와 기법의 특별함을 더하기도. 그동안 단단하게 잠겼던 빗장을 활짝 연 채, ‘누구나를 위한 오트 쿠튀르’로 진화하는 현대 하이패션의 움직임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다양성의 가치를 되새겨준 순간이었다.
Maison Margiela
이번 2017 F/W 시즌, 메종 마르지엘라의 ‘아티즈널 (Artisanal)’ 컬렉션이 더욱 각광받은 이유는 파리의 생모르 163가에 위치한 메종 마르지엘라 본사를 최초로 프레스에게 공개했기 때문이다. 1700년대에 지어진 건축물은 산업 디자인 학교로 개조되기 전 100년 가까이 수녀원으로 사용되던 곳. 건물에는 디자인 학교 시절 사용하던 칠판이 곳곳에 걸려 있고, 마르지엘라를 상징하는 흰색의 갈라진 벽에서는 하우스의 정체성과 세월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쇼장 곳곳에 배치한 무드보드와 실제 의상 제작에 쓰인 패턴, 마네킹에 걸쳐둔 마감 처리가 되지 않은 의상 등 쇼 준비 과정을 보여주는 오브제들은 지난한 창작 과정의 시간을 웅변했다.
이 고풍스러우면서 치열한 창조의 장소에서 존 갈리아노가 아티스틱한 아방가르드 터치를 더해 화려하고 미려한 감각으로 해체하고 재조합한 트렌치코트를 비롯한 일련의 룩이 등장했다. 쿠튀르의 전과 후, 영감과 결과물, 진화와 소통을 역설하면서.
Schiaparelli
베르트랑 기용이 진두지휘한 스키아파렐리 오트 쿠튀르 쇼의 주제는 ‘쇼킹 소사이어티’. 특유의 아티스틱한 실험과 감성을 더한 컬렉션은 예술적 영감을 기반으로 했다. 추상 구성주의에서 힌트를 얻은 해체적인 실루엣이나 피카소의 회화에 등장한 어깨 라인을 재킷에 적용하고, 마크 로스코의 색채를 본뜬 컬러 블록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한편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대범함을 드러내는 시그너처와도 같은 랍스터 모티프의 점프슈트를 비롯해 트롱 프뢰유 벨트와 칼라 등은 숨은 그림 찾기 같은 유희적인 악센트를 더하며 모던한 기운을 주입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건 스와로브스키와 협업해 선보인 ‘TheCrystal² Dress’였다. 1930년대 중반,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을 오트 쿠튀르에 사용한 첫 번째 디자이너였다. 이러한 기념비적 역사를 되짚으며 3D 크리스털 엠브로이더리 기법의 크리스털 파인 메시 드레스를 선보인 것. 핸드메이드 패치워크를 메시 기법으로 직조한 뒤 멀티컬러 크리스털을 파베 장식한 작업은 섬세하고 신비한 빛을 자아냈다. 하우스의 헤리티지를 담은 과감한 도전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오트 쿠튀르 정신의 근간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키며.
- 에디터
- 박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