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와 젝스키스 이후 20여 년, 사람으로 치면 성인이 된 아이돌 산업은 그동안 쌓아온 규칙들을 무너뜨리고 새로 쌓는 중이다. 여전히 성장을 멈추지 않으며.
2016년에도 여전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이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리라 기대한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세상이 온통 아이돌뿐이라며 습관처럼 내뱉는 투정도 이제는 지난 세기의 유행처럼 느껴진다. 물론 지금의 안정이 마냥 순탄하게만 자리 잡은 건 아니다. 아이돌이 작은 자극에도 쉽게 달아오르는 청소년이나 열혈 팬덤만이 향유하는 소수 문화라는 인식을 부분적으로 깨는 데까지, HOT 데뷔 이후 꼬박 20년이 걸렸다. 전보다야 사정이 나아졌지만, ‘위기의 아이돌 산업’, ‘올해가 끝물’이라는 악담 아닌 악담 역시 매해 반복된다. 한국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위태한 현실을 생각하면, 아이돌 산업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해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도 끝없는 응원과 사랑을 보내는 팬들이 곁에 있었고, 의도치 않은 ‘한류 붐’이 가져온 힘도 쏠쏠했다. 하지만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는 법. ‘강남 스타일’이 촉발시킨 ‘케이팝’ 네임태그가 나부끼기 시작한지도 벌써 4년 전. 강 상류의 거친 조류에 정신없이 휘둘리나 싶던 아이돌 신은 어느새 중류를 지나 느슨한 하류의 흐름에 다다르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놀라운 현실은 변함이 없지만, 벼락과도 같았던 기세가 사라진 순간 함께 꺼지고 말 화양연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신 안팎에 늘 존재했다. 그런 두려움에 맞선 오랜 고민 때문인지, 아니면 위기의 순간 기적적으로 빛나는 생의 의지 때문인지는 알 수 없 지만, 올해 갓 성년을 맞이한 한국의 아이돌 신은 지금 조용히, 하지만 지난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변화해가고 있다.
아이돌 산업을 둘러싼 안팎의 다양한 이슈 가운데, 현재 가장 격렬한 지형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은 ‘그룹’에 대한 정의다. 복수의 멤버가 한날 한시 데뷔해 수명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흥망성쇠를 함께한다는 ‘아이돌 그룹’의 운명 공동체적 논의는 이제 점차 희미해지는 추세다. SM엔터테인먼트의 신인 보이 그룹 NCT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Neo Culture Technology’의 줄임말로 2016년 SM이 내놓은 야심찬 주력 상품인 이들에게는 ‘그룹’보다는 ‘프로젝트’라는 말이 어울린다. NCT에는 수 개 또는 수십 개의 유닛(Unit)이 모여 하나가 되는 일종의 공동 커뮤니티고, 따라서 정해진 멤버 숫자가 없다. 전 세계 곳곳에 위치한 도시를 베이스로 움직이는 개별 유닛 역시 멤버의 탈퇴와 영입이 자유롭다. ‘우리는 하나’라는 도식 아래 멤버 간의 유대와 화학 작용, 관계성을 기반으로 한 코어 팬덤 형성에 온 힘을 기울인 기존의 아이돌 신 공식을 뿌리째 뒤흔 든, 그야말로 혁명에 가까운 사고의 전환이었다.
걸그룹 신은 이 혁신적인 흐름을 조금 더 부드럽게 소화하는 중이다. ‘나의 소녀에게 투표하세요’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연초 연예계를 뜨겁게 달군 화제의 오디션 프로그램 엠넷 <프로 듀스 101>을 통해 탄생한 그룹 IOI나, 역시 엠넷을 통해 방영된 신인 걸그룹 데뷔 프로젝트 <식스틴>의 트와이스가 좋은 예다. 단순한 팬을 넘어 일반 대중조차 자신들의 취향과 입맛에 따라 멤버를 선택할 수도, 바꿀 수도 있다. 한 그룹의 멤버 구성과 그에 따르는 세계관은 이제 단순한 사장님의 취향이나 절대로 깰 수 없는 불문율의 영역에 놓여 있지 않다.
이러한 그룹 서사의 급격한 변화 양상은 무한함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얻었지만, 그와 동시에 충성도 높은 팬덤 형성의 어려움을 노출했다. 언제 어떻게 형태를 바꿀지 모르는 그룹에 헌신적인 애정을 쏟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므로. 이러한 약점은 현재 각 아이돌 기획사들의 꼼꼼한 ‘기획력’으로 채워가고 있다. 최근 수년간 연이은 멤버 이탈로 고통을 겪은 소녀시대, 엑소, f(x) 등의 그룹이 위기를 기회로 바꾼 건 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밀하게 준비된 기획력 덕분이었다. 사람으로 인해 무너진 세계관이 또다시 사람의 힘으로 훌륭히 보수되어가는 것을 지켜본 제작자들이 꺼내든 건 ‘아이돌 시즌제’ 카드다. 일명 ‘3부작’ 시리즈의 유행이 바로 그것이다. 작게는 하나의 노래, 크게는 하나의 그룹 안에서 어떻게든 완성된 서사를 구축하려 애쓰던 이들은 이제 하나의 ‘테마’를 중심에 둔 세계관의 형성 에 전력을 투구하고 있다. 확장된 형세만큼 정교해진 이 새로운 세계관 구축법을 가장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이들은 ‘학교 3부 작’과 ‘청춘 2부작’으로 2015년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여자친구와 방탄소년단이다. 입학-방학-졸업이라는 세 가지의 키워드 를 ‘유리구슬’, ‘오늘부터 우리는’, ‘시간을 달려서’로 각각 풀어 내며 데뷔 1년 만에 독보적인 신인 걸그룹으로 성장한 것이 여자친구라면, 방탄소년단은 두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성공을 이끌 어낸 케이스다. 2013년 데뷔 시절부터 10대들의 꿈과 행복, 사랑을 노래한 ‘학교 3부작’으로 시즌제 도입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이들은 ‘화양연화’라는 부제가 붙은 ‘청춘 2부작’을 통해 비로소 ‘터졌다’. Part 1•2,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로 구성된 이들의 ‘청춘’은 그 시기만이 겪을 수 있는 아픔과 좌절, 고통과 번뇌를 세련된 팝 사운드에 녹여내며 아이돌로 그려낼 수 있는 다양한 청춘 담론을 이끌어냈다. 이 거센 흐름은 빅스, 러블리즈, 세븐틴 등 수많은 ‘3부작 후배’를 낳으며 계속해서 심화, 발전 중이다.
변화의 시선을 좀 더 내부로 옮겨보자. 눈부신 기획력에도 채 가려지지 않은 빛을 내뿜는 출중한 싱어송라이터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샤이니의 종현이나 씨엔블루의 정용화의 경우, 각각 훌륭한 솔로 앨범을 내놓으며 보컬리스트로서는 물론 솔, R&B, 록 팝 등 각자의 개성을 살린 장르 안에서도 큰 잠재력을 드러내며 국내외 음악 팬의 호응을 이끌었다. 화제의 그룹 IOI 의 ‘같은 곳에서’를 히트시키며 작곡가로서의 역량은 물론, 모 그룹 B1A4를 통해 발표한 자작곡들의 가치를 다시 한번 인정 받고 있는 진영의 이름도 놓치기 아쉽다. 단순히 곡을 만들고 부르는 것을 넘어 무대 위의 퍼포먼스까지 하나의 그룹이 창작 해낼 수 있는 모든 영역에 손대고 있는 것으로 명성 높은 ‘자체 제작돌’ 세븐틴의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운과 팬들의 사랑에만 목매지 않는, 안팎으로 조여드는 생존을 위협하는 변화에 몸을 맡기고 있는 아이돌 신은 오늘도 격변의 소용돌이 그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 에디터
- 황선우
- 글
-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 일러스트
- 허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