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느끼고, 똑바로 마주하고, 그것의 실체를 확인하고 나아간 다음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 변요한에게 연기란 좀처럼손에 잡히지 않지만 영원히 꺼지지도 않는 불빛이다.
지방에 내려가 사극을 촬영하며 지내는 요즘의 근황을 묻자 변요한에게서 뜻밖에도 ‘로맨틱’이라는 단어가 돌아왔다.
익숙한 시공간으로부터 멀어지니 보고 싶은 사람들, 그리운 것이 많아졌다며. “오늘은 꼭 힐링하는 것 같네요. 이렇게 오랜만에 서울에 와서 촬영하고 인터뷰하니 말이죠.” 마침 저녁으로 시킨 피자를 집어들며 휴가 나온 군인처럼 말하는 변요한의 얼굴은 〈육룡이 나르샤>를 찍고 있는 몇 달째 수염이 자라고, 까칠하게 그을려 있었다. 분장 시간을 줄여준다는 장점 말고도, 자기 수염을 기른다는 건 다른 마음가짐을 준다고 그는 말했다. “할머니가 도둑놈 같다며 밀면 안 되느냐 하세요. 그래도 화보를 찍을 때 멋진 의상을 입으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뭔가가 나오잖아요. 이렇게 수염을 기르고서 계속 칼을 쥐고 선크림도 안 바른 채 뛰어다니다 보면 내 자세가 뭔가 바뀌는 것 같아요. 신경 쓰지 않고 툭 놓아버리는 부분이 분명 생기거든요.” 애석하게도 변요한은 곧 수염을 비롯한 온몸의 털을 깔끔하게 밀어낸 다음 노란 가발을 쓸 예정이다. 검을 휘두르는 무사에서, 퍼를 두르는 가수가 되어 뮤지컬 <헤드윅〉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서기 때문이다. 변요한은 작은 독립영화나, 시청률이 15%를 넘는 공중파 50부작 드라마, 관객의 눈앞에서 노래해야 하는 뮤지컬이 똑같이 자신에게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무엇을 믿고 어디에 의지하며 스스로가 앞으로 나아가는지에 대해서도.
대작 사극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건 달리기 중에서도 마라톤을 하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 무술 장면이 많아서 체력적으로도 만만치 않을 텐데 몸 상태는 어떤가?
그러잖아도 촬영하는 동안 신체 나이가 50은 된 것 같다고 농담을 했다. 그렇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가 은근히 즐기는 것 같기도 한데, 성장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어서다. 이걸 넘길 수 있을까 하다가 넘길 때의 짜릿함이 있다.
원래 스스로를 극한 상황에 놓는 걸 즐기나?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겁이 많은 편이라 50부작 드라마 도전을 마음먹었을 때는 힘들겠지, 내가 할 수 있을까, 쓰러지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을 많이 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지나면서 내가 가진 두려움을 구체적으로 대면할 수 있었다. 아, 내가 걱정한 게 바로 이런 상황이었구나 파악한 다음 그렇다면 이걸 한번 넘겨보자고 마 음먹는다. 생존 본능이 작동하는 것 같다.
드라마 시작 즈음의 인터뷰에서 “50부작이니까 분명 흔들리는 때가 올 거다”라고 이야기한 걸 봤다. 흔들리는 그 시기가 온 것 같나?
이미 넘은 것 같다. 처음 시작부터 흔들렸기 때문이다 (웃음). 하지만 그런 매 순간을 넘어서다 보니 단단하게 버티는 노하우도 생긴 것 같다.
그 노하우는 어떤 건가?
절대 혼자 가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이다. 예전에는 현장에서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과 친해지려는 내 자신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 내가 지금 친목을 하려는 건가, 인맥을 쌓으려는 건가 싶은 경계심이 들었다. 하지만 캐릭터는 배우 혼자만의 생각이나 힘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행히 배우, 스태프들이 다 좋은 분들이라 혼자 죽진 않겠구나 싶다. 두려움을 매 순간 직면하고 극복해야 하는 게 배우 같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늘 있기 때문에, 안전한 데만 머무르고 싶지 않다.
드라마 <미생> 이전에는 작은 규모의 독립영화를 주로 찍었다. 공중파 대작 드라마는 스케일이 다른 게임일 것 같은데.
별반 다를 게 없다. 나는 독립영화를 찍을 때도 큰 무대라고 느꼈고, 버거웠던 시기도 많았다. 물리적인 사이즈보다는 동료 배우들, 감독님과 스태프들의 간절함의 크기에 비례하는 무게감이 있다. 늘 겁먹었고, 한순간도 무섭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행히 내가 사람 복이 많아서, 만나는 선배님들이나 동료 배우들이 너무 좋았다. 사람들 덕분에 하나하나 배움의 연속이었다. 그런 경험치가 내게는 의미 있는 귀한 자산이다.
김영현 작가는 당신의 캐스팅에 대해 “진중하기도 하고 코믹하기도 한 이미지가 이방지와 잘 맞다”는 코멘트를 했는데 스스로는 어떤 면이 비슷하다고 느꼈나?
여동생이 있다는 거(웃음), 그리고 겁이 많다는 점도 나랑 비슷하다. 땅새는 두려움을 어떻게든 극복을 하고 소중한 뭔가를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나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
작가의 이야기처럼 양면성이 땅새의 중요한 특질이라면, 실제 당신 모습은 두 가지 중 어느 쪽에 더 가깝나?
둘 다 나다. 배우는 자기에게 존재하지 않는 모습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보고, 다양한 상황 속에서의 나의 모습을 관찰했다가 끄집어내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배우는 학위가 필요한 직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물 네 살에 뒤늦게 진학한 이유가 있나?
부모님께 가능성과 믿음을 드리고 싶었다. 학교를 다닌다고 연기가 엄청나게 는다거나 반드시 배우가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경쟁을 뚫고 어떤 울타리 안에 들어간 모습을 보여드려야 연기를 반대하신 부모님께 믿음을 드리지 않을까 했다. 세상의 시험 이전에 아버지의 시험을 통과하고 싶었다. 지나고 나니 아버지가 나에게 간절함을 계속 갖도록 훈련을 시킨 것 같다. 그렇게 허투루하지 않는 자세는 지금도 크게 작용한다. 학교에 다니면서 소속사를 찾아 바로 계약하지 말고 작은 인디 영화들을 찍으며 훈련하라는 것도 부모님의 의견이었다.
연극원에 가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뭔가?
연기 하는 사람들은 많이 외롭다. 고민, 외로움, 불확실함 같은 것을 늘 안고 가는데 학교 다닐 때가 그 시작이었다. 작은 신을 연습해서 발표하거나 친구들과 같이 무대에 올리는 공연 같은 걸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 여전히 기억난다. 진짜 힘들 때는 아무도 없는 빈 연습실에 들어갔다가 소리 한번 지르고 나오는 일도 있었다. 그런 울타리 속에서 비슷한 고민을 함께 나눈 동료들이 있었던 점도 감사하다. 학교는 내 마음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좌표 같은 곳이다. 물론 실제로도 연기의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이는 훈련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기초를 기억하려고 하고.
변요한의 움직이는 영상 화보는 2월 15일 모바일 매거진 2-2호에 공개됩니다.
위 링크에서 모바일 매거진을 다운받고, 푸시 알람을 기다려주세요!
- 에디터
- 김신
- 포토그래퍼
- 목정욱
- 모델
- 변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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