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컬렉션이 열린 한 달여간 wkorea.com에서 국내 유일하게 매일 런웨이 컷과 디자이너 영상을 묶어 쇼 리뷰를 담았다. 그중 베스트만을 추려 소개한다.
NEW YORK |
이토록 아름다운 마녀들 Marc Jacobs
천재의 귀환을 환영한다! 마크 제이콥스라는 이름이 패션계에서 갖는 위치는 대단하다. 볼펜 하나에 ‘Marc Jacobs’라고만 찍어도 소녀들 사이에서 완판되는 시절이 있었을 정도니까. 뉴욕 패션위크를 통해 걸출한 신인들이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마크 제이콥스가 ‘나이 든’ 레이블로 향하지 않느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이번 컬렉션은 그가 왜 ‘뉴욕의 본좌’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고딕 무드의 헤어와 메이크업을 하고 30cm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플랫폼 부츠를 신은 모델들은 대부분 검정 일색의 룩으로 마녀들처럼 무대를 누볐다. 굉장히 콘셉추얼한 스타일링이지만 자세히 보면 풍성한 풀 스커트, 커다란 리본으로 장식한 코트, 밴드 프린트의 니트와 스웨트셔츠 등 데이웨어로 응용할 만한 아이템도 가득했다.
거침없는 ‘순례’ Hood by Air
LVMH 프라이즈를 수상한 이후, 셰인 올리버의 고급스러운 스트리트 웨어 브랜드 후드 바이 에어는 빠른 속도로 팬덤을 형성하며 패션의 메인스트림으로 부상했다. ‘순례(Pilgrimage)’라고 이름 붙인 이번 컬렉션에서 올리버는 남녀 모델 모두에게 페이턴트 부츠를 신기고, 스니커에 여행용 짐 표를 붙이거나 트렁크 덮개를 닮은 윈드 브레이커, 구명 재킷을 연상시키는 퍼프 코트(러시아 출신의 LGBT 아티스트 슬라바 모구틴이 입고 런웨이에 올라 화제였다) 등으로 자신만의 ‘순례’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해체, 재조합, 재활용 Thom Browne
해체, 재조합, 재활용, 그렇게 새로운 이미지 만들기. 신선한 테일러링의 대가 톰 브라운은 전통적인 슈트의 패턴을 뜯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재조합하는 컬렉션을 선보였다. 얇은 실크로 만든 재킷은 블라우스가 되어 이너웨어로 쓰였고, 라펠을 떼낸 재킷은 미디 길이의 펜슬 스커트로, 베스트의 패턴은 그대로 드레스가 되기도 했다. 톰 브라운의 드라마틱한 상상력은 언제나 미디어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뜨거운 호응을 낳는데, 이번 컬렉션은 그중에서도 가장 아방가르드한 시즌으로 기억될 것이다. 넥타이를 변형해 만든 헤어피스와 톰 브라운의 시그너처인 삼색 선이 들어간 슈즈와 가방 등 액세서리 포인트는 쇼핑 리스트로 탐낼 만한 아이템!
미스터리하고 은밀한 세계 Altuzarra
디자이너 조셉 알투자라가 그린 이번 가을은 짐 자무시의 영화, <온리 러버스 레프트 얼라이브(Only Lovers Left Alive)>에서 영감을 받아 펼치는 미스터리하고도 은밀한 세계다. 알투자라의 장기인 테일러링과 시그너처인 펜슬 스커트가 여전히 포함된 가운데, 그래픽 프린트와 리치한 벨벳을 사용했고 여기에 세계적인 트렌드인 애슬레저 스타일을 가미해 고급스럽고 스포티한 아메리칸 유틸리티 웨어를 창조해냈다.
MILAN |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지? Dolce & Gabbana
돌체&가바나의 가을/겨울 쇼에는 서양 동화에서 떠올릴 수 있는 ‘공주 룩’이 총출동했다. 화려한 장식이 붙은 파이핑 테일러링 재킷과 블루머 팬츠는 딱 프린스 차밍의 복장이며, 푸른 미디 길이 드레스는 신데렐라, 검은색 레이스 베일 드레스는 공주를 괴롭히는 계모에게 어울릴 법한 의상이다. 그렇다고 이 옷들이 그저 연극이나 뮤지컬에서나 보는 ‘코스튬’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장난감 병정이 패치된 스웨터나 밀리터리 스타일의 빨간 라펠 코트는 데님과 함께 데이웨어로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하니까. 돌체&가바나가 패션 디자이너이며 동시에 대단한 스토리텔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컬렉션이었다.
주의 : 패션은 몸에 해로울 수 있음 Moschino
제레미 스콧은 쇼를 앞두고 이번 컬렉션의 영감을 <허영의 불꽃(Bonfire of the Vanities)>에서 받았다고 밝혔다. 그에 걸맞게 모스키노의 가을 컬렉션에는 장난스러운 패션 농담들은 쏙 빠져 있었다(곰도, 바비 인형도, 자동차 세척제도 없었으니까!). 가죽 바이커 재킷을 변형한 뷔스티에와 컬러풀한 새틴 루슈 드레스, 데님을 변형해 만든 드레스들은 하우스 설립자, 프랭크 모스키노의 아카이브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 작품들이다. 물론 이것이 끝은 아니다. 후반부의 불에 탄 드레스, 그리고 샹들리에 드레스가 나타난 순간 모두가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남다른 조합으로 패션 선구자가 되다 Gucci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구찌에 합류하면서 현대 패션의 지형도는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출처가 모호한 인스피레이션들이 하나의 룩 안에서 충돌하지만 그 조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레이어링이란 단순히 옷을 겹쳐 입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믹스라는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미켈레는 스트리트 스타일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70년대, 여기에 약간의 80년대까지 섞어 넣되,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예술이 응집된 디테일은 르네상스 시대, 빈티지한 색감과 실루엣의 조화는 70년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섞였어도 여전히 미켈레의 시그너처인 너드 스타일의 소녀들이 튀어나오는 데에서 그 의도를 알아챌 수 있다.
다면적이고 아름다운 Prada
지적인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번 컬렉션이 여성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다면성을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다. 그 말대로 한 가지 룩에서 여러 가지 요소가 충돌하는 양상이 펼쳐졌고 물론 프라다답게 그 모양새는 매우 아름답다. 밀리터리 느낌의 코트 밖으로 코르셋을 묶고, 아가일 무늬 양말을 허벅지까지 올려 신은 후 주얼리에 가까운 마이크로 미니 백으로 온몸을 치장한 프라다의 아가씨들은 연약하면서도 강인해 보이고, 터프하면서도 섹시해 보였다. 여기에 지난 1월 남성복 쇼에서 선보인 흰색 세일러 모자와 아티스트 크리스토프 체민과 협업한 프린트가 등장해 컬렉션 사이의 연속성을 더욱 강조하기도 했다.
PARIS |
생로랑, 너무나도 생로랑 Saint Laurent
그간 에디 슬리먼이 내놓은 컬렉션들은 ‘생로랑’이든 그렇지 않든,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창시자 이브 생 로랑이 열었던 우아한 쿠튀르 패션쇼 형식을 그대로 가져왔다. 극적인 조명이나 음악 하나도 없이, 모델들은 장내 내레이터가 룩 번호를 호명하는 순서에 따라 호텔 파티큘리에의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80년대에 이브 생 로랑이 사랑한 날개 같은 어깨의 드레스, 르 스모킹 턱시도는 물론이고 전설의 하트 모티프는 커다란 모피 외투가 되어 피날레를 장식했다. 슬리먼다우면서도 생로랑에 걸맞은 컬렉션은 바로 이것이었다.
현대 무용가의 초상 Valentino
이번 파리 컬렉션의 향방이 ‘판타지’보다는 ‘현실’ ‘일상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에 발렌티노 역시 힘을 실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와 피에르파올로 피촐리 듀오는 모던 발레의 대가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부드럽고 나른한 룩을 제시했다. 드레스 위에 스웨터를 레이어링하거나, 루스한 타이츠를 신고 튤 스커트를 입은 모습은 댄서들의 연습복 같은 인상을 주었고, 누드 드레스와 주얼 장식을 더한 이브닝 시리즈는 무대 위의 코스튬에 가까웠다. 드레스 위에 겹쳐 입은 몇 벌의 코트를 제외하고는 F/W 느낌이 거의 들지 않기도 했지만, 시즌 개념이 의미를 잃은 요즘엔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잔혹한 로맨티시즘 Givenchy
하우스에서의 10주년을 맞아 지난 시즌 뉴욕으로 향한 리카르도 티시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자신의 어둡고 잔혹한 미학을 펼쳐 보였다. 지난 시즌에 선보인 란제리와 테일러링을 바탕으로 한 로맨티시즘과 간결함은 여전히 살아 있으면서도 이집트 스타일의 이그조틱한 악센트를 넣어 공들인 장식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한 지방시 초기에 티시가 자주 탐구한 밀리터리 스타일의 재킷과 코트도 선보였다.
발렌시아가를 입은 베트멍 Balenciaga
파리뿐만 아니라 패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쇼를 기다렸을 것이다. 바로 패션계의 가장 뜨거운 이름, 베트멍의 뎀나 바잘리아의 발렌시아가 데뷔 컬렉션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한마디로 말하면 베트멍 70%에 발렌시아가 양념을 30% 정도 넣은 듯한 컬렉션이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아카이브를 탐구해 코쿤 실루엣이나 허리에서 엉덩이가 봉긋하게 올라오는 조형적인 형태감에 집중했는데, 그 외에는 베트멍에서 익숙하게 봤던 90년대식 젊음을 조금 우아한 버전으로 풀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특정한 룩 하나보다는 셔츠를 한쪽으로 빼놓거나, 피코트의 버튼을 내려 어깨를 드러내게 입는 ‘스타일링’ 방식으로 브랜드의 DNA를 강조하는 신세대, 뎀나 바잘리아의 다음 발렌시아가 컬렉션은 그래서 점치기가 더욱 어렵고, 어려운 만큼 호기심과 기대도 커진다.
LONDON |
이것이 샤넬 클래스다 Chanel
파리 패션위크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시점, 대미를 장식하는 샤넬의 선택은 무엇을 향했을까? 놀랍게도 칼 라거펠트의 선택은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패션쇼 본연의 런웨이였다. 여기에 초대된 모든 사람을 ‘프런트로’에 앉도록 객석을 배치해 90여 벌에 달하는 옷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샤넬의 익숙한 트위드 스커트 슈트들을 위시한 데이웨어들은 기교보다는 일상성에 충실했고, 러플과 티어드 레이스를 이용한 드레스 시리즈는 2016년을 살아가는 현실의 아가씨들이 탐낼 만한 옷이다. 여러 소재로 종아리를 감싸는 라이딩 부츠와 풍성한 진주 목걸이, 벨트처럼 스타일링한 미니 사이즈의 보이백 등 액세서리의 매력도 샤넬다웠다.
현실과 꿈의 아름다운 충돌 Alexander McQueen
오랜 기간 파리에서 쇼를 열어오던 알렉산더 매퀸이 고향인 런던으로 귀환한다는 것은 이번 런던 패션위크 최대의 화제였다. 매퀸의 디렉터 사라 버튼은 출산 예정일을 2주 앞둔 만삭의 몸으로 쇼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일장춘몽 같은 멋진 컬렉션을 펼쳐 보였다. 매퀸 특유의 영국식 테일러링과 오트 쿠튀르에 가까운 섬세한 핸드 크래프트 장식이 어우러져 이 의상을 입은 여성이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착각할 정도였다.
위대한 영국 뮤지션을 패션으로 추모하다 Burberry Prorsum
브랜드 그 자체로 영국의 위대한 유산인 버버리는 역시 영국을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지난 1월 타계한 데이비드 보위를 추모하는 컬렉션을 펼쳤다. 70년대 글램록 모티프와 밀리터리 스타일의 테일러링, 보헤미안과 영국식 귀족주의가 묘하게 뒤섞인 듯한 느낌이지만 입는 방법, 즉 스타일링의 배치가 훨씬 젊고 쿨한 방식인 점이 눈에 띄었다. 스냅챗으로 생중계를 하거나 애플과 파트너십을 맺어 쇼에 보여진 의상을 바로 구입하게 할 수 있는 버버리만의 디지털 친화적 정책은 진화하는 패션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힌트가 될 것이다.
로베르토 카푸치를 오마주하다 J.W. Anderson
트렌드가 정신없이 회전하는 소용돌이 한가운데서도, 명민하고 젊은 디자이너는 매출을 올리는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는 듯하다. J.W. 앤더슨은 건축과 패션을 접목시킨 전설적인 쿠튀리에 로베르토 카푸치를 오마주하는 듯한 실루엣을 선보였다. 유선형의 스커트 헴라인, 굽이치는 러플과 셔링 등 현대적 요소를 활용한 60년대풍 옷을 입은 모델들이 걸어 나왔으며, 피어싱 장식을 가미한 뉴 백, 동그란 메탈 힐의 슈즈 또한 마음을 흔들 것이 분명해 보였다.
- 패션 디렉터
- 최유경
- 디지털 에디터
- 임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