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에 전념해서 아끼지 않고 자신을 쏟는 사람은 진짜의 시간을 산다. 지금 데뷔 10년 차인 정일우가 그 속에 있는 것처럼.
정일우와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날짜는 단 이틀, 태국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다시 중국 드라마를 찍기 위해 출국해야 하는 사이의 시간이었다. 2년가량을 바쁘게 지낸 그에게 제작국이 어디인지, 혹은 케이블이 아니라 웹드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1주일 이상 쉰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군 입대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공백기를 최소화하고 싶기도 하고, 데뷔 10년 차인 만큼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해서 일해보자고 생각했어요.”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단숨에 높이 차오른 스무 살은 어느새 어른들의 인생이 언제나 오르막길만은 아님을 깨달았지만 성실한 걸음으로 자기 길을 채워가는 서른이 되어 있었다.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 방영 시작을 보기 전에 정일우는 스치듯 대륙의 가을을 향해 떠났다.
W Korea 태국에서 월요일에 들어와서 토요일부터는 또 중국 촬영이라고 들었다.
정일우 드라마 촬영을 쉴 새 없이 하다 보니까 요즘은 한국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적은 것 같다. 1년 반 정도 1주일 이상 쉬질 않았다. 해외를 오가기도 하고 웹드라마까지 쉴 새 없이 해왔는데 체력적으로 힘든 것 빼고는 즐겁다. 일하는 게 가장 행복하고 살아 숨 쉬는 느낌이 든다.
제작 환경이나 낯설지는 않던가? 태국 드라마에서 외국 배우가 주인공을 맡은 게 처음 있는 일이라 더 신경이 쓰였다. 책임감과 부담감이 함께 느껴졌다고 할까. 더빙 작품이라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연기했는데, 태국의 제작 환경이 진지하고 전문적이라 놀랐다. 할리우드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스태프들도 많고, 카메라를 비롯한 촬영 장비도 수준이 높아서 인상적이었다. 제작진의 노력이 느껴져서 더 몰입해서 연기를 했고, 언어가 다를 뿐 감정 교류는 잘 이뤄진 것 같다. 내년 1월부터 방송이 시작된다.
방영 중인 드라마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이하 <신네기>)는 그전에 찍었나?
태국 드라마 촬영 전인 올해 초부터 촬영했고 마친 지 두 달 정도 지났다. 사전 제작 드라마는 시간적 여유가 있고 디테일한 얘기를 나누면서 촬영하기 때문에 작품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것 같다. 촬영하면서 1, 2부만 몇 번을 다시 찍을 정도로 수정을 계속했다.
인터넷 소설이 원작이고, 제목부터 10대 취향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이 드라마는 어떤 점에 마음이 끌려서 선택했나?
그 나잇대 타깃이 맞다. <야경꾼일지>처럼 무게감 있는 작품도 제법 해왔는데, 30대가 되기 전에 좀 가볍고 젊은 드라마를 하고 싶었다. 이런 류의 경쾌한 드라마를 안 찍은 지 6~7년 되어서 군대 가기 전에 찍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 또래 배우들과 같이 일하는 재미도 느껴보고 싶었다.
박소담, 안재현 등의 배우들과 함께 연기한 경험은 어땠나?
<신네기> 현장에서는 내가 선배 축이었다. 이제 10년 차 배우가 되다 보니까 현장에도 동생들이 많아지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게 되더라. 안재현 씨는 신비로운 사람이다. 밝고 재밌는데 엉뚱한 면도 많고 4차원이다. 이정신은 착한 막내, 예의 바르고 챙겨주고 싶은 동생이었다. 박소담 씨에게는 자극을 많이 받았다. 현장에서의 집중력이 정말 뛰어나고, 풀어져 있는 자연스러운 연기도 정말 잘한다. 영화를 주로 찍다가 미니 시리즈에 익숙하지 않았을 텐데도 적응을 참 잘하더라.
데뷔 10년이 된 감회 같은 것이 있나?
스무 살에 데뷔해서 서른이 딱 됐기 때문에 10년이라는 시간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뒤돌아보면 아쉬운 점, 후회스러운 점도 많고. 물론 뿌듯한 점도 있다. 무엇보다 10년 동안 내가 버텨왔다는 걸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다. 아직은 갈 길이 멀겠지만 앞으로의 30대는 좀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더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그런여유에서 올 것 같다.
어떤 방식의 여유일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아는 거다. 물론 기본적인 성실함은 당연히 갖춰야 하지만, 거기에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랄까. 힘을 빼고 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그렇게 노력하니까 결과물이 더 잘 나오고 편해지더라. 멋있어 보이려고 힘을 주는 건 사람들 눈에 쉽게 들키는 것 같다. 몇 년 전에 가까운 지인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네가 우는 연기하는 걸 보고 있으면 지금 슬픈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 내 가슴이 아픈 게 아니라.” 그 이야기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연기 스타일을 바꾼다기보다 내 삶의 일부라 생각하고 차근차근 나아가려고 마음먹고 있다.
30대를 내다보며 이런저런 구상을 하는 걸 들으니 궁금해지는데, 당신의 20대는 어땠나?
좋은 배우가 되려면 다양한 경험을 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여러 가지를 겪어봐야 표현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진다고. 데뷔 전의 나는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고 참 평탄한 삶을 살았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는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일도 벌어지는데, 보통 사람들의 인생에 그런 경험은 드물지 않나.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데뷔 이후에 일하면서 힘든 일을 조금씩 겪었다. 배신도당해보고 좌절도, 실패도, 후회도 해봤다. 몸이 아프거나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일이 있었다. 그런 겹겹이 내 내면에 쌓이면서 좀 더 성숙해지고 삶을 알아가는 것 같다. 어떤 느낌을 가장하는 연기가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
10년 전을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정말 아는 게 없었구나 싶다(웃음).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다.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은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더 좋아질 거라는 보장은 없는 것 같다. 요즘 더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작품을 더 많이 남기고 싶은 이유도 있다. 후회스러운 것 중 하나는 데뷔 직후 일을 많이 하지 않았다는 거다. 더 부딪쳐서 여러 가지를 배우면 좋았을 20대 초중반의 시기에 자신감도 부족했고, 몸을 사렸다고 할까. 운이 좋게 데뷔하고 큰 성공을 경험했는데 그 이후로는 실패와 좌절을 겪었다. 아주 일찍 붕 떴다가 가라앉았다고 할까. 그때부터 자존심을 버리는 연습을 하며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나를 찾다가 어느 순간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 같았다. 순탄치 않은 삶이었던 거 같다.
지금은 좀 평온해졌나?
다행히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그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나? 자신감보다는 자존감이 강한 것 같다. 사실 불안이 많은 성격인데 그런 것들이 별로 삶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일단 부딪쳐보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중국도 태국도 그렇게 한번 부딪쳐보자는 생각으로 도전한 거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어차피 흐르는 거니까, 어떤 시장이 검증이 안 되었다고 해서 겁을 내고 안 갈 필요는 없었다. 그곳을 개척하는 첫 번째가 될 수도 있는 일이고. 지금은 시대를 잘 타고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배우가 해외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니까.
문화 차이 때문에 힘든 점은 없나?
중국은 어릴 때부터 여행을 여러 차례 다녔고 누나도 오래 유학을 해서 비교적 친숙하다. 태국도 여행으로 여러 번 갔는데 이번에 오래 머무르며 촬영하 면서 사람들의 친절과 예의에 놀랐다. 타인을 미소로 대하고, 일하는 동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너가 있었다.
촬영 현장에서 발견한 그곳만의 흥미로운 특징은 없었는지.
더운 나라여서인지 촬영할 때 배우들을 배려해 쉴 수 있게 하는 트레일러나 침대 시설 같은 시스템이 아주 잘 갖춰져 있었다. 다만 나는 외국인이고 중국 드라마 일정이 잡혀 있는 상태로 중간에 들어간 거라 정해진 기간 동안 모든 분량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한 달 반 동안 하루도 못 쉬고 촬영했다. 밤 10시 쯤 일정이 끝나면 숙소에서 씻고, 다음 날 촬영 분량을 한국어로 번역한 대본을 읽다 보면 매일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못 자는 빡빡한 일과였다. 언어가 다른 스태프 분들과 일하려면 그들의 눈빛을 빠르게 읽어야 하더라. 상대 배우들은 어떻게 대본을 다 읽고 오느냐며 놀라는 반응도 있었다.
그런 점은 당신의 모범생적인 면일까?
한국인으로는 처음 그곳 드라마 주연을 맡은 배우이니만큼 잘하고 싶었다. 한국 배우 이미지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 우선 체력도 좋고 대사도 다 외워온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사실 매일 코피가 났고, 너무 어지러워서 링거도 세 번이나 맞은 건 비밀이다(웃음).
한국에 오면 뭘 제일 하고 싶었나?
소맥 마시고 싶었다. 술을 잘은 못하는데 특히 해외에 오래 나가 있다 보니 촬영 끝나고 마시는 맥주 한잔이 외로움을 달래주더라. 요즘은 친구들을 만나도 커피보다는 소맥 한잔 같이 마시는 게 편하고 좋다.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1백만 명이다. 계정을 운영하는 자신만의 원칙이 있나?
사진 찍거나 글 쓰는 걸 다 직접 한다. 시간 낭비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잘 이용하면 작품으로 보여지는 이미지 외에 매력을 보여줄 수 있고 팬들과 소통할 수 있어서 배우에게는 좋은 채널인 것 같다. 해외 팬에게 내가 뭐하고 사는지 근황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도 편리하고. 하지만 아무래도 반응이 신경이 쓰여서 촬영할 때는 아예 안 보려고 한다. 핸드폰을 놓고 나가기도 하고.
인스타그램에서 팬들과 함께 쿠킹 클래스 한 걸 봤다.
요리도 잘하는 편인가? 어릴 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혼자 밥 먹을 때가 많았다. 외할머니 요리 실력이 좋으셨는데, 곁눈질로 배운 것 같다. 집안 분위기가 남자도 알아서 챙겨 먹으라는 문화였다. 요리하는 게 재밌고, 누군가가 맛있게 먹어주면 기분이 좋다. 중국판 <마스터 셰프> 같은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거기서는 중식이나 칼질을 많이 배웠다. 찌개 종류를 잘 만드는 편이고, 얼마 전에 스태프들이랑 놀러 가서는 내가 해물볶음짬뽕을 만들었는데 반응이 좋았다. 외국 나가서도 마트에 꼭 들르고, 가족과 있을 때 식재료 장 보는 걸 좋아한다. 포인트는 꼭 내 카드에 적립한다.
<런닝맨>보다는 <삼시세끼>에 나가는 게 어울릴 것 같다.
예능 체질은 전혀 아닌데, 오히려 몸으로 하는 게 편하다. 운동을 좋아해서 외국 나가서도 틈날 때마다 배드민턴 치고 러닝이나 헬스를 한다. 나이키에서 주최하는 10K 마라톤 ‘위런 서울’에도 세 번 정도 완주했다.
그런가 하면 해외 아트 페어를 보러 간다거나 전시장 찾는 일상도 자주 보이더라. 미술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있었나?
어머니가 의상 쪽 일을 하고 누나도 의류 디자인을 전공해서 어릴 때부터 시각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다. 가족 여행 때 갤러리나 미술관에 다니던 습관이 몸에 뱄다. 지금도 미술관 같은 데서 하루 종일 머무르고 커피 마시고 작품 보고 하는 여행을 가장 좋아한다. 컬렉팅까지는 아니라도 마음을 건드리는 작품이 있을 때 사고 싶기는 하지만 아직은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시작하진 않고 있다.
밴드 MAAN 앨범 내레이션에 참여했고, 일본 팬미팅에 동행하기도 했는데, 어떤 인연이었는지 궁금하다.
중학교 친구가 MAAN 드러머인데 그 친분으로 <꽃미남 라면가게> 드라마 OST에 참여해줬다. 그 이후로 해외 팬미팅에도 동행해주는 가까운 친구들이다. 음악 실력도 좋다. 한번 친해진 관계에 대
한 의리가 있다고 할까, 오래가는 편이다. 내가 좋았던 시기, 진짜 힘들었던 시기를 다 지나도록 꿋꿋하게 바라봐주고 옆에 있어준 오래된 팬들도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더 잘해야겠다는 자극을 늘 받는다. 성공해야겠다기 보다 성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깝다.
팬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자주 있나? 웹사이트?
팬사이트에서 글도 읽고, 현장이나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는 분도 있다. 내 팬들은 무척 솔직해서 이상하면 이상하다, 연기를 못하면 못한다고 얘기해준다. 그리고 데뷔 10주년을 기념하고 싶어서 9월 초에는 팬들과 함께 기차 여행을 한다. 내가 경비를 대고 300분을 모셔서 춘천으로 향해 바비큐도 해서 먹고 게임도 하고 돌아오는 일정이다. 한국에는 오래된 팬들이 많아서 가족 같고 친구처럼 편하다면, 중국 팬들은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해 준다. 일본 팬들은 멀리서 조용히 지켜봐주시는 편이다. 신기하고 힘이 난다.
상상하고 그려온 서른 살에 얼마나 가까운 모습인가?
이민호, 김범 등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들과 같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면서 서른 살을 맞이했다. 좀 허무하더라. 20대가 될 때는 기분이 좋았는데 서른은 아직 한 것도 없이 너무 빨리 닥친 것 같았다. 이제는 시간 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소중하다. 20대는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세상을 배웠다면 30대는 시선을 안으로 돌려서 내면을 키워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20대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가 있다면?
마음가짐이 어떠냐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나 미래가 바뀐다는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일이 없을 때는 초조해하고, 잘 안 풀릴 때는 힘들어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하지만 같은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
즐기면서 하느냐, 어쩔 수 없이 하느냐는 큰 차이가 있다. 스스로에 대해서 믿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 이 세상에 불가능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도 일도 내가 갈망하고 노력하면 언제나 이뤄지더라. 한없이 좌절한 적도 있지만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을 놓은 적이 없다. 성공할 거라는 야망이 아니라, 배우로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인정받을 거라는 낙관이 있었다. 노력은 언제나 해야 할 것이고.
출국 전에 뭘 하고 싶나?
대본을 미친 듯이 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 하지만 사는 게 바빠 서로 만날 시간이 없는 중학교 친구과 술 한잔은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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