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를 투영한 옷을 만들어온 지성인이자 작가, 예술가인 소니아 리키엘. 이제 그녀의 신념과 철학을 이어 소니아 리키엘 하우스를 진두지휘하게 된 디자이너 줄리 드 리브랑과 나눈 이야기.
프랑스의 레종 도뇌르 훈장과 패션 그룹 인터내셔널의 ‘오스카’ 상을 포함해, 소니아 리키엘이 받은 수많은 영예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건 무엇일까? 아마도 카페 드 플로르의 메뉴 ‘클럽 리키엘(Club Rykiel)’ 이 아닐까. 지성인과 예술가, 지역 주민과 여행자 모두가 즐겨 찾는 유서 깊은 이곳을 마치 참새처럼 자주 드나드는 이 패션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이 샌드위치는 독특하게도 빵이 없다. 최근까지도 그녀는 카페 2층에 위치한 L자 형태로 된 4인용 테이블에 자주 앉아 있곤 했다. 창백한 얼굴에 시커멓게 강조한 눈매 그리고 강렬한 붉은 머리칼과 검은색 드레스 차림으로. 트레이드마크인 붉은 머리를 두고서 친구이자 작가인 마렉 알테르(Marek Halter)는 이집트 여왕이자 최초의 여성 파라오였던 핫셉수트(Hatshepsut)에 비유한 바 있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테이블에는 줄리 드 리브랑(Julie de Libran)이 앉아 있다. 지난해 소니아 리키엘을 총괄 할 새로운 디렉터로 임명된 이 디자이너는 현재의 위치에 올라오기까지 지난 6년간 루이 비통에서 마크 제이 콥스의 오른팔 역할을 해왔다. 소니아 리키엘이 파리지엔의 이상적 스타일을 대표했듯이, 시대에 걸맞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글로벌 시티즌으로서의 현대적 여성상을 구체화하는 건 리브랑의 몫이다.
소니아 리키엘은 생제르망데프레 지역의 생페르 거리에서 40여 년을 살아왔고 약국, 골동품 가게 등이 사라 지고 이 자리에 고가의 이탈리아 핸드백과 최신 남성복을 파는 부티크가 들어서는 걸 지켜보았다. 반세기 전에 이미 그녀는 자신만의 패션 깃발을 이곳에 심어놓았다. 1968년 5월, 이 지역의 가장 화려한 거리 중 하나 인 그르넬 거리에 첫 상점을 오픈한 이후로 한때 국가 전체를 마비시킨 학생과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 때 일시적으로 폐쇄한 것을 제외하곤 거의 문을 닫은 적이 없었다. 당시 이 지역은 패션 부티크들이 아닌 소르본과 에콜 데 보자르의 본거지로 작가, 예술가, 철학자, 뮤지션, 영화 제작자가 모여드는 재즈 클럽, 와인 바, 갤러리, 극장, 서점 등이 즐비했다. 레프트 뱅크 특유의 쿨하면서도 무심한 분위기에 온갖 다양성이 녹아 들어 거리엔 골루아즈 담배의 뿌연 연기 속에 보헤미안 무드가 넘쳐흘렀다. 정식으로 패션을 공 부한 적이 없는 리키엘은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임부복을 찾지 못하자 직접 만들기 시작했고, 남편의 상점 로라(Laura)에서 옷을 판매했다. 1955년 딸 나탈리를 임신한 그녀가 만든 임부복은 당시 임산부들이 부풀어오른 복부를 가리는 통념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타이트한 보디와 유동적 으로 물결치는 스커트, 몸매를 한층 돋보이게 만드는 라인 등 리키엘의 디자인은 임산부가 아닌 여성들에게도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녀의 명성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준 건 트레이드 마크인 스웨터였다. 진동을 높게 디자인해 어깨를 더욱 좁아 보이게 만든 골지 스웨터는 몸통을 훨씬 날씬하게 연출하고 엉덩이 뼈를 살짝 스치기 때문에 비율 면에서도 다리를 한층 길어 보이 게 만든다. 즉각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이 스웨터를 두고서 영국 언론은 몸에 꽉 끼는 ‘푸어 보이 스웨터(Poor Boy Sweater)’라 평했고, 오드리 헵번은 색깔별로 옷을 사들였다. 이때부터 옷의 개념은 더욱 발전하기 시작해 그녀가 말한 ‘착용자가 입기 전까지는 형태가 없는 의복’이라 는 부정형의 변화하는 옷이 탄생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 소니아의 작업을 보면서 자란 나탈리 리키엘은 사업을 이어받은 후 하우스의 스타일을 ‘섹시하면서도 편안하다!(이 두 단어는 그 이전 엔 한 번도 결합된 적이 없었다)’라고 요약했다. 70년대 초반 리키엘은 파리에 이어 해외로 인지도를 넓혀갔고, 감각적이고 지적이며 섹시한 여성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녀의 옷은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대였고, 프랑수아즈 아르디, 브리지트 바르도, 카트린 드뇌브, 재클린 드 리브 백작부인, 클로드 퐁피두 등 충실한 고객층을 확보했다.
무엇보다도 소니아 리키엘은 ‘우아한 생각이 가장 섹시하다’고 여겼다. 흔히 디자이너의 프런트 로에는 파티 걸과 영화 스타들이 자리 잡는 반면, 리키엘의 관중은 굉장히 폭넓다. 배우(아누크 에메, 이자벨 위페르, 이자벨 아자니, 로렌 바콜)뿐만 아니라 뮤지션(게리 멀리건, 레너드 코언)과 정치인(리오넬 조스팽, 잭 랭) 그리고 작가와 철학자(베르나르-앙리 레비, 파스칼 브뤼크네르, 나탈리 사로트)에 이르기까지! 또한 파리의 아파트에는 다양한 분야의 저명한 인사와 사상가들이 모여든다. 검은색 카펫과 나직한 소파, 은 골동품류, 수많은 책으로 장식된 이곳엔 앤디 워홀이 직접 그린 리키엘의 초상화가 있고, 벽면엔 세자르상 포스터도 장식되어 있다. 상점의 윈도는 수시로 책으로 디스플레이되곤 했는데, 패션이나 사진에 관련된 커피테이블 북이 아닌 주로 소설, 자서전, 에세이집 등이다. 올해 1 월 파리의 주간 풍자 신문 <샤를리 에브도 (Charlie Hebdo)>가 테러를 당했을 때, 그녀는 윈도에 지난 호 신문들과 당시 희생된 두 저널리스트 장 카뷔(Jean Cabut)와 조르주 볼랭스키(Georges Wolinski) 의 글을 함께 진열했다. 리키엘 역시 소설과 동화책과 자서전을 비롯해 10여 권 이상의 책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자서전에는 패션과 삶을 돌아 보면서 그녀에게 좋은 출발점이 되어준 문장과 친구이자 편집자이자 에로틱 문학의 직설적인 작가로 도 알려진 레진 드포르주 (Regine Deforges)와 주고받 은 편지도 수록되어 있다. 또 2012년에는 파킨슨 병과의 오랜 싸움에 대한 생각을 기록한 책을 출간했다(리키엘은 더 이상 병 세를 숨길 수 없을 때까진 비밀로 남기고자 했다) .
오늘날 ‘최고의 혁신가인 디자이너가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아마 리키엘을 언급하진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대 디자이너를 앞서갔고 패션사를 바꿀 만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테크닉을 시도했다. 다트와 헴을 없애고 내외부가 없는 뒤집어진 옷을 만들었으며, 구조주의가 일본 아방가르드의 홀마크가 되기 이전인 70 년대에 이미 솔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코트 내부엔 스트랩을 달아(90년대에 헬무트 랭이 그러했듯이), 착용자들은 더울 때 옷을 벗어서 마치 백팩처럼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리키엘은 자신만의 본능과 원칙과 개성을 토대로 패션 제국을 구축했다. “우린 브랜드의 콘셉트나 전략에 대해 논의해본 적이 없어요.” 70년대와 80년대 리키엘 스타일의 광고 이미지를 전담한 포토그래퍼 도미니크 이세르만(Dominique Issermann)의 말이다. “대신에 우린 여성에 대해, 그리고 상상력과 아름다움과 파격성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어요. ”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을 총괄하는 드 리브랑의 경우에도 리키엘과 뿌리 깊은 유사성을 지닌다. 드 리브랑의 디자인은 편안한 미국적 실용성에 이탈리아의 장인 정신 그리고 주변 사람을 의식해 잘 차려입는 프랑스식 예의와 정중함의 개념을 혼합하고 있다. “프랑스인은 스스로를 돌보면서 예의를 갖추려 해요.” 드 리브랑이 말한다. “어느 정도 차려입지 않으면 남들 앞에 나서지 않는, 일종의 문화이고 교육인 셈이죠.” 드 리브랑은 어머니 역시 소니아 리키엘을 입어왔기에 “아카이브를 들여다보는 건 어린 시절 어머니 옷장 속을 탐험하는 것 같았다”고 털어놓는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캘리포니아주 랜초 산타페에서 자랐다. 프랑스인 부모가 아메리 칸 드림의 희망을 안고 이곳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프렌치 레스토랑과 비스트로를 열어 프랑스빵과 페이스트리를 팔았고, 어머닌 프랑스 앤티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했다. 파리를 여행할 때면 어머닌 반드시 소니아 리키엘의 숍에 들러 옷을 사곤 했는 데, 아버지가 리키엘을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로 꼽았던 탓도 있다. 70년대와 80년대 리키엘의 옷을 즐겨 입은 여성들은 남자들이 이러한 옷차림을 좋아한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리키엘은 스스로를 위해 옷을 입어요.” 드 리브랑이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남자들의 꿈을 위한 옷이기도 해요.” 리키엘의 디자인은 지나치게 노골적이거나 유혹적인 건 아니지만, 슬림한 실루엣이 몸매를 한층 돋보이게 만들고 여성스러움을 강조해준다. 캘리포니아의 하이 스쿨을 졸업한 후 드 리브랑은 밀라노 마랑고니에서 패션을 공부한 후 프라다에서 디자인 일을 시작했다. 프라다에선 셀레브리티와 직접 소통하면서 레드카펫용 드레스를 만들었고 여성을 위한 궁극의 드레스를 디 자인하는 일에서 행복을 느꼈다. 2008년에는 파리로 이동해 루이 비통에서 마크 제이콥스와 함 께 일했는데, 당시 소니아 리키엘 레이블은 심각한 격변기를 거치고 있었다. 2009년 리키엘이 은퇴한 이후로, 하우스는 몇 년간 자주 바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실험적인 작업으로 불안정 했다. 때마침 루이 비통과 결별한 제이콥스가 독자적인 라인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할 무렵, 드 리브랑은 리키엘을 총괄할 기회를 움켜쥐었다. 데뷔 컬렉션은 그녀가 좋아하는 우아한 점프수트의 행렬이었다.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팬츠의 편안한 애티튜드를 즐길 수 있어요. 앉거나 크게 움직이거나 빠르게 걷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니까요. 덜 단정해 보이지만, 전 이 점프 수트가 주는 파워를 사랑해요.” 또한 드 리브랑은 리키엘이 그다지 탐구하지 않았던 두 가지 소재인 데님과 가죽을 활용했고, 폭스와 밍크 퍼를 혼합해 카디건만큼이나 가벼운 양면 스웨터도 선 보였다.
70년대 리키엘이 부티크에서 격식을 갖추지 않은 자유로운 쇼를 선보였듯이, 드 리브랑의 데뷔 컬렉션 역시 리키엘 부티크에서 진행되었다. 모델 중에는 조지아 메이 재거와 리지 재거(엄마인 제리 홀은 리키엘이 가장 좋아한 모델이었다), 그리고 지지 하디드와 켄달 제너 등도 포함되었다. 이날 밤 일반적인 패션 파티 대신에 드 리브랑이 선택한 건 절친인 소피아 코폴라를 포함해 오직 여자들끼리만 카페 드 플로르 이층에서 디너로 자축하는 것이었다. 드 리브랑은 여성들의 얘기 에 귀 기울이고 그녀들이 원하는 바를 찾아내는 일을 즐긴다. 그녀들이 어떻게 살며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이 어떤지도 궁금해한다. 첫 무대에서 트레이드마크의 틀을 깨고 공개적인 혁신성을 주장하는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그녀는 여학생 클럽을 손에 넣었다. 비록 멤버십의 시대는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을지라도 시스터후드의 끈끈함은 계속되니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에 맞게 이 여성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것이 그녀의 몫이다. 수많은 젊은 디자이너들은 자신만의 하우스를 오픈할 야망을 갖고 있지만, 드 리브랑은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건 레이블을 꿈꾸진 않는다. 비록 디자인 스튜디오에 리키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그녀의 작업에서 바로미터가 되어주는 건 리키엘이다. “사람들이 ‘그래, 이게 리키엘이야!’라고 말한다면 내 역할을 아주 잘해낸 것일 테죠.” 드 리브랑이 말한다. “리키엘이 이뤄낸 것들을 정말로 존중하고 존경해요. 그렇지 않다면 이 일을 해낼 수 없을 거예요.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정진아
- 포토그래퍼
- Emma Summerton
- 글
- Holly Brub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