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싹이 트는 계기는 언제 어디서나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문학 책을 읽다가 문득 떠나고 싶게 홀리는, 바로 그곳으로 초대하는 문장을 마주쳤다.
1. 타히티
태평양은 어느 바다보다 황량하다. 공간이 훨씬 더 광막해 보이며 평범한 항해조차 여기에서는 모험의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에서 숨 쉬는 공기는 신비한 영약처럼 예기치 못한 사건을 차분하게 맞이하도록 해준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타히티에 가까이 갈 때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정말 공상 속의 황금 왕국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중략) 여기라고 슬픔과 두려움이 없을까. 하지만 그 느낌은 금방 사라져버리고 오히려 현재의 즐거움만이 더 뚜렷이 느껴질 뿐이다. – <달과 6펜스>(서머싯 몸, 송무 옮김, 민음사)
폴 고갱의 삶을 모티프로 한 소설에서 화자는 ‘그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가족을 버리고 타히티로 떠난 남자 주인공의 기이한 삶을 좇는다. 소설 속 화자가 타히티로 진입하며 묘사한 이 풍경은 서머싯 몸이 고갱과 타히티를 취재할 때 느꼈던 그 감정일 것이다. 타히티 해변에선 바다를 발아래 둔 듯한 큰 산이 보인다. 군림한 그 산의 위용 덕분에 더욱 신비한 왕국 느낌이 난다.
2. 프린스 에드워드 섬
집 양옆으로는 넓은 과수원이었다. 한쪽에는 사과나무, 또 한쪽에는 벚나무들이 꽃들을 흠뻑 덮어썼고 풀밭에는 민들레가 흩뿌려져 있었다. 뜰에 핀 보랏빛 라일락의 아찔하도록 달콤한 꽃향기가 아침 바람을 타고 다락방 창문까지 날아들었다. 뜰아래 토끼풀이 소복한 푸른 풀밭은 골짜기까지 비탈을 이루고 있었다. 골짜기에는 시냇물이 흘렀고 흰 자작나무들이 줄지어 자랐으며, 덤불 속에서는 고사리며 이끼 같은 온갖 숲속 식물들이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가볍게 뻗어 오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중략)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앤은 이 모든 것들을 모조리 가져버릴 심산인 양 한참 동안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가엽게도 앤은 짧은 생애 동안 사랑스럽지 못한 것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던 것이다. – <빨강 머리 앤> 중 ‘초록지붕집의 아침’ (루시 M. 몽고메리, 김서령 옮김, 허밍버드)
캐나다 남동부에 있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주는 작가의 고향이자 이 소설의 무대. 캐나다 연방 중 가장 작고, 로맨틱한 경치를 만끽할 수 있는 공원이 많다. 작가가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던 집은 현재 앤의 집을 재현해놓은 그린 게이블스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우리 모두는 한때 앤이었다’는 역자의 말처럼, 외롭고 수다쟁이였던 앤이 그리워 동화 같은 이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적지 않다.
3. 그라이펜 호수
하늘에서 타오르는 태양빛이 호수를 비추면, 호수는 태양이 되고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삶의 나른한 그림자가 그 안에서 조용히 흔들린다. 어떤 교란도 없다. 모든 것은 사랑스럽고 아름다우며, 첨예하게 근접하여, 정의할 수 없는 머나먼 거리에 머문다. (중략) 이곳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얼마나 고요한가, 얼마나 순결한가. 거의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이 작은 호수는, 주변의 부드러움과 고요함과 순결함에 의해 스스로 부드럽고 고요하고 순결하다. – <산책자> 중 ‘그라이펜 호수’(로베르트 발저, 배수아 옮김, 한겨레출판)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그라이펜 호수는 취리히 호수에 비해 작고 덜 알려졌지만, 4백여 종이 넘는 식물과 온갖 철새들이 머무는 자연보호구역이다. 그 자리에 수백 년을 있었던 고성과 교회 말고는 건축물도 없는 전원 지대. 카프카, 헤세와 동시대 작가였던 발저는 이 작은 호수를 향해 걷다가 ‘저것은 내가 가야 하는 나의 호수’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불현듯 ‘나는 그곳에 가야 해!’ 싶을 때가 있으니까.
4. 선운사
“그 사람을 이해하기엔 여기 이 선운사처럼 좋은 곳이 없지요. 침향이 있고, 염주가 있고, 새우가 있으니까. 그리고 늘 푸른 동백나무 숲과 사연 많은 비석들, 불상들이 있으니까요. 천년을 넘게 이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아직 소나무 숲과 오리나무 숲 사이에 바람으로 살아 있으니까요. 시간을 뛰어넘어 항상 존재하는 그런 것들이 그에게 어떻게든 작용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장마철에 그 연못의 새우를 잡아 냉동을 하면서 그는 뭐라는 줄 아세요. 늘 이렇게 말하곤 하지요. 세월이라는 것도, 세월이라는 것도 여기선 새우처럼 냉동할 수 있는 거라구…” – <나무남자의 아내>(구효서, 현대문학)
소설가인 화자는 침향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사실은 또 다른 결정적인 요인 때문에 전북 고창 선운사로 간다. 화자가 묵은 허름한 여인숙의 여주인은 한번쯤 자기 생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며, 글 쓰는 사람인 그에게 조금씩 옛 남자와의 추억을 풀어낸다. 오랜 세월 한곳을 떠나지 못하는 여주인의 사연과 화자의 추억이 선운사라는 공간을 매개로 교차한다. 1996년 제41회 현대문학상 수상소
설집에 실린 단편.
5. 오키나와
차창으로 바다가 보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푸르디푸른 바다였다.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모모코가 창문을 열자 차 안으로 뜨거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상쾌한 감촉이었다. 습기 없이 보송보송한 바람이라 살갗에 닿는 감촉이 기분 좋았다. 흠,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겠는데? 지로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이런 바람과 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남쪽으로 튀어!>(오쿠다 히데오, 양윤옥 옮김, 은행나무)
주인공 가족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남쪽으로 이주하는 첫 대목.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바람과 바다의 첫인상만으로 웬만큼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다니, 이것이 휴양지의 힘.
6. 아프리카
처음으로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내가 받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자유였다. 자유는 너무도 강렬해서 나를 불태우고 도취시켰으며, 나는 고통스러우리만큼 그것을 누렸다. 그것에 대해 이국적인 정취와 결부시켜 말하고 싶지는 않다. – <아프리카인>(르 클레지오, 최애영 옮김, 문학동네)
최근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서울에 다녀가기도 한 르클레지오는 한 출판사로부터 자전적인 소설을 의뢰받은 후, 어쩐지 자신이 아닌 아버지의 궤적을 짚기 시작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오랜 세월을 산 아버지와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자기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기원을 더듬는다. 르 클레지오의 아프리카는 향수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감정과 에너지가 휘몰아치는 곳이다.
6. 페루의 어느 끝
다른 사람들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들어가거나 히말라야의 동굴에서 생을 마치듯이, 그는 이곳 페루의 해변까지 도망쳐오지 않았던가. 다른 이들이 하늘가에서 살듯, 그는 바닷가에서 살고 있었다. 바다란 소란스러우면서도 고요한 살아 있는 형이상학, 바라볼 때마다 자신을 잊게 해주고 가라앉혀주는 광막함, 다가와 상처를 핥아주고 체념을 부추기는 닿을 수 있는 무한이었다. 여자는 너무나도 젊었고 너무나도 막막해하며 믿음에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맹 가리,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이 소설을 읽으며 떠오르는 해변은 휴양지의 모습이 아닌, 쓸쓸하고 다소 황폐한 풍경이다. 그러나 로맹 가리의 팬이라면 작가가 세상의 끝처럼 묘사한 장소에 진작부터 끌렸을 것이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졌다고 설명된 해변가는 여름이면 정말 물개와 새 떼들로 뒤덮인다고 한다.
7. 이스탄불
내 이야기의 처음에 그랬듯이, 이제 다시 내 앞에 멋진 삶이 펼쳐졌다고 생각했다. 스라셀비레르 대로에서 차를 멈추게 하고, 꽃집에서 내 앞에 펼쳐질 삶만큼이나 아름다운 빨간 장미를 한 아름 주문했다. 이미 집에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라크 반 잔을 약처럼 마시고 왔다. 베이오울루로 나가는 골목길에 있는 술집에서 한 잔 더 마실까? 하지만 조바심이 사랑의 고통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 <순수 박물관>(오르한 파묵, 이난아 옮김, 민음사)
파묵이 바라본 1970~80년대 이스탄불이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가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내놓은 첫 소설의 놀라움은 작품에서 확장된 현실에 있다. 소설의 모든 걸 고스란히 담은 박물관이 존재한다. 이스탄불 역사와 문학을 총체적으로 엮어내는 염원을 풀어내고자 한 파묵의 기획력 덕이다. 물론 좋은 가문의 여자와 결혼을 앞둔 남성이 결혼 전 만난 한 여자와 44일간 사랑하고, 가정 있는 몸으로30년에 걸쳐 그 사랑에 처절하게 집착한다는 설정부터 놀랍다고 해야 할까?
- 에디터
- 권은경
-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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