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게 최고의 미덕인 줄 알았던 패션계에서 어르신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이른바‘할멈 시크(Senior Chic)’다.
패션 브랜드의 광고 캠페인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거시적인 논의가 함축되어 있는, 말하자면 시각적인 세상의 축소판이다. 한 장의 사진 속에는 해당 시즌의 트렌드, 조만간 쇼핑하러 나서야 할 아이템은 물론이고 주목해야 하는 인물, 그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색상과 장소, 관련된 영화와 음악을 비롯한 문화, 사회·경제·정치적으로 첨예하게 사유해야 할 이슈까지 담겨 있다. 새해가 막 시작 되자마자 유수의 세계 패션 브랜드들이 속속 2015년 봄/여름 시즌 광고 사진을 하나둘씩 공개하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 SNS를 중심으로 ‘디지털 빅마우스’들이 부지런히 이 이미지들을 복제, 재생산하면서 다양한 담론이 수면 위로 떠올랐는데, 지난 1월 8일, 타임라인을 일제히 수놓은 핵폭탄급 파급력의 광고가 화제가 됐다. 바로 셀린의 광고 비주얼이다.
셀린은 이번 시즌 총 3명의 인물을 광고 모델로 기용했다. 영국 출신의 모델 프레야 로런스, 프랑스 출신의 발레리나 겸 안무가 마리 아네스 지요, 그리고 미국 작가 존 디디온이었다. 이 중 1934년생으로 올해 80세인 존 디디온의 등장은 단 24시간 만에 #Joandidion, #JoandidionforCeline이라는 관련 해시태그를 달고 총 6천 회가 넘게 인스타그램에 포스트가 되며 전 세계적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아마, 그 어떤 금액의 광고비를 지급하고서도 얻을 수 없는 결과를, 셀린은 단 한 사람의 모델 전략을 통해 얻었을 것이다. 미국 스타일닷컴은 셀린 광고 캠페인의 열광적인 반응을 두고 ‘2015년에 벌어진 가장 드라마틱한 패션 모멘트일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요즘 지구상에서 가장 세련된 패션 브랜드라는 말을 듣는 셀린과 80세 할머니 광고 모델의 조합은 누구나 앞다투어 젊고 어리고 예쁜 여자의 이미지만 찾는 패션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30~40대의 우아한 원숙함을 넘어 50대 이상의 여성에게서 패션의 핵심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시니어 시크(Senior Chic)’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셀린뿐만이 아니다. 패션계의 손꼽히는 아트 디렉터인 올리비에 잠이 지휘한 아이스버그 캠페인을 보면 문화계의 여러 인물을 기용했는데, 그 중 한 명은 1953년생으로 예순이 넘은 밴드 소닉 유스의 베이시스트 킴 고든이며, 생로랑의 에디 슬리먼은 1943년생으로 칠순이 넘은 전설적인 여성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을 ‘뮤직 프로젝트’의 새 얼굴로 추가했다. 엄마와 딸이 손을 잡고 있는 브랜드 로고에 착안해 패션계의 유명 모녀를 모델로 기용한 랑방 캠페인에서는 1970년대 헬무트 뉴튼과 티에리 뮈글러, 이브 생 로랑의 뮤즈로 활동한 전설적인 슈퍼모델인 비올레타 산체스가 옆에 선 딸만큼이나 완벽한 몸매로 농익은 우아함을 발산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빛나는 청춘의 한 장면은 있다. 이번 시즌 나이 든 패션 광고 모델로 화제가 된 존 디디온이나 조니 미첼, 킴 고든과 비올레타 산체스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멋지다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올 만큼 스타일리시한 패션 아이콘으로서의 전성기 시절 모습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루스한 톱을 입고 컨버터블 스포츠카에 앉아 담배를 든 20대의 존 디디온과, 셀린의 검정 니트 드레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당당히 카메라를 응시하는 80세의 존 디디온 중 누가 더 스타일리시한가를 묻는다면, 어느 쪽의 손도 들어줄 수 없을 것 같다. 나이와 시대와 인종을 넘어서, 모든 여자는 아름답다. 그것이 2015년 봄 패션 광고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점이다.
- 에디터
- 패션 디렉터 / 최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