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포도밭의 초록과 레드 와인의 보랏빛이 넘실대는 시간이었다. 메독에서는 먹고 마시고 삶의 즐거움을 제대로 만끽하는 일 이상 인생에 중요한 것이 없는 듯했다. 그건 보르도까지 가지 않고도, 잘 고른 메독 와인 한 병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지만.
모든 술은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존재지만, 와인은 좀 더 그렇다. 아마 별처럼 많은 이 술의 이름 하나하나에 저마다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와인은 제각기 다른 산지의 지형과 토양, 매년 변하는 기후 속에서 다른 농부들의 손으로 키워지며, 저마다의 비율로 섞이고 숙성되어 종류마다 같은 것이 없다. 소주나 맥주의 상표에다 그 술을 만든 공장의 그림을 그려 넣는 법은 없지만 와인은 그렇게 한다. 한 병의 포도주 안에는 그것이 만들어진 장소가, 사람들이 있고, 그런 요소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다양한 서사가 있다. 그리고 이야기에 대한 상상, 정보, 혹은 추억은 와인을 더 맛있게 만든다.
당신이 메독에 가보았다면 그곳에 대해 추억할 일이, 가보지 않았다면 상상할 일이 자주 있을 것이다. 메독은 프랑스 와인 산지 가운데서도 아주 생산량이 많은 보르도를 대표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중간의 땅’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이 지방은 서쪽으로는 대서양을, 동쪽으로는 지롱드 강을 끼고 중간에 대각선으로 길게 뻗어 있다. 강에서 바다로 흘러가며 펼쳐진 흙은 물이 잘 빠지고 미네랄이 풍부해서 포도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메독안에는 다시 메독, 오메독, 마고, 포이약, 물리스, 생테스테프, 생줄리앙, 리스트락 등 8개의 아펠라시옹(AOC, 공식 산지)이 있어서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와인들은 이런 AOC 이름을 달고 나온다. 물론 이 이름들을 몰라도 상관없지만, 각각의 색깔에 대해 익숙해지면 좀 더 정확한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밑줄 치고 외우면서가 아니라, 맛을 보고 어울리는 음식을 매칭해보면서 말이다.
AOC의 이름이나 와인의 등급에 익숙하지 않다 해도 ‘샤토 무통 로칠드’에 대해서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곳의 상징인 양의 문양이나 연도별로 유명 화가의 그림을 사용한 레이블이 익숙할 수도 있다. 마고와 더불어 고급 와인이 많이 나는 포이약 지역의 최상 등급인 그랑크뤼 클라세 와이너리인 무통로칠드는 어른들을 위한 테마파크라 해도 좋을 만큼 크고 잘 정비되어 있으며 일본과 중국에서 온 관광객이 많았다. 여기서는 2012년에 생산된 와인을 병에 넣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9~10월 사이 수확한 포도는 선별 작업을 거쳐 커다란 양조통에서 3주가량의 침용 과정을 거친다. 그런 다음 오크통으로 옮겨 10~18개월 동안 숙성시키는데, 이 단계에서 와인 특유의 깊은 풍미와 여운이 생겨난다. 20세기 초반까지는 이 오크통, 즉 캐스크 단위로 유통업자인 네고시앙에게 와인을 판매하는 와이너리가 많았으며 무통 로칠드도 1924년 이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퀄리티를 지키기 위해 블렌드와 병입까지 자체적으로 하면서 와이너리마다 자신의 이름과 레이블이 중요해진 것이다. 무통 로칠드는 아티스트들에게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을 테마로 한 그림을 의뢰해서 매년 레이블을 바꾼다. 브라크, 달리, 미로, 칸딘스키, 피카소, 앤디 워홀… 그리고 최근에는 아니시 카푸어나 루시안 프로이트, 제프 쿤스 같은 미술가들이 그린 레이블은 각 빈티지를 뚜렷하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수십년 이어져온 프랑스의 최고급 와인, 그리고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결합. 컬래버레이션이니 하는 말이 유행하기도 전에 이렇게 파워풀한 마케팅이 존재했다. 역시 그랑크뤼 클라세 와이너리인 샤토 그뤼오 라로즈는 최대 수준의 올드 빈티지를 보유하고 있는 지하 저장고가 인상적이었다. 20세기 초반부터 저장한 해묵은 와인들은 40년마다 코르크 마개만 바꿔준 채 보관하고 있다고한다. 오래 숙성해서 마실 수 있는 강건한 와인이 많다는 것도 메독 와인의 특징이다.
큰 와이너리의 브랜드 파워와 마케팅, 규모의 미학과 작은 규모 와이너리의 접근성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메독이다. 그랑크뤼 클라세에 대응하는 등급 체계로, 그랑크뤼에는 속하지 않았으나 그에 뒤지지 않는 품질의 크뤼 부르주아,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규모로 가족 경영의 특징을 갖는 와이너리 조합인 크뤼 아르티장이 있다. AOC 오메독에 있는 샤토 투르 벨 에르가 이런 크뤼 아르티장 와이너리다. 샤토의 소유주인 파트리스 벨리는 7.5헥타르 정도되는 자신의 와이너리에 대해 ‘인간적인 규모’라고 웃으며 말했다. 1년 내내 포도의 생장부터 와인 생산, 마케팅까지 전 단계를 총괄하는 자신과 상주 직원 한 사람, 그리고 수확철부터 일손이 바쁜 6개월만 일하는 파트 타이머로 유지된다. “큰 규모의 와이너리는 분업이 잘되어 있겠지만 저는 스스로 다 하 다 보니까 모든 걸 알고 있어요. 포도밭, 와인, 고객까지요. 이런 것이 크뤼아르티장의 장점이죠.” 등급 체계를 마치 성적표처럼 줄 세워 신봉할 이유는 없다. 어느 것이 낫다 못하다보다는 서로 다른 규모와 제작 방식에 대한 표식이라 여기면 되는 것이다. 와이너리도, 와인도 이렇게 다양해서 가격대에 따라 선택의 여지가 넓다는 것이 메독 와인의 강점이다.
무통 로칠드에서 미술관 투어를 마치듯 빈티지 레이블 엽서를 고르는 인파에 놀랐지만 메독 지역에 가장 흔한 세 가지는 포도밭, 샤토, 그리고 여행객이다.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처럼 상업적으로 개발된 와인 관광지는 아닐지라도 보르도를 매력적인 여행지로 만드는 몇 가지 요소가 분명하다. 다양한 와이너리를 돌며 시음할 수 있는 기회(물론 예약이 필요하다), 부드러운 경관과 기후, 파리에 비해 한결 여유롭고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역시 파리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는 음식이다. 대서양과 지롱드 강을 면하고 있는 보르도 지역은 민물과 바다 양쪽에서 나는 해산물을 비롯해 모든 식재료를 신선하게 공수해 만드는 프랑스 요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1주일가량 머무는 동안 비둘기와 메추리, 오리 고기와 푸아그라, 송아지 머릿고기와 장어조림 등을 먹었다. 메독 와인과 보르도 음식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는 마고 아펠라시옹의 4군데 와이너리를 묶은 ‘마고에서의 맛있는 하루’ 라는 이름의 투어 패키지다. 샤토 프리외레 리신, 샤토 로장 갸씨, 샤토 라 투르 드 베상, 샤토 키르완 등 4개 와이너리를 순차적으로 방문하면서 와인만 테이스팅하는 게 아니라, 점심시간에 맞춰 해당 와인에 어울리는 지역 특산 음식을 함께 맛보는 프로그램이다. 공교롭게도 여성적이고 우아한 맛이 도드라진다고 평가받는 AOC 마고 지역의 여성 소유주 4명이 함께 기획한 투어다. 25년 전만 해도 와인 산업은 철저히 남성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양조 분야에 여자들이 활발히 진출해서 그 비율이 적지 않다고 한다.
메독에서의 가장 인상적인 한 끼는 오메독의 크뤼 부르주아 등급 와이너리인 샤토 라모트 씨싹에서의 점심이었다. 와이너리 안주인인 마담 플로랑스 파브르는 직접 식사를 준비해서 자신이 만드는 와인과 곁들여 냈다. 감자 그라탱, 채소 볶음, 꼬꼬벵같이 멋 부리지 않고 소박한 음식이 하나씩 나오는 동안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고, 다만 부지런한 손목 스냅으로 와인잔을 내내 돌리며 라모트 씨싹의 2003년 빈티지 와인을 충분히 ‘열어서’ 맛봤다. 신선한 재료로 만든 가정식을 편안하게 나눠 먹으며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 와인이 함께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이곳의 홍보 디렉터 에르베 베고는 크뤼 부르주아 등급에 대해 ‘합리적인 가격의 질 좋은 와인’으로 정의했다. “그랑 크뤼 클라세 와인이 메독의 상징일 수는 있어요. 자본력이 뒷받침되면 와인을 이렇게까지 만들 수도 있다는 어떤 정점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크뤼 부르주아는 일정 품질 이상을 보장하면서도 투자나 소장의 목적 보다는 지속적으로 즐겨 마실 수 있는 접근성, 현실적인 강점을 가진 와인입니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가 편하게 즐겨 가는 믿음직한 레스토랑은 따로 있게 마련이죠”.
미슐랭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메독에는 별 두 개를 받은 셰프 장 뤽 로샤의 레스토랑이 있다. 보르도의 신선하고 풍성한 식재료를 가지고 창의적이고 세련된 조리법으로 풀어내는 근사한 식당이다. 18세기 샤토를 현대적으로 개조한 고급 호텔 코르데이앙 바주 안에 있는데, 포도밭을 바로 곁에 둔 이 호텔은 백합 문양으로 유명한 그랑크뤼 클라세 와이너리인 샤토 랭슈 바주에서 소유, 운영한다. 랭슈 바주의 오너인 장 미셸 카즈는 탁월한 경영 아이디어로 메독 와인의 콘텐츠를 풍성하게 만든 전설적 인물이다. 와이너리 바로 곁에 훌륭한 호텔과 레스토랑을 만들어 와인 투어의 질을 높였으며, 포도밭과 샤토 외에도 여행자들이 즐길거리가 필요하다는 데 착안해 ‘빌라주 드 바주’라는 마을을 조성하기도 했다. 편안하고 활기찬 분위기의 식당, 다양한 프랑스산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정육점과 식료품점, 와인을 여닫고 따르고 보관하는 데 관련된 다양한 디자인 제품을 판매하는 인테리어 숍 등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다. 이 모든 상점의 중심에는 와인이라는 강력한 콘셉트가 있기 때문에 따로 또 같이 조화롭다. 와인 플러스 알파의 즐길거리로 린슈 바주에서 운영하는 ‘비니브’도 빼놓을 수 없다. 와이너리 방문객들이 자신만의 특별한 와인을 만들 수 있게 한 프로그램이다. 메독의 토질에 적합하다고 판단되어 이 지역에서 재배하는 포도의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프티 베르도의 네 가지. 이 중 주로 앞 두 가지 품종의 비율을 조정해 와인의 구조를 형성하고 뒤의 두 가지 품종으로 독특한 향을 더하는 식으로 블렌딩한다. 비니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12가지 포도 원액을 가지고 자신만의이름을 붙인 와인을 만들 수 있다. 테이스팅부터 레이블 디자인까지 전문가들이 도와주는데, 최소 제작 단위가 200여 병 규모로 적지 않기 때문에 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고객들이 이용하며, 유명한 운동선수나 뮤지션, 배우 등도 다녀갔다는 것이 담당자의 비밀스런 귀띔이다. 결혼을 한 해, 아이를 낳은 해, 은혼식 등을 기념해 세상에 하나뿐인 와인을 만드는 식으로 가족의 역사를 와인 빈티지로 기념하는 사람도 많다. 1800년대의 오리지널 양조장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도 하며, 파리의 갤러리와 파트너십을 맺고 매년 다른 아티스트의 작품을 와이너리에 전시하는 점도 랭슈 바주의 특이점이다.
포도는 매년 열리고, 수확과 양조 과정은 매년 반복된다. 그렇다면 메독의 농부들에게는 해마다 달라지는 기후 조건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일만 남아 있을까? 전통적인 방식에 의존하는 산업이지만 메독의 와이너리들은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더 나은 방식을 고민하고 나아지려고 다양한 시도를 한다. AOC 생테스테프의 샤토 몽로즈는 유서 깊은 그랑크뤼 2등급 와이너리지만 지속가능한 발전을 고민하며 경영에 반영해왔다. 매년 포도밭을 1헥타르씩 뽑아서 다시 심는 방식으로 포도나무의 수령을 관리한다. 또한 양조 발효 과정에서 중요한 온도 조절에는 태양열과 지열 에너지를 사용하고 자체 하수 처리 시설을 개발하는 등 탄소배출량을 줄이고 미래에도 유지하기 위한 현대적 방식의 기술 개발을 거듭하고 있다. 한편 메독 지역의 소규모 포도 재배업자들이 모인 와인 공동 생산자 조합 중 규모가 가장 큰 ‘유니 메독’에서는 새로운 브랜드를 개발하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포도 재배 전문가인 조합원들이 경작한 포도를 공급하면, 조합에서는 양조와 마케팅 유통 등의 단계를 공동으로 맡는다. 가져온 포도의 질에 따라 지불하는 가격이 달라지기 때문에 조합원들은 포도의 품질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조합은 노하우와 기술을 축적해 공유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경작은 소규모 가내농업 방식, 양조와 행정 및 유통은 상업화된 방식의 장점만 취합한 셈이다. 유니 메독은 마치 신세계 와인인가 싶을 정도로 젊은 이미지의 브랜드를 매년 자체 개발하고 있기도 하다. 대개 전통적으로 샤토가 그려진 메독 지역의 레이블과 다르게 신선한 일러스트레이션이나 대담한 디자인을 채택하는, 저렴한 가격에 좋은 품질의 와인들이다.
프랑스 와인의 레이블에 종종 등장하는 ‘샤토’ 는 그야말로 성이나 저택의 규모도 있고 아담한 농장 크기도 있지만 대개 거기 사는 사람들이 와인을 만드는 진짜 장소다. 메독에서 만난 와이너리 사람들 가운데는 할아버지대 이전부터 포도밭 밖으로는 눈도 안 돌려본 사람도, 대학에서 농업을 가르치다가 은퇴해 작은 포도 농장을 매입한 사람도 있었지만 자신의 포도와 와인에 대한 자긍심만은 같았다. 전통과 역사, 기술과 철학, 자연과 노동… 그들에게서 와인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메독 와인을 많이 마셨다. 비싼 것과 싼 것, 오래된 것과 새 것, 가볍고 경쾌한 것과 묵직하고 향이 강한 것을 이 끝과 저 끝에 놓으면 넓고도 넓은 그 사이가 촘촘하게 찰 정도였다. 이 다양함이야말로 와인을 어렵게도 재밌게도 만드는 점이고, 바로 메독 와인의 매력이기도 하다. 당신이 어떤 레드 와인을 원하고 상상해도, 메독 안에 다 있으니까.
- 에디터
- 황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