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트밖에 난 몰라.’ 김서룡의 첫 번째 여성복 컬렉션은 수트에 대한 그의 오랜 애정과 단단한 고집을 응축한 결과다. 이번 쇼를 통해 남성복 테두리로 가두었던 ‘옴므’의 꼬리표를 공식적으로 떼어낸 지금, 김서룡이라는 디자이너의 정체성은 오히려 더욱 또렷해졌다.
김서룡의 여성복이 공식 데뷔전을 치른 날, 좁고 긴 런웨이 좌우엔 순수한 관심과 기대가 뿜어내는 미묘한 긴장감이 교차했다. 김서룡이 만든 ‘여자 옷’을 만나기 위해 모여든 이들만이 자리한 까닭일까? 형식적인 얼굴 비추기 때문에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이 증발한 쇼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음악이 흐르고 일순 음소거 상태가 된 런웨이 저편 계단에서 바지 끝자락부터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 수트가 런웨이를 가로지르자 소리 없는 탄식이 쇼장을 가득 메웠다. 꼿꼿한 채로 유연했고, 우아하면서도 위압적이었으며, 관능적이면서도 담백했다. 여자에게 대입한 김서룡의 수트는 그렇게 이율배반적인 아름다움으로 형형히 빛났다. 온갖 기교와 허세를 잔뜩 버무린 옷에서 느낄 수 없는, 잘 만들어진 옷 그대로의 묵직한 존재감. 그동안 그의 남성복 쇼에서 간간이 여성 수트를 봤을 때와는 또 다른 감흥이었다. 조금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말이다.
“그간 테마에 따라 여성복을 선보이긴 했지만 워낙 잘 만드는 분들이 많아 굳이 욕심을 낼 필요를 못 느꼈어요. 사실 남성복만 할 때도 매장에 찾아오는 분들의 30%가 여성이었거든요. 그런데 공식적으로는 여성복을 안 하니까 “해줄 수 있나요?”라고 부탁하듯이 미안해하며 물을 때가 많았어요. 그럴 이유가 없는데 말이죠. 내가 여성복을 시작하면 좀 더 편하게 다가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본격적으로 여성 수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러다 수년간 시행착오를 거쳐 이제야 때가 되었다 싶어 선보이게 되었어요.”
그런데 언뜻 그의 여성복은 기존의 남성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물론 아플리케가 만개한 톱이나 흐느적거리는 미니 드레스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김서룡의 이름으로 모인 남성복과 여성복은 마치 자웅동체와도 같은 모습이다. 혹 남성복과 차별화된 디자인을 기대하는 이들은 없을까? “가끔 실루엣을 좀 더 강조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긴 해도 기본적으로 매장을 찾는 여성들은 김서룡이 가진 느낌이 좋아서잖아요. 내 취향에 공감하기 때문에 나를 찾는 거죠. 다만 여자가 남자 옷을 빌려 입었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되니까 패턴과 소재에 변화를 줍니다. 행어에 걸려 있을 땐 잘 드러나지 않지만 막상 입어보면 그 차이점을 확연히 느낄 수 있어요.”
사실 이런 오해 아닌 오해를 사는 건 이번 여성복 역시 그의 전매특허인 수트가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수트를 전문으로 하는 디자이너로서 내가 만든 여성복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난 이번 여성복 컬렉션을 통해 ‘내 옷은 이래요’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괜히 어설프게 다른 요소를 희석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았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에 집중했어요.” 혹 디자인 세계가 정체된 느낌을 주진 않을까 하는 우려에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가둬두는 것은 아니에요. 디자이너 초창기에 웨딩드레스를 했기 때문에 여성복에 대한 부담감은 없어요. 모델이었던 여동생을 비롯해 지인들에게 꽤 많은 아이템을 만들어줬거든요. 앞으로 스커트나 드레스를 선보일 생각도 있어요. 물론 모든 건 수트와 어우러져야 한다는 전제가 따라야겠죠.” 그의 말마따나 수트는 곧 김서룡의 근간과 같은 존재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수트에 신앙과도 같은 믿음이 따르는 것.
그는 수트에 지레 겁을 먹는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목소리를 조금 높여 이야기했다. “ ‘쇼에 나온 옷인데 내가 입을 수 있을까?’라고 묻거나 불편한 옷으로 단정하는 경우가 있어요. 수트를 입는 목적 자체가 그 어느 때보다 잘 차려입은 기분을 주는 데 있는 만큼 편한 옷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성미로 점철된 옷이 줄 수 없는 매력이 분명 존재하거든요. 또 실용적인 관점으로 생각해도 수트는 재킷과 팬츠를 따로 매치할 수 있기 때문에 스타일링의 활용도가 높죠. 또 체형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지닌 최고, 최선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옷이에요. 두려워 말고 일단 도전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 에디터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송선민
- 포토그래퍼
- 맹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