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와 일드도 좋지만, 우리에겐 엄연히 ‘한드’가 존재한다. 그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신진 드라마 작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설계된 진실, 모두가 동기를 가진 용의자다.’ tvN <비밀의 숲>은 방영 전 예고편에서 조승우의 이 내레이션으로 이야기의 골자를 알렸다. 살인 사건, 사건에 얽혀 있는 거대한 배후와 비리, 정의를 구현하려는 검사와 경찰.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골백번은 다뤘을 소재의 드라마가 카드로 내미는 건 조승우와 배두나인가 싶었다. 그러나 종영 후에도 메아리처럼 지속되는 시청자의 반응이 향하는 곳은 이수연 작가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작가가 회사를 관두고 몇 편 습작을 한 후 세상에 처음 내놓은 작품이 가시적인 팬덤을 얻었으니, 인상적인 데뷔다. <비밀의 숲>엔 ‘나쁜 놈’과 ‘착한 놈’으로 이분되는 단편적인 설정 대신 이면을 가진 입체적 인물들이 등장했다. 현실의 인간이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중층의 인간성을 지닌 것처럼. 정의를 내세우는 여느 드라마들에서 더운 피의 소유자인 주인공이 정서를 자극하는 것과 달리, 감정이 상당히 제거된 검사(조승우)를 보는 것부터 특이한 경험이었다. 이수연 작가의 다음 스텝엔 이미 스포트라이트가 향해 있다. 그녀는 <비밀의숲>을 제작한 회사와 전속 계약을 맺더니 금세 JTBC와 의학드라마를 논의중이라는 소식까지 알렸다.
신진 드라마 작가들의 작품이 잇따라 눈에 들어오는 요즘이다. 한 방송사의 드라마센터장은 “신진 작가들은 글 쓰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성공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글 쓰는 게 좋아서 쓰는 작가들”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작가들’이라는 주어와 ‘글’이라는 목적어만 빼면, 이 말은 분야를 막론하고 새로이 부상하는 세대에 대한 정의처럼 보인다. 지난 수년간 드라마 작가에 대해 말할 때 중요한 건 작가의 스타성 여부였다. 한국 드라마의 세가 커지고 드라마 외주 제작사들이 연예인을 모셔가듯 작가와 계약을 맺는 일이 일반화하면서, ‘작가 선생님’ 역시 배우 못지않은 간판이 된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 제작 편수가 늘어난 환경에서 스타 작가를 모시려는 움직임이 한 축이 됐다면, 반대급부로 신인 작가를 알아보고 발굴하려는 움직임 역시 또 다른 축이 되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7월 종영한 KBS <쌈, 마이웨이>는 임상춘 작가의 첫 미니시리즈다. 단막극인 MBC <드라마 페스티벌-내 인생의 혹>으로 데뷔해 웹드라마 <도도하라>를 쓴 임상춘 작가는 작년 KBS 4부작 드라마 <백희가 돌아왔다>로 워밍 업을 했다. <동네 변호사 조들호>의 후속작인 <뷰티풀 마인드>의 제작 일정이 늦춰지는 바람에 긴급 투입된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당시 SBS <대박>, MBC <몬스터>와 견줘도 꿀릴 것 없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긴급 처방의 효과를 본 KBS에서 자리를 내준 <쌈, 마이웨이>는 박서준, 김지원, 안재홍, 송하윤이 ‘메이저’가 되기에는 부족한 스펙으로 자신들의 갈길을 가는 청춘 로맨스물. 작가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좋아하며, 사람은 누구나 착한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각자의 길에서 나름 분투를 하는 <쌈, 마이웨이>의 네 청춘은 비록 ‘마이너리그’에 속했다고는 하지만 뽀얀 필터 효과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세상을 향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착한 사람들의 소소한 갈등’을 풀어내는 장기를 선보인 이 작가가 혹시나 청춘물에서 바로 주말 가족 드라마로 건너뛴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다. 다만 ‘임상춘’이라는 이름은 성별과 나이에 대한 편견을 지우고 싶어서 지은 필명이라는데, 작가와 두 작품을 함께한 배우 김성오가 이미 ‘동안에 예쁜 외모’를 지닌 작가라고 발설해버렸다.
각종 신인 작가 공모전에는 여전히 장르물이 몰리는 추세라고 한다. 장르물은 스타 작가와 톱 배우를 쓰는 일이 관행인 로맨스물에 비해 참신한 대본이 더 중요한 분야다. 5월 종영한 OCN <터널>은 1980년대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던 강력반 형사가 현재로 타임 슬립해 사건을 풀어가는 드라마였다. <시그널>의 아류작일 것 같았지만, 드라마는 빠른 전개와 추리의 실마리를 던지는 여성(이유영)의 역할 등을 매력 삼아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단막극 한 편을 방송한 경력이 있는 이은미 작가의 첫 미니시리즈다.
KBS 극본 공모 당선작인 이성민 작가의 <추리의 여왕>은 무려 이영애의 복귀작인 SBS <사임당, 빛의 일기>를 시청률로 눌렀다. 수사하는 게 취미인 주부(최강희)와 강력반 형사(권상우)가 합을 이뤄 사건을 해결해 간 이 드라마는 종영한 지 석 달도 안 된 시점에 시즌 2 편성이 확정됐다. 방송사가 작가를 발굴하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작품이 시즌제로까지 발전하는 건 업계의 한 ‘축’이 공고해지는 고무적인 사례일 것이다. 마침 CJ E&M도 최근 드라마와 영화계의 신인 작가를 양성하는 오펜 센터를 개관했다. CJ E&M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대기업이 이야기의 저작권을 갖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재능있는 작가를 발굴하는 게 취지라고.
방송사와 제작사에 큰 재원을 마련해주던 중국 시장의 문이 닫힌 지 1년이 넘었다. 몸집이 큰 드라마를 제작하는 일이 부담스러워진 회사가 신진 작가에 눈 돌리기 시작했다고 유추하면 오비이락일 수 있겠다. 그러나 작년 SBS가 믿고 맡긴 김수현 작가의 <그래, 그런 거야>처럼 스타 작가의 드라마가 적자를 내며 조기 종영하고, <비밀의 숲> 이수연 작가처럼 신인이 돌풍을 일으키는 현상이 반복된다면? 거장과 노장 선생님은 극소수인데 반해 새 얼굴은 계속 치고 올라온다.
영화 <신세계> <범죄와의 전쟁>의 각색가였던 박혜진 작가는 첫 드라마로 사극인 MBC <군주>를 쓰고 원작 소설까지 냈다. 김희선을 다시 보게 만든 JTBC <품위있는 그녀>의 백미경 작가는 <사랑하는 은동아> <힘쎈여자 도봉순>으로 차근차근 스텝을 밟아 본격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2000년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된 이력이 있지만, 집필을 관두고 고향 대구에서 10년 동안 영어학원을 운영하며 살았다는 작가다. 새로운 선생님들의 등장은, 언제나 환영이다.
- 에디터
- 권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