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백 미터 밖에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사선 스트라이프 로고만큼이나, 오프화이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버질 아블로는 여러모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스트리트 웨어를 새로운 시대의 레디투웨어로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현대 패션의 게임 메이커, 버질 아블로와 <W Korea>가 몽클레르의 협업을 기념하여 동시대적 패션에 대한 단상들을 나눴다.
버질 아블로는 패션계에 이름을 내보인 이래 기가 LTE급의 속도로 과감한 결과물을 선보여왔다. 시카고 출신의 대학생이던 시절 매니저 존 모노폴리를 통해 카니예 웨스트와 인연을 맺으면서 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세간에 ‘버질 아블로’라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카니예 웨스트의 ‘스타일리스트’라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디제잉과 스케이트보딩도 수준급 실력을 갖춰 유명 크루들과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무엇보다 패션 크리에이터로서 오늘날의 버질 아블로를 있게 한 계기는 2012년에 시작한 패션 프로젝트 파이렉스 비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라인을 접은 랄프 로렌 럭비의 플란넬 셔츠를 30달러 정도의 싼값에 대량으로 사들여 그 위에 ‘PYREX’라고 실크스크린 프린트를 넣은 후 200~600달러 가격대로 판매했는데, 인기 래퍼 에이셉 라키가 속한 힙합 크루 에이셉몹 멤버들이 이 컬렉션을 입고 룩북 이미지에 등장하면서 스트리트뿐만 아니라 하이패션계까지 휩쓸 정도로 파괴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The Youth Always Win(젊음은 언제나 승리한다)’이라는 메시지를 내세운 이 프로젝트가 거품 가격 논쟁과 더불어 그저 흥미로운 언더컬처의 움직임 이상의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음을, 당시 배경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하이패션으로 보면 발렌시아가의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가 화려한 그래픽 프린트가 들어간 티셔츠로 고급 스트리트 룩을 지향하고 있었고, 후드바이에어가 등장해서 과격한 스트리트 웨어를 설파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카니예 웨스트, 제이지, 비욘세, 에이셉 라키가 먼저 입기 시작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버질 아블로의 파이렉스 비전은 가장 적당한 시점에 가장 적절한 모양새로 등장해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가장 빠른 속도로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파급력의 핵심 매개체는 바로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소셜미디어였다. 아블로는 그 효용을 누구보다 잘 이용했다.
파이렉스 비전은 단기 프로젝트였다. 2014년 봄/여름 컬렉션을 시작으로 버질 아블로는 자신의 브랜드 오프화이트를 시작했다. ‘PYREX23’에서 ‘WHITE13’으로 타이포를 바꾸고 그 위에 흰색 사선 스트라이프를 더한 명료한 디자인이 시그너처가 되었는데, 이는 파이렉스 비전의 두터운 마니아 층만 아니라 새로운 하이엔드 층의 고객층까지 끌어들였고, 2015년에는 LVMH 신인 디자이너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단지 디자이너의 인기에 묻어가는 레이블이 아님을 입증했다. 동시대 패션에서 버질 아블로는 스트리트 패션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스트리트 패션을 하이패션의 시선에서 재해석하고 창조하는 데 열정을 보이고 있고, 이 점이 바로 수많은 스트리트 패션 메이커들과 아블로가 구분되는 가장 명확한 지점일 것이다. 스타일리스트 이안 코너 등 젊고 재능 있는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흥미로운 구석을 자극하는 주제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협업을 한다. 오프화이트와의 협업 결과물은 아이코닉한 사선 스트라이프 덕분에 액세서리나 슈즈 등 아이템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화제를 모으며 매진되기도 했다. 그가 이번에 발표한 몽클레르와의 컬래버레이션 프로젝트인 ‘O’ 컬렉션에 집중된 관심 역시 뜨거웠다. 아이덴티티가 뚜렷한 몽클레르와 오프화이트라는 두 브랜드를 조화시키는 해법의 키워드로 버질 아블로는 ‘선원’이라는 단어를 들고 나왔다. 북해의 거친 바다에서 일하는 선원의 작업복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풀어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익히 아는 몽클레르의 로고는 밝은 노란색으로, 그리고 오프화이트의 스트라이프는 흰색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서로를 조금도 해치지 않고 조화롭게 얽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크리에이티브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더블유의 질문에 버질 아블로는 ‘모든 것의 열쇠는 스토리텔링’이라고 말했다.
<W Korea>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패션계 크리에이터들은 극명하게 두 가지 스타일로 나뉘는 것 같다. 극도로 아날로그를 추구하며 내면으로 칩거하거나, 더욱 세상과 소통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거나. 당신은 어떤 스타일인가?
버질 아블로 나는 분명하게 ‘조용히 살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에서 에너지를 받는 디자이너다. 디자인의 영감을 내 주변 사람들과 그들의 삶으로부터 받는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는지를 통해 영감을 받고 이를 디자인으로 풀어낸다.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건축을 공부했다. 디제잉과 스케이트보드에 대한 관심과 실력 또한 수준급이며 아트 에 대한 조예도 깊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콕 집어 왜 ‘패션‘이었나?
내게 내재된 다방면의 크리에이티브한 것들을 마음껏 갖고 놀고 부릴 수 있는 배출구, 혹은 수단이 절실히 필요했다. 나처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을 어떤 제한도 없이,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 그게 내게는 패션, 더 정확히 말하면 패션 ‘브랜드’였다. 패션 브랜드는 나 같은 사람이 새로운 아트를 시도할 수 있게 해주는 아주 멋진 놀이터다. 요즘 시대에 패션은 종합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패션쇼, 사진, 아트워크, 책, 광고 캠페인, 그리고 옷 그 자체가 크리에이터의 시각을 대변해주는 좋은 발로가 되기 때문이다.
오프화이트의 전신인 파이렉스 비전이 있게 한 전설적인 2012년 컬렉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단지 스트리트 패션이 유행하게 된 계기라고 말하기에는 패션 역사의 많은 것을 바꾸어놓은 큰 전환점이었는데, 당신에게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내 의도는, ‘이제는 패션계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내보자!’였다. 레디 투웨어, 오트 쿠튀르로 정의되는 기존의 패션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제일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된 패션 말이다. 쉽게 잊혀지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은 가장 중요한 역사의 한 장은 대부분 밑으로부터 발현된다는 점이다. 이제는 패션과 가장 가깝게 관련된, 우리같은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직접 만드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당신이 처음 패션계에 발을 들인 2012년, 당시 발렌시아가의 디렉터였던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파리 패션위크에 그래픽 티셔츠를 런웨이로 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스트리트 웨어가 하이패션과 동급의 파급력을 갖는 시대가 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선두주자로 당신을 꼽는다. 그즈음을 돌아보면, 스트리트 웨어의 세상이 올 것을 예감했었나?
그때 나를 비롯한 ‘우리’는 새로운 표현의 시대가 왔음을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마치 펑크처럼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어쩔 줄 몰라서 제멋대로 분출했던 펑크가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펑크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정규 교육을 받은 훈련된 사람들이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한 후 그 안에서 혁명적인 것을 만들려고 했다. 그냥 제멋대로 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존중하면서 했다는 점도 말하고 싶다. 스트리트 웨어의 세상이 올 것은 이미 예감했다. 90년대를 통과해온 우리가 그때 무엇에 빠져 있었는지 너무나 확실하지 않은가. 그 시절의 패션 스타일이 그것이니까.
미디어들이 오프화이트에 붙이는 수식어는 꽤 여러 가지가 있다. 건축적인, 실용적이고 개념적인, 철학적이면서도 그래픽적으로 명확한, 예술적인 등등. 창립자에게 직접 듣고 싶다. 당신은 어떤 옷을 지향하는가?
(웃으며) 굉장히 감사한 표현들인데, 내가 생각하는 표현은 ‘Real’하다는 단어가 적당할 듯하다. 나는 사람들이 평소에 실제로 입고 다니는 옷에 10퍼센트 정도의 트위스트를 넣어서 디자인한다. 요즘 스트리트 웨어라고 하면 셀렙들의 사진에 등장하는 독특한 것을 상상하기 쉬운데, 실제로 길거리에서 보는 스타일들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스트리트 웨어의 정의이기도 하다.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인 굵은 사선 스트라이프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특히 스트리트 사진에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는데, 이 그래픽이 탄생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파이렉스 때는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 카라바조의 회화와 마이클 조던의 백넘버 23, 힙합 문화 등을 인용해서 조금은 강렬한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조합한 것이다. 그다음에 탄생한 오프 화이트 그래픽은 최대한 ‘디자인되지 않은’ 모노그램을 만들어보고자는 노력의 산물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운 것이 브랜드에 아이코닉한 프린트를 담아내는 일인 것 같다. 많은 패션 브랜드들이 명확하고 구체적인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데, 나는 그 반대로 좀 모호하게 내버려두려고 했다. 그 대신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나 반복되는 패턴으로(아스팔트 바닥에 다 있으니까),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비주얼 언어 같은 느낌을 구현한 것이 사선 스트라이프다.
브랜드 이름, 로고를 큼직하게 처리하는 최근의 경향과는 반대로 ‘off’ ‘white’라는 단어를 작게 처리하는 것도 의도한 바인가?
그것은 말하자면, 새로운 목소리를 찾는 방법이라고 해두겠다. 특정하게 브랜딩을 하는 브랜드들이 있는데, 나는 거기에 무언가가 빠진 것이 있다고 느꼈다. 로고를 반복하는 것과 사이즈를 잘 활용하면 내가 만들어낸 나만의 비주얼 언어를 터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잘 풀렸다.
당신은 현존하는 패션 디자이너 중 협업에 가장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간 많은 협업을 진행했는데, 디자이너 입장에서도 흥미로운 제안이 있었을 것 같다. 어떤 것이 기억에 남는가?
크롬하츠와 같이 진행한 협업. 비즈니스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우리는 서로의 팬이기에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와! 이런 걸 만들면 좋겠다!’라고 의견이 모아져서 제품이 탄생했다. 예전에도 같이 프로젝트를 했고, 이제 곧 새로운 협업 프로젝트를 발표할 예정인데, 서울 한정판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프로젝트를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같이 대화를 지속적으로 해왔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협업 제품이 나오게 되는 경우 말이다. 몽클레르와 진행한 협업도 마찬가지다.
몽클레르와의 ‘O 컬렉션’은 그간의 협업 중 가장 럭셔리에 속하는 마켓과의 작업이고 여러 제품을 포함하는 컬렉션인데,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이번 협업 역시 브랜드의 일방적인 의뢰가 아닌, ‘대화’에서 시작됐다. 몽클레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프란체스코 라가치는 오래된 친구인데, 둘이 이야기하다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떠올리게 되었다. 몽클레르 기존의 브랜드와 비슷하지만 내 아이디어를 접목해 새로운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보자는 데 의기투합한 것이다. 몽클레르가 럭셔리한 젯셋족이 설원에서 스키를 즐길 때 입는 극지방의 이미지라면 ‘O 컬렉션’북극의 춥고 거친 바다에서 어선을 타고 고기잡이를 하는 모습, 외롭고 거친 일을 할 때 수반되는 위험성과 동적인 이미지 같은 그런 특수한 환경에서의 스타일을 생각했다. 기존의 액티브 웨어에서는 본 적 없는 신선한 이미지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몽클레르처럼 역사가 길고 시그너처가 분명한 럭셔리 브랜드와 한가지 아이템이 아닌, 토털 컬렉션을 발표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듯 하다. 어떤 접근 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낀 점이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다.
이런 협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하나의 이야기에 뼈대가 서면 부수적인 것은 자연스럽게 와서 붙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해가 지나고 시즌이 지나도 지속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하나의 시즌을 하나의 선박에서의 스토리로 생각하고 마치 유니폼처럼 선원들이 무엇을 입을지, 어떻게 스타일링했을지, 브랜딩, 컬러 팔레트 등등을 생각했다. 전체적인 콘셉트를 잡고, 몽클레르가 무엇을 가장 잘하는 브랜드인지 살핀 후, 그 안에 서 스토리를 만든 것이다. 전체적으로 오프화이트 특유의 그래픽 요 소를 많이 적용하면서도, 몽클레르와 어울리도록 스트라이프 패턴을 변형했고, 몽클레르와 오프화이트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브랜딩 콘셉트를 시도했다. 예를 들면 선박의 이름을 하나의 그래픽 요소로 쓴 것이나 옷의 형태와 비율 같은 실루엣적 요소를 들 수 있겠다. 디자인 과정 자체야 내 브랜드를 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몽클레르만의 기술과 퀄리티를 활용할 수 있어서 그게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특히아우터 전문가들!
‘O 컬렉션’에는 여성 라인이 따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 룩북 이미지에도 남성 모델들만 등장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정확히 말하자면 이 컬렉션은 유니섹스 라인이다. 지금 한국 여성 모델이 아주 유니크하게 입고 있듯이 모두가 입을 수 있다. 콘셉트는 선박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드레스 같은 여성 전용 아이템은 전혀 없다. ‘Real’의 가치를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가장 편한 느낌으로 입으면 된다. 옷장에 있는 아이템들과 함께 매치해 입으면 더욱 좋다. 크게 입어도 되고 작게 입어도 상관없게 디자인했다.
아쉽게도 PR 담당자가 당신이 다음 비행기를 타러 갈 시간이라고 한다. 정말 궁금한 것 한 가지만 묻겠다. 앞으로 3년, 패션은 어떤 방향으로 흐를 것이라고 예상하나?
확실하다. 지금 흘러가는 방향으로 계속 흘러갈 것이다. 사람들이 정말 입고 싶어 하는 옷들과 어떤 의도를 가지고 몰아가는 ‘야심 찬’ 옷들이 섞여 있겠지. 그 야심 찬 옷들 중 10%만이 살아남을 테고.
- 에디터
- 최유경
- 포토그래퍼
- BEN LAMBERTY
- 모델
- 곽지영, 노마한
- 스타일리스트
- 윤애리
- 인터뷰
- Mina Park
- 헤어
- Mike Fernandez
- 메이크업
- Liset Garza for Nara cosmetics @The Wall Gro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