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고 북적거리는 여행지에서 욕이나 할 바엔 차라리 집에서 영화나 보며 ‘방구석 바캉스’를 즐기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집 밖으로 나가기조차 싫은 게으름뱅이를 위한 영화 속 여행 추천 코스.
어시스턴트 없이 가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의 실스 마리아
배우 마리아 엔더스(쥘리에트 비노슈)는 자신을 톱스타로 만들어준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 리메이크를 위해 대본 연습을 하러 스위스 실스 마리아(Sils Maria) 지역으로 떠난다. 뭐든 시킬 수 있는 어시스턴트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을 데리고. 마리아 엔더스가 발렌틴과 함께 하이킹하는 곳, 산 중간중간 계곡과 호수가 아름답게 펼쳐지는 그곳은 실제로 스위스에 위치한 실스 마리아로 니체, 괴테, 토마스 만, 장 콕토 등 글 깨나 썼던 사람들이 모두 사랑했던 지역이다. 관광객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고독을 느끼기에 더없이 충분한 곳, 자신의 보기 싫은 내면까지 다 마주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일까. 영화 속에서 어시스턴트 발렌틴은 마리아 엔더스에게 질렸는지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물론 그 곳에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산을 뱀처럼 휘감고 도는 신비로운 ‘말로야 스네이크’ 구름 같은 건 없다. 참고로, 어시스턴트 없이 예약을 직접 다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 말해두자면 영화 속에서 그들이 묵는 ‘작고한 작가 빌헬름 멜키오르의 집’은 스위스에 있지 않다. 거대한 바위산 지역, 이탈리아 돌로미테의 셀바(Selva)에 위치한 카사 알 몬테(Casa Al Monte)다.
제임스 본드와 세계 여행 <007 스펙터>의 오스트리아 죌덴
제임스 본드보다 세계 곳곳을 더 많이 누빈 영웅도 없을 것이다. ‘제임스 본드와 세계 여행’이란 제목으로 여행책 한 권 내도 될 정도다. 물론 항상 쫓기고 구르고 얻어터지는 바람에 마음 편히 여행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는 <007 스펙터>에서도 로마, 탕 헤르, 멕시코시티 등으로 출장 갔다. 특히 그중 설산을 배경으로 아웃도어 의류 CF를 찍는 듯한 장면들 기억날 거다. 영화에서는 제임스 본드가 미스터 화이트의 딸인 매들린 스완 박사(레아 세이두)를 찾으러 간다는 내용으로, 그곳은 바로 오스트리아의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죌덴 지역이다. 매들린 스완이 일하는 정신병원, 즉 유리로 뒤덮인 그 모던한 건물은 실제로는 건축가 요한 오베르모저가 지은 레스토랑 ‘아이스 큐(Ice Q)’다. 가이슬라흐코글 산 정상에 위치, 무려 해발 3048미터에 있어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끝내주게 맛있는 알프스 퀴진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데 제임스 본드는 악당들과 싸우느라 빵 한 조각 얻어먹지 못했다. 역시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다. 우린 두 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느긋하게 그의 활약을 지 켜보면 되겠다.
지구 밖으로 나가고 싶다면 <마션>의 요르단 와디 럼 사막
어차피 방구석에 있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데 지구 안에서만 여행하는 건 좀 시시한 일이다. 스케일을 넓혀 지구 밖으로 나가는 체험을 하고 싶다면 영화 <마션>이 제격이다. <마션>에서 화성이라고 속인 그 븕은 땅은 요르단 남부의 와디 럼(Wadi Rum) 사막으로, ‘달의 골짜기’란 뜻처럼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곳이다. ‘지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느낌’, ‘밤새 쏟아지는 별 밑에서 자연 그 자체를 받아 들이는 경험’ 등 와디 럼을 설명하는 문구들은 당장 항공권 예매 사이트에 접속하게 할 만큼 꽤 유혹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막상 가면 땡볕에 땀을 뻘뻘 흘려야 하는 등 <마션>의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보다 더 힘들 거다. 가는 방법도 엄청 복잡하다. 아카바 근처 매표소에서 베드윈 마을까지 차를 타고 간 다음, 개조한 픽업 트럭이나 낙타 중 하나를 이동수단으로 택해 와디 럼 사막까지 가야 한다. 그러니 남이 기른 감자로 남이 만든 감자튀김이나 먹으며 맷 데이먼의 감자 재배기를 보는 게 속 편할지도 모른다. 마음에 든다면 내친김에 이곳에서 촬영한 옛날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도 보든지.
폐허가 된 도시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의 디트로이트
아름다운 야자수, 에메랄드빛 바다, 부드러운 모래 사장…. 아무리 생각해도 식상하기 그지없다. 바캉스라고 해서 꼭 천혜의 자연 환경을 자랑하는 휴양지에만 가야 하는 건 아니다. 뻔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쇠락한 도시 디트로이트를 소개한다. 알다시피 디트로이트는 시의 기반이었던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면서 21조원의 부채와 함께 파산을 신청 했고, 그 후 폐허가 됐다. 감독 짐 자무시는 “영화 속 로케이션은 캐릭터만큼이나 중요하다”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답게 선글라스를 낀 스타일리시한 뱀파이어 아담(톰 히들스턴)이 사는 도시로 우중충 하고 으스스한 디트로이트를 설정했다. 덕분에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세상의 종말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아담이 사는 집도 전통적인 브러시 파크 동네에 있는 135년 된 휘트니 맨션으로, 벽지며 계단이며 모든 게 낡아빠져 있다. 아담은 사랑하는 여자 이브(틸다 스윈턴)가 디트로이트로 찾아오자 뱀파이어답게 밤 드라이브 데이트를 하며 시내 구경을 시켜준다. 그들은 세금을 못내 망한 패커드 자동차 공장도 지나가고 언제 화려한 극장이었냐는 듯 그로테스크한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미시건 시어터도 방문한다. 유령의 집 같은 휘트니 맨션은 영화 촬영 후 수리를 해 지금은 에어비앤비 사이트에서 여행자를 받고 있다. 겁 없는 사람들을 위해 주소를 적어두자면 82 알프레드 스트리트다.
자정 전에는 도착할까 <비포 미드나잇>의 그리스 카르다밀리
〈비포 선라이즈〉의 비엔나와 〈비포 선 셋〉의 파리를 가봤자 똑똑하고 유머러스하고 다정하고 잘생긴 제시(에단 호크) 같은 남자를 만날 일은, 해가 뜨거나 지지 않는 날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 잘 알 거다. <비포 미드나잇> 의 촬영지 그리스라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문제도 많고 평생을 바둥대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속을 썩이는” 제시야 뭐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비포 미드나잇>은 사랑과 여행에 대해 우리 가 갖고 있던 낭만을 완전히 깨뜨렸다는 점에서 ‘비포 3부작’ 중 가장 끔찍한 영화지만 신선하고 낯선 여행지를 소개했다는 점에서 그나마 미덕을 찾을 수 있는 영화다. 영화 내내 티격태격하던 제시와 셀린(줄리 델피)이 밤 늦게 해변가의 카페에 가서 철써덕거리는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지난 20년간의 여정을 ‘갑자기’ 마무리하는 장면 기억나나? 거기가 바로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 카르다밀리(Kardamili)다. 영화 속 그 장소는 카르다밀리 피어(Kardamili Pier)고. 영화와 현실이 다르듯이, 실제로 그들은 밤 12시가 되기 전에 그 장면을 마무리하진 못했고 동 트기 직전까지 찍었다고 한다.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카르다밀리는 아테네에서 차로 3시간 30분 정도 가면 된다. 물론 그냥 집에 있다면 그 시간에 ‘비포’ 시리즈 두 편을 볼 수 있다.
극한 직업, 극한 체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캐나다 캘거리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보면 배우 역시 ‘극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감독이,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서라면 영하 30도의 강추위에 물속 촬영을 강행하고 눈 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공중에서 폭발물까지 떨어뜨리는 미친놈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라면 더더욱. 영화 속 배경은 1823년 몬타나와 사우스다코타 지역으로, 촬영은 주로 캐나다 앨버타 주의 캘거리에서 했다. 휴 글래스(레오 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오로지 복수심 하나로 눈 쌓인 계곡을 힘들게 걸어가는 장면은 캐내내스키스 군(Kananaskis Country)에서 촬영한 거고, 존 피츠제럴드(톰 하디)가 별똥 별을 볼 때 등장하는 기이하고 뒤틀린 모양새의 협곡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자연 절경 1001’ 중 하나라는 드럼헬러 배드랜드(Drumheller Badlands)다. 무엇보다 가장 궁금한 장소는 아마도 휴 글래스가 곰과 사투를 벌이는 곳일 거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들으면 열 좀 받을 텐데, 평소에는 록 페스티벌이 열리고 캠핑장으로 사용되는 브리티시컬 럼비아 주 스쿼미시 밸리(Squamish Valley)에서 촬영했다. 미국과 아르헨티나에서도 촬영한 이유는 눈이 녹은 캐나다에서 벗어나 더 힘들고 거친 환경에서 찍기 위해서였다. 배우가 아니라서 좋은 점은, 저 혹독한 과정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집에서 파자마 차림으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즐길 수 있다는 것 아닐까?
늙고 피곤에 찌든 이들을 위한, <유스>의 스위스 호텔
나이 들어서 좋은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영화 <유스>에 나온 스위스 요양 호텔에 갈 수만 있다면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든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할머니가 되기 전에 서둘러 다녀올 수 있는 곳이지만, 이 글을 읽는 게으름뱅이들은 꿈쩍도 안 할 걸 알기에 친절하게 거기가 어떤 곳인지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늙은 지휘자 프레드 밸린저(마이클 케인)가 휴가를 보내러와 아무것도 안 하고 어슬렁거리는 곳, 늙은 영화감독 믹 보일(하비 케이틀)이 젊은 스태프들과 시나리오를 쓰다가 스파 받으러 가는 그곳은 스위스 동부의 산악 휴양 도시 플림스에 있는 ‘발트하우스 플림스 마운틴 리조트 앤 스파(Waldhaus Flims Mountain Resort & Spa)’다. 늙은이들은 외우기도 힘든 이 긴 이름의 호텔은 무려 1877년에 지어졌다. 이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에서 마사지, 산책, 수영을 하며 시간을 하릴없이 보낼 수 있다면 하비 케이틀 의 “경솔함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지”와 같은 명언쯤은 수십 개도 생각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마이클 케인과 하비 케이틀이 무선 인터넷을 사용해 연예 뉴스를 검색하는 장면은 안 나오지만 어쨌든 무선 인터넷도 되는 곳임을 밝혀둔다.
- 프리랜스 에디터
- 나지언
- PHOTOS
- GETTYIMAGE/IMAZINS, COURTESY OF MELITSINA VILLAGE HOT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