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에는 승리를 상징하는 스우시가, 아디다스에는 삼선 트레포일이 있듯 고샤 루브친스키의 로고는 ‘Γoшa Рубчинский’이다. 키릴 문자로 자신의 이름을 문신처럼 새겨 넣었다.
스웨트 셔츠, 튜브 삭스, 스웨트 팬츠, 혹은 해적판 타미 힐피거 스타일의 티셔츠 등 러시아 출신의 남성복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는 자신의 이름이 상징처럼 새겨져 있다. 그의 옷을 입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면 그의 팬층은 현대 문화의 상업주의로부터 이탈한 젊은 층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디자인이 틴 에이저 마니아 층을 넘어 급속도로 확산되는 막강한 이유 중 하나다. 무더웠던 지난해 여름, 럭셔리 주얼리 브랜드의 진앙지로 알려진 파리 방돔 광장 인근의 쇼룸에서 루브친스키를 만났다. 이곳은 얼핏 그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루브친스키의 회사 꼼데가르송 그룹의 소유이고, 그들이 오피스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단, 꼼데가르송은 제작에만 관여할 뿐, 모든 창조적인 전권은 루브친스키에게 있다. “쇼에 세울 젊은이들을 발견하는 게 좋아요. 피팅하는 것도 좋고, 장소에 대해 암시를 줄 수 있는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아하죠.” 반삭 머리의 루브친스키(32세)는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의 컬트 아이템이 되어버린 스웨트 셔츠나 티셔츠를 습관적으로 걸쳐 입는다. 러시아 출신인 그는 1984년 격동기에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구소련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고, 90년대 초 혼란기와 푸틴의 초창기 시절을 겪었어요.” 그의 영어는 또렷한 악센트에 약간의 후두음이 섞여 있다. “러시아에 머무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언제나 놀라운 곳이기 때문이죠. 결코 지루함이 없어요.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는 건 정말 흥미로우니까요. 러시아 젊은이들이 옷 입는 방식은 미국이나 영국을 비롯해 그 어떤 곳과도 다르죠. 러시아에서 사는 것 자체가 제겐 영감이에요.” 그의 베이스는 러시아일지 몰라도, 디자이너로서의 영향력은 누구보다 글로벌하다. 우리가 만나기 일주일 전, 그는 피티 워모(Pitti Uomo) 박람회에서 2017 S/S 컬렉션을 선보이기 위해 이탈리아 피렌체에 머물렀다. 피티 워모의 기획자들은 매년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를 초청해, 피렌체의 보물과도 같은 건축물을 배경으로 쇼를 개최한다. 로베르토 카발리는 베키오 다리에서, 라프 시몬스는 보볼리 정원, 그리고 발렌티노는 코르시니 궁전에서 쇼를 펼쳤다. 하지만 루브친스키는 전임자들의 르네상스풍 웅장함에서 벗어나, 1930년대 이후 버려진 담배 공장을 선택했다. 공장의 안뜰에는 북잉글랜드나 동독 스타일의 게스트들이 대기 중이었고 말이다. “어디에도 없는 곳이에요. 그래서 더욱 좋죠. 쇼는 어디서나 열릴 수 있으니까요.” 스타일리스트 로타 볼코바는 피렌체에서 발견한 러시아 양식 건물에 무대를 연출했다. 이번 쇼의 옷들은 약간 러시아풍이지만, 루브친스키는 의외로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책과 영화, 그리고 이탈리아어로 젊은이들 혹은 소년들이라는 뜻의 ‘라가치’에서 영감을 얻었다. 니네토 다볼리나 주세페 펠로시 같은 영화 속 등장인물을 닮은 모델들이 나옴직도 했지만, 이탈리아 스포츠웨어 브랜드 필라, 카파, 세르지오 타키니 등과의 협업으로 꾸민 무대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필라, 고샤.” 루브친스키는 필라 로고와 자신의 키릴어 이름이 적힌 레드 스웨트 셔츠를 가리키며 말한다. “굉장히 펑키한 느낌이죠.” 쇼 무대 인사를 할 때 그 역시 필라-고샤의 스웨트 셔츠를 입었고, 애프터 파티에서 역시 그 모습 그대로였다. 루브친스키의 캐스팅은 보통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뤄지지만, 기준이나 원칙 없이 하는 건 아니다. ‘고샤 보이스’라 불리는 호주, 핀란드, 러시아의 모델들은 캣워크 안팎에서 모두 그의 옷을 즐겨 입는다. “모델들이 현실에서도 이 옷을 입는 것이 제게는 아주 중요해요. 게다가 그들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서로를 알고 있다는 사실도 근사하죠. 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호주의 소년은 이미 핀란드의 소년을 알아요. 제 쇼를 위해 피렌체에서 처음 만났을 뿐이죠.”
많은 사람들이 루브친스키가 틴에이저 시절, 늘 비슷한 젊은이들과 그룹 지어 몰려다녔을 거라 추측하지만, 그는 의외로 조용한 아이였다. 그의 부모님은 공산주의 붕괴 전후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현금이 귀했던 터라 루브친스키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90년대 중반, 모스크바는 외국의 음악, 하위문화, 약물 등의 영향을 받은 문화적 격동기를 거쳤다. “근사한 이미지였어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쿨한 것이 곳곳에 가득했으니까요.” 사진에 흥미를 갖게 된 계기를 묻자 루브친스키가 말한다. “동시에 위험하고 두려운 시기이기도 했어요.” 그는 모스크바 거리를 위협하면서 사냥감을 찾아다니던 스킨헤드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함께 몰려다녀야 했다. “스니커즈 하나를 사려 해도, 다섯 명이 뭉쳐 다녀야 했어요.” 루브친스키가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혼자가 되면…”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지만, 말꼬리를 흐리며 잠시 여운을 남긴다. “뭔지 모를 강렬한 감정과 노스탤지어를 느꼈어요. 이제는 그게 뭐였는지 알죠. 지금은 똑같은 감정을 반복해서 느끼고 있으니까요. 젊음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아련한 감정. 제가 지금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유죠. 젊은이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머릿속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고 싶어요. 또 여기에 제 감정과 기억을 섞어서, 현재 무엇이 가장 쿨하고 근사한 것인지 찾아내는 거죠.”
베트멍과 발렌시아가의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 역시 루브친스키의 스포츠웨어 그리고 서구의 영향과 소련의 애국주의가 혼합되던 90년대 초반의 러시아 스타일을 비롯해 많은 것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루브친스키는 동유럽의 다른 디자이너들, 특히 뎀나나 로타와 일맥상통하는 면을 보인다. “흔히들 고샤, 뎀나, 로타를 묶어서 얘기해요.” 그는 세 사람을 3인조로 묶는 경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뎀나는 조지아(그루지아) 출신이고, 하나의 스토리를 갖고 있어요. 전 모스크바, 로타는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입니다. 물론 우리는 같은 세대이고, 구소련이라는 동일한 배경을 갖고 있지만, 당연히 서로가 추구하는 바는 달라요. 진부한 걸 싫어하고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아티스트가 되길 꿈꾸긴 하지만요. 러시아 특정 지역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해가기 때문에, ‘오, 고샤는 구소련 붕괴 후의 러시아 스타일이야’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물론 루브친스키의 뿌리는 러시안 정체성에서 출발한 것이 맞다. 꼼데가르송과 도버스트리트 마켓의 대표 애드리언 조프가 그에게 매료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이 처음 만난 건, 2009년 러시아 <보그>의 에디터 안나 듈게로바가연 모스크바의 한 파티에서였다. 안나는 재능 넘치는 러시아 젊은이들을 발굴하는 ‘사이클스 앤 시즌스(Cycles and Seasons)’를 만들었고, 애드리언에게 고샤를 소개했다. “애드리언을 만나기 전에는 잡지의 스타일리스트자 몇몇 러시아 영화의 코스튬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어요.” 루브친스키가 회상한다. “나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지만, 무엇이 흥미로운지 고민이 많았던 시기죠. 그 당시 쿨한 스케이터들을 만난 때이기도 하고요! 여름 내내 저는 그들을 촬영했고, 마치 가족처럼 따라다니며 러시아 곳곳을 여행했어요. 그러다가 여름이 끝날 무렵, 이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컬렉션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루브친스키의 첫 컬렉션은 스케이터 친구들이 입는 옷들로 출발했고, 조프는 10〜20장의 티셔츠를 택해 매장에서 선보이기 시작했다. 과정이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직접 디자인한 옷들이 러시아에서 제작되다가 세르비아 생산 라인으로 넘어갔지만, 세르비아 공장이 파산하면서 루브친스키는 조프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어느 누가 예상했을까요,” 조프가 말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합니다.” 루브친스키가 파리 데뷔 무대를 가진 직후, 56개가 넘는 스토어에서 그의 컬렉션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때 저는 잠시 휴식을 취하는 시기였지만, 고샤와의 작업은 아주 즐거웠습니다. 스케이터들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첫 쇼를 마친 직후 비즈니스는 두 배로 성장했고, 그 후론 네 배로 뛰어올랐죠.” 루브친스키의 레이블은 현재 전 세계 116개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패션은 제겐 서로 다른 걸 시도할 수 있는 매체를 의미해요.” 루브친스키가 말한다. “사진도 찍고 싶고 영화도 만들고 싶어요.” 그의 커뮤니티 정신과 전방위적인 교류는 옷뿐만이 아닌 것이다.<Crimea/Kids>, <Youth Hotel>, <Transfiguration Book>, <The Day of My Death>를 포함해 지금껏 발간한 사진집 4권에 그의 이런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최근 펴낸 <The Day of My Death>는 피티 워모에 영감을 준 파솔리니에게 헌정하는 의미로 만들었다. 동시에 17분짜리 동명의 영화도 만들었는데, 르나타 리트비노바(Renata Litvinova)가 연출한 필름 속에선 로타와 루브친스키가 좋아하는 모델이 등장하고, 그 역시 카메오로 출연한다. “기존에 제가 만든 필름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웠어요. 몇몇 스케이터들을 촬영하고 그들과 인터뷰를 나누는 형식이었죠. 우리가 대본과 스토리를 갖고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고샤 키즈에게 파솔리니 정신을 접목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에 관한 것이죠.” 루브친스키의 옷들은 일상에 초점을 맞추되, 패션과의 직접적인 연계보다는 유스 컬처에 가깝다. “고샤 브랜드는 베이식 아이템을 다루지만, 쿨한 디테일이 특징이에요. 고샤 보이스를 위한 유니폼이라는 아이디어가 참 마음에 들어요. 컬렉션을 만들 때마다 전 생각합니다. ‘우린 진을 만들 필요가 있어. 스웨터도 만들고 스웨트 셔츠도 만들어야지.’ 그런 다음에는 컬러를 변화시키고 원단을 변화시키고, 고샤 루브친스키도 새겨 넣죠. 어딘가 빈티지 스토어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하지만 그 느낌은…”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말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옷에는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조프가 말한다. “흔히 그를 기교가 뛰어난 디자이너라 생각하지 않고, 그 역시도 그런 척하지 않아요. 고샤는 디자이너로서의 기교보다는 스토리를 전달하고자 해요. 그리고 거기에는 패션계의 거울이나 입김과는 동떨어진,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정직함이 존재하죠.” 루브친스키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첫 쇼를 마친 후 저널리스트가 제게 이렇게 묻더군요. ‘고샤, 당신이 보여주는 것이 패션이라고 생각하나요?’ 제 대답은 ‘아니, 내게 그건 패션이 아니라 퍼포먼스에 더 가까워요’였어요. 오직 이 커뮤니티에 속한 키드, 오직 그들만을 위한 컬렉션을 만들길 원하니까요.”
- 에디터
- 김신
- 포토그래퍼
- COLLIER SCHORR
- 글
- Alexander F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