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오른팔이었던 패트릭 슈마허. 이 소년 같은 남자가 홀로 회사를 이끌어가는 벅찬 과제를 수행 중이다.
패트릭 슈마허는 현직 건축가 중에서 아마도 가장 힘든 직업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2016년 3월에 스타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65세의 나이로 급작스럽게 사망한 뒤, 슈마허는 직원 수가 400여 명인 회사의 책임자가 됐다. 당시 자하 하디드 건축 사무소는 21개국에서 36개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지금은 더 늘었다. 카타르의 월드컵 경기장, 맨해튼의 고급 콘도, 베이징 외곽의 공항… 하디드의 표현대로 ‘분열, 부양 및 중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대단한 회사지만, 그래도 너무 많은 일이 눈앞에 있다. 이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는 동시에 또 다른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사업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생전의 하디드가 수년간 교육한 디자이너의 수를 고려할 때, 디자인 대회 주최자인 맬컴 리딩은 하디드의 죽음이 창의력 붕괴로 이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한다. 하디드의 친구인 건축가 렘 쿨하스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 상황을 샤넬이나 알렉산더 매퀸 같은 브랜드에 비유했다. “패션 하우스는 설립자의 DNA를 발달시키는 작업을 통해 살아남아요. 이 점을 건축 회사에도 적용할 수 있겠죠.” 하지만 건물은 가장 정교한 드레스보다 훨씬 더, 무한히 복잡하다. 그것이 바로 슈마허가 직면한 어려움이다. 물론 슈마허는 회사를 이끌어가는 데 적합한 사람이다. 28년 전, 그러니까 하디드가 자기 이름을 내세울 만한 건물 하나 만들기도 전부터 그녀 밑에서 일했고, 팀에 헌신적인 영감을 불어넣으며 그 작은 스튜디오를 국제적 기업으로 키워내는 데 일조했다. 하디드는 생전에 회사의 한 팀을 ‘패트릭의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약간의 질투를 담아서 말이다. 독일에서 자란 슈마허는 슈투트가르트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던 시절, 하디드의 작업에 매료되어 그녀 아닌 다른 사람과 일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1988년 런던에 도착했고, 하디드의 동료 중 한 사람이 그를 고용했다. 그리고 하디드는 2013년 BBC 다큐멘터리에서 슈마허를 한번 이상 해고한 적이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와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는 내 신경을 건드리는 면이 있었죠.” 그런데도 어느새 하디드는 슈마허에게 플러피, 포테이토, 카푸치노 같은 애칭을 붙여주기 시작했다. 슈마허는 하디드를 향한 경외심은 있었지만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녀가 나보다 나이가 많다거나 유명하다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어요. 권위에 머리 숙이지 않았고, 그녀는 그것을 존중해줬죠.” 호사가들은 그들의 관계가 로맨스로 시작했다고 말한다. 슈마허는 서로 친구 사이였다는 입장이다. 어쨌든 하디드는 미혼이었고, 슈마허는 최근 한국 건축가 양은실과 결혼했다(그가 몹시 개인적인 성격이라 동료들 대부분은 그를 미혼으로 알고 있었다). 슈마허는 하디드가 기관지염으로 입원했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바로 몇 시간 전에도 그녀와 마이애미에 있었다. “유서가 있었어요. 승계 계획이 있었죠.”
2년 전, 회사는 건축가 무잔 마지디를 최고경영자로 고용했다. 그리고 경영진의 결정을 돕는 이사회도 있다. 그러나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축가들은 회사의 수석 디자이너인 슈마허의 이름 아래로 나열된다. 모든 건축물은 그의 작품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한때 슈마허가 본 하디드는 자기 비전의 실체를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직관적인 천재’였다. “누군가는 그녀의 발상이 실행 가능하고, 삶을 향상시키고, 고도의 기능을 갖춘 혁신이라고 주장해야 했어요. 그 역할을 제가 해야겠다고 판단했죠.” 하디드의 경이롭도록 복잡한 건축 형태는 정교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졌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 건축 디자인은 언제나 거의 곡선을 포함하고 있었다. “직선으로 같은 것을 구현하고자 한다면, 2천 개의 모서리가 생겨버리겠죠.” 슈마허는 하디드의 건축 기법을 분석하여 외부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디드가 자신의 작업을 학문적 용어로 묶어두려고 한 슈마허의 노력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글쓰기와 강의 때문에 사무실 밖으로 돈다고 불평하곤 했다. 슈마허는 하디드가 가장 신뢰할 만한 보좌관이었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매 맞는 소년’이었다. 2011년의 한 공개 포럼 자리에서 하디드는 슈마허를 ‘완전한 골칫거리’라고 표현했고, 그를 자꾸 방해하며 “나는 네가 나에게 매일 하는 짓을 하고 있는 것뿐이야”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공공 장소에서 이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둘만 있는 자리에서 그녀가 그에게 어떤 식으로 말했을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슈마허는 말한다. 자신이 외부 활동을 좀 하는 편이었고, 하디드는 그것을 참아줬다고. 슈마허는 타블로이드지 기자나 하디드를 비방한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는 감정적으로 변한다. 2014년, 하디드가 카타르 건설 노동자들의 곤경이 자기와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말한 후, 기자들이 그녀를 포위한 적도 있다. “기자들은 헤드라인 거리를 찾고 있었죠. 유명 인사의 얼굴에 먹칠할 거리 말이에요. 하디드는 중동 여성으로서 그동안 언론을 통해 중동이 충분히 비판받았다고 느꼈을 거예요.” 런던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슈마허는 노트북에 코를 박고 며칠을 보내는 여러 무리의 젊은 건축가들과 대화를 나누며 스튜디오를 누빈다. 한 그룹은 프링글스 칩처럼 생긴 건물 작업을 진행 중이고(프링글스 칩 같은 곡선이 사실 하중을 지탱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고 한다), 다른 그룹은 중동의 정부 건물 건을 진행 중이다. 이 책상에서 저 책상으로 옮겨 다니며 가르치고 배우고, 사무실 한 곳에서 배운 것을 다시 다른 곳으로 전달하는 그의 모습은 세계적 스타 건축가라기보다는 사내 건축 평론가처럼 보였다. 앞으로 몇 개월간은 그에게 결정적인 시기다. 벨기에 앤트워프 항만 당국의 본사,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 있는 킹 압둘라 석유연구센터, 런던 과학박물관의 수학 갤러리, 이렇게 세 곳이 개장한다. 하디드가 살아 있을 때 거의 완성된 건축물이지만, 이들 각각은 회사의 생존력을 시험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2016년 11월 말까지 베니스에서는 하디드 회고전(물론 슈마허의 회고전이기도 한)이 열렸다. 12월 중 런던의 서펀타인 새클러 갤러리에서도 하디드의 전시가 있고, 2017년 봄에는 더욱 큰 전시가 로마 맥시 미술관에서 개최된다. 런던의 갤러리와 로마의 미술관 모두 자하 하디드 건축 사무소가 설계한 곳이다. 하디드를 추모하는 행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슈마허는 계속해서 회사를 잘 이끌어갈 수 있을까? 회사 운영에 대한 포부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내 인생의 과업이에요. 이 시간이 주는 기회를 놓친다는 건 비극일 테고요.”
- 에디터
- 권은경
- 포토그래퍼
- ADRIAN GAUT
- 글
- Fred A. Bernstein
- PHOTO
- GETTYI MAGES/IMAZI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