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보다 더한 불황이라고들 말한다. 불경기로 인한 소비 심리 위축은 눈에 보이는 상품에만 해당되지 않아서, 사람들은 공짜로 즐길 수 있는 인터넷 콘텐츠로 만족하며 값싼 길거리 음식에 지갑을 연다. 내리막길에 접어든 기대 감소의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제되고 잘 만들어진 무언가에 제대로 가치를 지불하는 일이 왜 필요한지, 세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야기한다.
소유냐 스트리밍이냐
음악이 없어도 사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지만, 어떤 사람들은 굳이 음반을 사거나 공연장에 간다. 음악이 있어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2014년 미국 음악 시장의 통계를 보면 다운로드와 CD의 비율이 감소하고, 스트리밍과 바이닐(우리가 흔히 엘피라고 부르는 레코드) 판매가 급증한 걸로 나온다. 시디의 판매 비율이 줄어든 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 다운로드도 돈이 들고 번거로우니까 저렴하고 편한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듣겠다고 마음먹는 것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갑자기 그 무거운 엘피 레코드를 집어 들기 시작했다는 건 쉽게 이해하기가 힘들다. 다운로드도 아닌 스트리밍이 대세가 되어가는 이 판국에 왜 사람들은 다시 음반을 사기 시작했을까.
이렇게 얘기해보면 될 것 같다.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고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옷을 사지 않아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스트리밍만으로 살아도 음악을 듣는 데 큰 지장은 없다. 그런데 스트리밍을 옷에 비유하자면, 옷을 계속 빌려 입는 것과 비슷하다. 입을 수는 있지만 ‘나의 옷장’에는 결코 그 옷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종의 캠페인처럼 이런 얘기가 나돌았다. ‘여러분이 시디를 사면 여러분이 좋아하는 음악가에게 (다운로드를 받는 것보다) 더 많은 몫이 전달됩니다.’ 이런 문장과 말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들’ 은 어느덧 불우이웃이 되었다. 맞는 말이다. 스트리밍과 다운로드라 는 것이 생겨나고 그 기술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이 창작자만큼이나 많은 수익을 가져가는 이 시대에서, 그리고 그 소프트웨어 가격과 창작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지구상 존재하는 다른 그 어떤 나라보다 낮은 한국에서 시디는 여전히 음악가들에게 보다 나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매체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호소성 캠페인은 성공을 거두기가 어렵다. ‘예수를 믿으면 천당에 갑니다’라고 말하더라도 교인들이 쉽게 늘어나지 않듯, 음반을 사는 일이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게 왜 좋은지는 누가 말해주기보다 결국 스스로 느껴야 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내가 음반을 사는 행위가 굉장히 멋지고 좋은 일이라고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음반을 사는 이유는, 태평양 건너 미국의 바이닐 시장이 매년 30%에서 50%까지 성장하는 – 2014년에는 52%라는 기록적인 성장을 했다- 이유는 무척 간단하다. 예컨대, 매일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어도 비어 있는 내 옷장은 허전하기 때문이다. 음반을 사려면 돈이 들어간다. 다운로드보다 비싸고 스트리밍보다는 훨씬 비싸다. 엘피는 (대체적으로) 시디보다 더 비싸다. 그러나, 어떤 가방 가게에서 3만원짜리 가방 대신 10만원짜리 가방을 택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그 가격을 지불할 만큼 멋지거나, 혹은 그 비용에 상응하는 만족감, 혹은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10대와 20대가 다운로드를 받는 대신 다운로드 쿠폰이 동봉된 엘피 레코드를 사기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다운로드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사봤는데 그 레코드가 생각보다 근사하고 좋았기 때 문이다.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는 투덜거린다. “음반을 사는 데 10파운드를 내야 한다고 투덜거리지만 (음반을 산 다음)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고.” 인생이 쉽게 바뀌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음반을 산다. 이제는 더 크고 무겁고 푸짐한 걸 산다. 그 큼직한 레코드를 들고 가는 사람을 보고 ‘어머 요즘도 저런 걸 사는 사람들이 있네’라고 놀랐 거나 약간의 조소를 보낸 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음반을 들고 가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물건을 들고 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음악 공연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단어로도 자신이 경험한 짜릿한 순간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말하자면, 스트리밍만으로도 음악을 듣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지만, 기꺼이 번 돈이나 용돈을 아껴 음반을 사는 사람은, 그리고 공연장에 가는 사람은 조금 더 음악으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사람일 것이다. 혹은 좀 더 재밌게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제아무리 스트리밍이 편해도, 이런 즐거운 경험을 사람들이 쉽사리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경험이 뭔지 아직 잘 모른다면, 새해엔 한번 시도해보시길.글 | 김영혁(김밥레코즈 대표)
고급 식탁의 의미
우리는 조금 더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맛있는 음식을 원할 권리가 있다. 인간은 육체를 통해 완전해지는 영혼의 존재니까.
세 자리 숫자가 이미 내 의욕을 떨어뜨렸다. 070. 인터넷 전화의 국번이며 레스토랑의 번호였다. 왜 하필? 100% 예약제로 운영한단다. 그런데 서촌에 있다. 맞다, 인터넷 시대다. 거의 모두에게 지선도 국번도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은 소수의 예외다. 정체성이나 브랜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역과 국번의 관계는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 근본 없는 070보다 02-735 같은 고유 번호가, 특히 서촌 같은 동네와는 더 잘 어울리지 않나? 네이버 지도로 무작위 검색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업종 불문, 자부심 넘치는 가게가 070 같은 번호 쓰는 곳은 드물다. 모르는 걸까, 생각을 못하는 걸까. 시종일관 무거운 음식은 후자임을 암시했다. 그걸 혼자 앉아 먹었다. 예약률 100%라는 얘기는 예약한 손님이 한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지난해 11월의 이 식사는 무려 7개월 만의 레스토랑 방문이었다. 맞다, 말이 안 되는 간격이다. 본디 1주일에 한 번꼴로 외식을 다녔다. 재미있는 음식을 많이 만났다. 쫄깃한 차돌박이, 해동 안 돼 서걱거리는 블랙베리가 기억난다. 한식 디저트라며 호떡도 먹었다. 호텔 꼭대기의 레스토랑이었다. 모두 양식과 파인 다이닝의 콘셉트에서 한참 벗어난다. 재작년 책을 내고는 인터뷰에서 ‘식탁 위의 희망을 보러 다닌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는 정말 그랬다. 계속 다니다 보면 다른 게 나올 거라 믿었다. 거의 그렇지 않았고, 나는 절망했다. 즐겁지 않았다. 그래서 쉬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으니, 식탁을 잠깐 떠나면 즐거움을 되찾을 거라 믿었다. 그 끝에 070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 감소 시대? 너무 고상하다. 내리막길? 여전히 그렇다. 그냥 ‘망했다’고 말하는 게 속 편하겠다. 우리는 망했다. 이런 현실에서 음식, 특히 파인 다이닝을 찾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인가. 누구보다 나 자신을 위해 구해야 할 답이다. 설명도, 변명도 좋다. 삼 단계로 나눠 생각해보자. 먼저 음식과 맛의 의미다.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은 왜 중요한가? 영국의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는 인간을 영혼-육체적(Psyche-somatic) 존재라 규정한다. 한마디로 ‘육체로 완전해지는 영혼’이다. 영적인 측면이 중요하지만 육체가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의미며, 그렇기 때문에 음식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음악이나 미술과 비교해서 음식은 깊이가 떨어질 수는 있지만 즉각적이면서도 영혼에 닿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가 “저녁 없는 삶” 속에서도 아등바등 맛있는 음식을 찾아 헤매고, 줄서기도 마다하지 않는 이유다. 식사 대용 음료 소이렌트(Soylent)가 지난해 상용화되었다. 필수 영양소와 열량을 간편히 채워준다지만, 당신이라면 선택하겠는가? 영혼-육체적 존재인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음식이지 연료가 아니다.
음식과 맛이 이런 기본 의미를 지닌다면, 파인 다이닝은 어떠한가? 두 가지 측면에서 따져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순수한 쾌락이다. 영혼-육체적 존재에 충실해지는 데 그치지 않고, 총체적인 즐거움을 준다. 미국의 저자 애덤 고프닉의 표현을 옮기자면 ‘발을 들여놓으면 다른 사람의 삶을 잠깐 사는’ 레스토랑의 즐거움이다. 음식은 기본이고 서비스를 포함해, 머무르는 시간을 통째로 책임져준다. 나는 이를 여행이나 연극에 비유해왔다. 다른 문화권으로 가장 손쉽게 떠날 수 있는 여행이거나, 손님과 셰프를 포함한 직원이 각자의 몫에서 즐거움을 찾는 역할극이라는 것. 공감각적 경험을 위한 무대를 꾸미는 데는 높은 비용이 든다. 파인 다이닝도 마찬가지다. 식기부터 식탁보, 화장실의 손수건까지 전부 돈이다. 한편 높은 비용은 더 높은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도 요구된다. ‘함께 사는 지구’다. 미국의 셰프이자 저자 댄 바버는 지난해 낸 저서 <세 번째 요리(The Third Plate)>에서 단일 품종 재배로 획일화된 식문화와 그 총체적 폐해를 논한다. 비만에서 환경 오염까지 아우르는 폐해다. 그리고 해법으로 자족가능한 친환경 공동체의 발전을 제시한다. 각각이 자연의 축소판인 다품종, 방목 위주의 공동체가 성장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이다. 바람직하다. 하지만 현재 이를 실현하기 위한 비용은 일반 외식 식탁의 최소 10배가 든다. 070의 우리 현실에서는 얼마나 적용 가능한지도 아직 모른다. 그래서 회의적이지만, 적어도 그 이상만은 이해하고 또 전적으로 동의한다. ‘질보다 양’의 식문화를 벗어나 다양성을 꾀해야 하며, 그 실현을 위해서는 비용 지불을 감수해야만 한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성경 구절이 있다. 나는 종교인도 아니고, 이 말이 케케묵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이 유통기한 지난 구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논리와 맞닥뜨린다. 이런 시기에 음식이든 뭐든, 고급 지향 문화가 왜 필요하느냐는 것. 우리는 정말 망한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음식과 맛에서 즐거움 찾기를 멈춰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더 맛있는 음식이 필요하다. 순간을 헤쳐 나가는 데 그것만큼 도움 되는 것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 즐거움에도 합당한, 모두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높은 대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아마, 계속해서 예약 전화를 돌릴 것이다. 그게 070이 아니기만을, 그래서 발을 떼기도 전에 실망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글 | 이용재(음식 칼럼니스트)
자유라는 대가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성공이나 힐링을 속성으로 배워야 한다는 강박, 남들 따라 읽는 베스트셀러의 목록에서 놓여나 어린 시절 짜릿한 흥분의 감각을 주는 놀이로서의 책이다.
국내 출판사들이 ‘어떻게 팔았는가’와 관련하여 최근 2년 간 눈에 띈 뉴스를 정리해본다. (1)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대한 선인세 논란 (2) 출판사 덤핑 판매로 동네 서점 급감 (3) ‘소설 사면 영화표 증정’ 민음사 이벤트에 옐로카드 (4) 황석영 소설 <여울물 소리>를 펴낸 출판사의 사재기 문제로 황석영 선생이 직접 자신의 책 절판 선언 (5) 한경비피(BP)에서 펴낸 자기계발서 두 권이 사재기로 판명 났으며 RHK의 자기계발서 두 권에 대해서도 사재기로 결론 (6) 정여울의 에세이와 <오즈의 마법사>, <셜록 홈즈> 등이 도서정가제법을 피하기 위해 ‘실용서’로 분류되어 출간과 동시에 반값 할인 (7) 김영사가 출간한 밀리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를, 20만 달러(약 2억원)보다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한 와이즈베리가 재출간한 데 대해 김영사 측이 “타 출판사가 성공적으로 출판한 책을 거액을 투자해 출판권을 가져가 는 데는 성공했지만 출판사 고유의 메시지와 출판 정신을 담으려고 했는지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는 보도자료 배포. 이상에서 보듯 거액의 선인세를 지불해서라도 ‘해외 인기작’을 확보하기 위한 출판사들의 경쟁은 치열했으며, 거액을 들인 만큼 무리한 마케팅 수단이 동원되었다. 이에 대한 동종업계 종사자들의 비난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개정 전 도서정가제 법을 악용한 반값 할인과 ‘자사책 되사 들이기’로 베스트셀러 순위를 교란했으며, 온라인 서점에서의 ‘눈 가리고 아웅’식 덤핑 판매가 일상화되었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라는 질문에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곤란할 만큼 팔리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오리라. 큰 출판사들은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작은 출판사들은 먹고살기 위해, 라는 각각의 논리가 있겠다. 일일이 따져볼 필요도 없이 대다수 출판사의 매출액은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들었고, 향후 시장이 좋아질리 없다는 막연한 불안 속에서 출판 정신 같은 건 빛이 바랜지 오래였다. 총체적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출판계가 선택한 고육책은 도서정가제 개정이었다. ‘더 이상의 제 살 깎아먹기는 피해야 한다’는 최소한의 인식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출판 사들이 담합하여 ‘책값을 올렸다’고 생각했다. 조삼모사식 할인 판매가 부른 파국이다. 시장은 더욱 싸늘해졌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에 대한 대답 대신 나는 어느 소설가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자료를 살펴보면 어슐러 르 귄(1929~)은 어려서부터 책, 특히 수많은 문학서에 둘러싸여 자란 듯하다. 저명한 인류학자인 아버지와 인기 동화작가인 어머니 덕분이리라. 대학에서도 문학을 전공했고, 심리학과 인류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62년에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르귄은, 지금보다 더 공고하게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리얼리즘 소설 대신 ‘헤인 시리즈’로 일컬어지는 과학 소설과 ‘어스시 연대기’로 대표되는 판타지 소설을 자신의 문학적 기반으로 삼는다. 의도적으로 비주류 장르를 택한 것이다. 서양 중심의 사고에서 탈피한 세계관, 동화적 감수성을 바탕으로한 문체, 신화에 대한 이해와 철학적 통찰력이 담긴 그의 소설은 장르를 넘어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았다. 주류 작가들로부터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르귄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장르가 아니라 ‘좋은 책’ 자체였다. 어슐러 르귄의 말을 들어보자.
“아시죠? 책은 그냥 상품이 아닙니다. 이윤 추구와 예술의 목적은 종종 갈등을 빚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힘은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하지만 절대왕정 시절 왕의 권력도 그랬습니다. 사람이 만든 그 어떤 권력도 사람이 저항하고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저항과 변화는 예술에서 출발합니다. 그중에서도 많은 경우, 그것은 우리의 예술, 즉 말의 예술에서 출발합니다. ”
그의 얘기를 들고 있자니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오늘 우리들 어른은, 어린 시절에 읽으며 맛보았던 흥분에 필적할 만한 것을 독서에서 얻고 있을까?” 아니, 흥분을 느끼기는커녕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톱니바퀴에 편승하여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급기야 ‘읽을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단 채로 살아가고 있다. 겨우 ‘성공’이나 ‘힐링’을 ‘속성으로 배울 수 있는 책’을 찾아 거들떠 볼 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건방진 말이 되겠지만,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읽어야 하는 책’보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으며 느꼈던 어린 시절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베스트셀러의 노예가 되지 말고, 남들이 읽는다고 따라 읽을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원하는 책 말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받게 될 대가의 이름은 이윤이 아니라 자유”라는 르귄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 한다. 요즘 같은 ‘세월’이어서 더 가슴에 와닿는 건지도 모르겠다. 글 |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 에디터
- 황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