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의 소란이 가라앉고 밤의 유혹이 미처 다가오기 전, 내밀하게 어둠이 스며드는 저녁의 평온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카이의 노래와 친구가 될 수 있다.
클래식 FM을 듣는 사람이라면 저녁 6시에 들려오는 사려 깊은 목소리를 기억할 월드뮤직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인 <세상의 모든 음악>을 진행하는 DJ 카이다.
부드러운 음성과 조곤조곤한 말투에서 느꼈던 차분한 인상이,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아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제 태양 콘서트에 다녀왔어요. 무대 위에서 신나게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자문하고 반성했어요. 나는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책으로 배운 것 같고 말이죠…(웃음)” 그가 음악을 책으로 배운 것은 맞다. 서울대 성악과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까. 클래식 엘리트 코스를 걸었지만 정형화된 길을 따라가기에는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삶에 대한 꿈이 컸을까? 고전음악을 전공하고 여러 콩쿠르에서 수상했으면서도 카이는 정통 클래식이 아닌, 조금 다른 길을 택했다.
카이의 이름 앞에는 늘 ‘팝페라 가수’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그런 장르가 그를 정확하게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데뷔 이후의 시간은 카이 스스로도 자신과 꼭 들어맞지 않는 단어들에 불편함을 느끼면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싶다. “대중은 제가 오페라 아리아를 부를 때 가장 반응이 좋았고, 회사에서는 가요를 부르길 원했어요. 하지만 둘 다 완전히 저다운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맞춰가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대신 카이는 자기 자신을 나침반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었다. 스스로의 성향이나 목소리나 관심사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을 기준으로 세운 것이다. “빨리 가기 위해 남들이 기대하는 걸 내놓기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일은 훨씬 재밌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은 어떤 장르로 정의하거나 이 단어는 맞고 이 낱말은 아니라고 딱지를 붙이는 대신 카이가 부르는 노래를 들어보는 것이다. 곧 나올 두 번째 앨범이 괜찮은 단서가 되어준다. ‘오 솔레 미오’처럼 익숙한 칸초네나 영화 <대부>의 주제곡, 산레모 가요제에서 처음 소개된 ‘타임 투 세이 굿바이’ 같은 곡들을 담았다. 마치 여행하듯 이탈리아를 코앞에 펼쳐놓는 음악들이다.
“뭔가를 응축하고 집약해서 빵 터뜨리는 일에는 미숙한 것 같아요.” ‘나는 가수다’에 출연했지만 금세 탈락했던 일을 두고 카이는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이 깊던 시간에 주어진 큰 기회는 결과적으로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여러 회에 걸쳐 살아남는 승자가 되지는 못한 대신 그에게 자양분을 주었다. “다시 태어나면 제대로 비뚤어져보고 싶다는 농담을 가끔 해요. 이제라도 스스로를 깨뜨려보고 싶어요.” 뮤지컬 배우로서도 늘 변호사나 귀족 역할을 하는 자신에 대해 약간의 아쉬움을 느낀다면서도 역시 결론은 이렇게 모범생다운 자기 반성으로 돌아온다. 성악을 할 때는 100kg까지 나갔다가 운동으로 체중을 줄인 그는 얼마 전 <드라큘라>에서는 웃통을 벗는 장면을 위해 두 달간 닭가슴살만 먹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가발에 망사 스타킹을 쓰고 <헤드윅>을 연기하는 카이를 보는 일은 없을지 모르겠지만, 이 음악 모범생은 한 방에 응축하고 터뜨리는 대신 한 걸음씩 수줍게 천천히,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4년 넘게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DJ 는 어떤 경험인가?
카이 학교 다닐 때도 강의실보다는 음악감상실을 사랑하는 학생이었다. 클래식 전공이기 때문에 방대한 양의 월드뮤직까지는 알지 못했는데, <세상의 모든 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공부를 많이 하게 됐고, 비교할 수 없는 지식과 영감을 많이 받고 있다.
곧 앨범이 나온다고 들었는데 월드뮤직의 색깔이 반영되는 건가?
성악을 전공해 나는 아무래도 유럽의 언어나 음악이 친숙하다. 나에게 익숙한 외국의 음악을 정리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어릴 때 좋아하던 이원복 교수님의 <먼 나라 이웃나라>라는 책을 음악으로 구현했다고 할까. 세계의 음악을 마치 여행하듯 무겁지 않게 다루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서 <카이 인 이탤리>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의 음성으로 들어봤을 곡들이다. 클래식 하면 떠오르는 방대한 사이즈의 음악보다, 편안하게 힐링이 되는 사운드를 만들고 싶었다.
노래도 노래지만 트럼펫 연주를 비롯해 소리가 빈티지한 느낌이다.
퇴근길에 차에 CD를 넣고 몸을 기대며 들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재즈스러운 편곡이지만 클래식 화성을 많이 넣었으며, 전원적이고 소박한 콘셉트, 빈티지한 사운드를 담았다. 얼마 전 앨범 콘셉트 촬영하러 이탈리아에 갔다가 로마의 삼청동쯤 되는 오래된 골목에 있는 작은 라이브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다.
당신의 데뷔 앨범은 성악 발성으로 부르는 가요 발라드 같은 느낌이었다. 거기에 클래식 연주 인트로 같은 것을 더해서 차별화를 하고.
가요도 아니고 정통 클래식도 아닌 비인기 종목이다 보니 고민이 컸다. 대중성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하나 의식하고. 1집 앨범은 처음 데뷔해서 아무것도 몰랐을 때 이것도 저것도 해보면서 모아놓은 결과물이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으로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이렇게도 불러보고 저렇게도 불러보고 별 시도를 다 해본 끝에 결국 음악은 그렇게 머리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삶의 본질이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지나간 음악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 같다.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걸렸지만. 결국 오랜 고민을 거쳐 음반이 인기를 얻건 그렇지 않건 나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음악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이번 두 번째 앨범이 당신이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음악이될까?
무엇보다 가장 편한 노래를 했다. 라디오에서 멘트를 하거나 지금 인터뷰하는 것처럼 그냥 내 목소리를 냈다. 적어도 나의 몸과 마음이 많이 실려 있는 음악이다. 좋아하는 뮤지션 동료들을 섭외해서 화성이나 느낌에 대해 일일이 맞춰가면서 녹음하고 작업했다. 작곡가가 곡을 만들어 오면 가서 부르는 식이 아니라.
편곡도 당신이 직접 했나?
재즈 피아니스트 조윤성 씨와 함께 했다. 윤종신, 김광민 씨와 함께 피아노 공연도 하고, 음악계에서 무척 주목받고 있는, 자기 색깔이 명확한 아티스트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고. 함께 작업하면서 나의 부족한 점을 느끼고 배운다.
당신과 다른 성격이기에 그런 점에서 도움을 받는 걸까?
윤성이 형이나 태양, 지용이(지드래곤)처럼 가슴속에 열정이랄까 마음이 시키는 소리에 반응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끌린다. 어제 태양 콘서트에 갔는데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스스로 자문하고 반성하게 되더라. 나는 음악을 책으로 배운 것 같고. 사람들은 내 박사학위 같은 데 주목하고 의미를 두기도 하지만 스스로 아쉬움이 컸다. 예술은 공부를 많이 해서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농담 삼아 다시 태어나면 비뚤어진 문제아로 살아보고 싶다는 얘기를 한다(웃음).
비뚤어지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건 대체로 모범생들이더라.
피어싱도 하고 타투도 해봤는데 거기까지였다. 결국 귀는 막히고 문신도 더는 늘어나지는 않더라. 결국 그게 진짜 내 흥미는 아니었던 거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루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색을 즐기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친구에게 소개해주고 누군가와 진솔한 얘기를 나누고 미래에 대해 상상하고… 재미없는 삶이 재미있다(웃음).
- 에디터
- 황선우
- 포토그래퍼
- MOK JUNG WOOK
- 스타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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