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드 히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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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평화와 사랑을 외치며 자연과 동화되어 살고자 했던 히피들의 메시지가 다채로운 스타일로 2015 S/S 런웨이에 피어올랐다. 꽃을 든 젊은이들의 저항과 그들이 보낸 뜨거운 여름이 이번 시즌 매혹적이고 동시대적인 스타일로 재탄생한 것.

2015 S/S 시즌 타미 힐피거의 쇼장은 1967년에 발표한 비틀스의 명반 <sgt, club=”” hearts=”” lonely=”” s=””> 앨범 재킷을 오마주한 뮤직 페스티벌 세트로 꾸며졌다. 알록달록한 데이지꽃으로 장식한 별 모양 무대와 금방이라도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나올 듯한 신나는 축제 분위기의 쇼장은 이번 시즌 트렌드의 정점에 오른 히피 무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단서와도 같았다. 암울한 격변의 시대 상황에서 목놓아 외친 ‘평화’와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줄 ‘사랑’ 그리고 ‘자유’를 향한 끝없는 갈망은 비틀스의 발군의 작품이라 칭송받는 <페퍼 상사> 곳곳에 녹아 있었고, 이는 곧 히피들이 지향하는 이상향이기도 했다.

시대를 초월해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고 여전히 패션계를 매료시키는 히피 문화, 그 세계는 도대체 무엇일까? 1960년
대 들어서도 지속된 냉전과 전쟁, 경제 불황, 인종차별 등으로 나타난 혼돈과 위선에 절망감을 느낀 젊은 세대는 폭력을 거부하고 평화와 사랑, 화합과 자유를 강조한 새로운 운동에서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고, 이는 자연주의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히피 문화를 배태했다. 머리카락과 수염을 기르고, 넝마와 홀치기 염색 옷, 꽃으로 몸을 장식하거나 때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히피들은 의식을 자유롭게 풀어줘 정신 해방으로 인도해준다고 믿은 마약 LSD에 심취했고, 환각제를 복용한 뒤 나타나는 일시적이고 강렬한 도취 상태는 극채색의 패션과 몽환적인 사이키델릭 음악 같은 예술 경향으로 이어졌다.

문화와 인종, 계급의 차이가 없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히피들에게 술과 마약, 음악과 춤은 소통의 도구에 불과했으며, 이를 즐기는 것은 축복이자 선물이라 생각했다. 이와 같은 반문화 공동체인 히피 문화는 1969년 ‘3일간의 평화와 음악’이라는 구호 아래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그 정점을 맞이하는데, 음악과 마약을 마음껏 즐기고 사랑과 자유로 넘쳐난 히피들만의 공화국이자 낙원이 사흘간 지상에 펼쳐졌다. 전설적인 축제로 기록된 우드스탁 페스티벌 기간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관련 시설도 열악했지만 3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운집했으며, 지미 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 내시 앤 영, 더 밴드, 그레이트풀 데드 등의 가수들과 모든 장르의 록 음악이 집결한 히피들의 낭만적인 놀이터이자 해방구였다.

이처럼 생명과 사랑을 모토로 한 히피들의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지지를 얻게 되면서 1969년에는 무려 42만 명이 히피 운동에 합류하게 됐다. 예술적 감수성이 최고치에 달했던 이 황금기의 문화유산은 대규모의 뮤직 페스티벌과 오가닉 라이프 그리고 보헤미안 패션 등 수많은 형태로 남아 있으며, 그들의 정신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진화해 계승되고 있다.

이번 시즌 1970년대로 시곗바늘을 돌린 패션계에는 자유와 평화를 향해 뜨겁게 끓어오른 히피들의 미적 정서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졌다. 히피 문화를 상징하는 꽃이 흐드러진 페전트 룩부터 자유로운 감성을 대변하는 로맨틱한 보헤미안 스타일, 록 페스티벌로 직행해야 할 것 같은 글램 룩, 민속적인 성향이 짙은 트라이벌 무드 그리고 동시대적 코드로 무장한 현대판 히피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표정의 히피들이 런웨이에 등장했다.

1. 히피 문화를 녹여낸 1968년도 영화 <원더월>의 여주인공 제인 버킨.

1. 히피 문화를 녹여낸 1968년도 영화 <원더월>의 여주인공 제인 버킨.

히피의 원천, 꽃
꽃은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고 평화롭고 비폭력적인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의미한다. 히피들은 공동체적 삶을 추구했고, 이들 사이에는 무한한 신뢰와 형제애가 존재했는데, 꽃이야말로 히피들의 이념을 상징하는 좋은 매개체였다. 이번 시즌 꽃은 히피 무드와 어우러지며 강렬하고 대담하게 런웨이에 피어났는데,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케이트 부시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셀린의 피비 파일로는 빈티지한 데이지 패턴을 담은 러플 드레스를 내보냈고, 발렌티노의 듀오는 고전적인 아라베스크 문양을 닮은 색색의 꽃이 가득한 티어드 맥시 드레스로 한 차례 꽃바람을 일으켰다. 한가로이 들판을 나뒹구는 자유로운 영혼을 그린 듯한 드리스 반 노튼은 바람에 흩날릴 것 같은 하늘하늘한 꽃무늬 시폰 가운으로 히피 트렌드를 고조시켰는가 하면 생로랑과 하우스 오브 홀랜드, 제레미 스콧 쇼에는 히피들의 트럭을 뒤덮고 있을 법한 키치하고 귀여운 꽃무늬 미니 드레스가 등장했다.

모던 히피
히피들이 보낸 1970년대의 뜨거운 여름은 이번 시즌 매혹적이고 동시대적 스타일로 런웨이에 부활했다. 사랑과 평화를 온몸으로 주장했던 대책 없는 이상주의 젊은이들은 한층 모던한 모습으로 변형됐다. 밑단의 올이 거칠게 풀린 셀린의 자줏빛 니트 드레스나 거친 패치워크 기법을 이용한 로에베의 스웨이드 드레스, 찰랑이는 맥시 드레스의 밑단을 연상시키는 풍성한 시폰 블라우스에 글래디에이터 슈즈를 매치한 끌로에, 쿨한 패치워크 룩을 보여준 데렉 램과 토가 등은 현대판 히피 룩으로 손색없는 스타일링을 제안했다.

1. 스웨이드 소재의 글래디에이터 샌들은 끌로에 제품. 2. 맥시 드레스에 글래디에이터 샌들을 매치한 아니타 팔렌버그.

1. 스웨이드 소재의 글래디에이터 샌들은 끌로에 제품. 2. 맥시 드레스에 글래디에이터 샌들을 매치한 아니타 팔렌버그.

보헤미안 로맨스

바람에 흩날리는 시폰 소재의 맥시 드레스야말로 히피 걸을 위한 최적의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즌 끌로에와 발렌티노, 로베르토 카발리와 알베르타 페레티 등 히피 여신을 뮤즈로 삼은 컬렉션에는 공기처럼 가벼운 시폰 드레스들이 아름답게 나부꼈는데, 이들은 머리에는 화관을 얹고 사랑스러운 시스루 드레스와 글래디에이터 슈즈 차림으로 노래를 부르던 인크레더블 스트링 밴드의 두 여인 로즈 심슨과 리커리시 매케치니나 포크록의 대모 조니 미첼, 세련된 히피 스타일의 젯셋족이었던 탈리사 게티, 롤링스톤즈의 연인 아니타 팔렌버그 같은 여인들이 환생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1.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슬로건으로 도배한 트럭 위에서 음악을 즐기는 히피 청년들. 2. 니트 베스트를 매치한 에스닉한 룩의 재니스 조플린. 3. 패치워크가 독특한 앵클부츠는 루이 비통 제품. 가격 미정. 4. 난초 모양의 헤어 액세서리는 펜디 제품. 가격 미정.

1.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슬로건으로 도배한 트럭 위에서 음악을 즐기는 히피 청년들. 2. 니트 베스트를 매치한 에스닉한 룩의 재니스 조플린. 3. 패치워크가 독특한 앵클부츠는 루이 비통 제품. 가격 미정. 4. 난초 모양의 헤어 액세서리는 펜디 제품. 가격 미정.

트라이벌 시크
프린지와 빛바랜 스웨이드 소재, 그리고 여러 가지 민속적인 문양의 천 조각이 이어진 패치워크와 손뜨개 같은 수공예 장식, 몽환적인 홀치기 기법 등은 모든 것에 초연한 듯 자유분방하고 낙관적인 히피들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국적이고 아이코닉한 요소다. 히피 패션에는 아프리카나 인디언풍의 에스닉 무드, 그런지한 스페인 집시 등 다채로운 스타일이 융화되어 있는데, 페이즐리 프린트에 나바호 패턴을 자연스럽게 녹인 에트로 컬렉션이나 히피를 상징하는 누더기 패치워크 기법을 이용해 세련된 보헤미안 룩을 완성한 프라다와 루이 비통,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오트 히피의 정점을 보여준 에밀리오 푸치와 로베르토 카발리에 이르기까지, 이번 시즌 패션계는 자유를 갈구한 히피들에 뜨거운 찬가를 보냈다.

1. 1969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히피 최대의 축제,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포스터.

1. 1969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히피 최대의 축제,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포스터.

페스티벌의 여신
히피와 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1967년 여름, 히피 커뮤니티의 중심이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한 ‘서머 오브 러브(Summer of Love)’는 아직까지 강력한 신화로 남아 있는 1969년의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밑거름이 되었는데, 이는 히피의 본질인 반전과 평화에 초점을 둔 음악 축제였다. 글램록 신의 그루피들을 그린 생로랑 쇼에는 재니스 조플린 식의 비즈 장식 가운과 크리스털을 패치워크 형식으로수놓은 미니 드레스가 강렬한 존재감을 뽐냈고,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의 쿨한 여자들을 뮤즈로 삼은 타미 힐피거 런웨이에는 반짝이는 스팽글 드레스와 군악대를 연상시키는 밀리터리 재킷-레전드로 기록된 케이트 모스의 록 페스티벌 룩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의 향연이 이어졌다.

히피라는 문화 현상은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강고한 시류에 반기를 던진 최후의 평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자유와 사랑을 온몸으로 외쳤다. 그러나 문란한 성생활과 환각제 남용을 시작으로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된 히피 운동은 각국 정부의 정책과 법규로 인해 크게 악화됐다. 하지만 그들이 향유한 미적 정서와 권위에 저항하는 정신은 이번 시즌 런웨이에서 풍요롭게 꽃피웠다. 니트 베스트와 치렁치렁한 원피스만으로도 충만했던 재니스 조플린, 서로의 예술적 온도를 높이며 맹렬하고 거침없는 사랑을 보여준 존 레넌과 오노 요코, 뜨겁게 끓어오르는 자유에 대한 갈구로 전 세계를 흔들어놓은 우드스탁 젊은이들에게서 볼 수 있듯 히피 패션에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배려와 공유심이라는 유토피아적 가치가 담겨 있다. 불온하고 어지러운 현시대를 생각하면 모두를 위한 행복 찾기라는 그들의 이념과 노력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깨달을 수 있다. 히피 트렌드와 함께라면 모든 것이 변해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들- 사랑과 자유-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행복한 시즌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정진아
포토그래퍼
Tim Walker, LEE HO HYUN, INDIGITAL, GETTY IMAGE/MULTIB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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