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여자들의 모임을 시시콜콜한 수다의 자리로 치부하지 말 것. SNS와 오프라인을 아우르는 여성 공동체에는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한 기쁨은 물론 열정 어린 공유와 박애주의적 코드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다이어리에 적어놓은 중요한 메모 하나. 친구의 노팅힐 맨션에서 열리는 성대한 생일 파티 일정이다. 이 파티엔 오직 여자들만이 초대되었고 남자는 절대 끼어들 수 없다. 파티의 여주인공은 커리어가 탄탄한 40대 출판인으로 그녀는 이날 초대된 모든 친구들에게 ‘제3세계에 여학교를 설립하자’는 선의의 기부 운동을 제안했다. 파티의 화제는 자선 활동에서부터 시작해 아이들 양육 그리고 글루텐 없는 건강한 라이프스타일로 이어졌다. 게다가 생일 파티의 답례로 나눠주는 선물꾸러미 속엔 딸들과 함께 볼 수 있는 DVD(곤경에 처한 여성들과 사회적 문제에 관련된)도 포함되어 있다. 끝으로 다들 서로를 따뜻하게 껴안으면서 조만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여자들끼리의 조찬, 여자들끼리의 피트니스 클럽에 이르기까지, 마치 트렌드처럼 번져가는 이 여자들끼리의 모임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은 어떤 것일까? 남자가 없다는 것에 대한 실망감, 아님 오히려 더 짜릿한 흥분과 쾌감? 아마도 처음으로 이 모임에 초대된다면,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무엇을 입을 것인가?’에 대한 부담감에 약간의 패닉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자들만의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택하고 보여주어야 할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기본적인 걱정거리가 해결된 후엔 옆자리 남자들을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이, 여자들끼리의 공통 화제거리로 맘껏 떠들 수 있다는 묘한 흥분과 안도감이 몰려온다. 어쨌든 에스트로겐으로 넘쳐나는 이 공간은 ‘여자로서의 나’를 재평가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스텔라 매카트니, 귀네스 팰트로, 케이트 모스처럼 지구상의 패션계를 들었다 놨다 하는 슈퍼우먼들의 정기 모임이나 웨스트 런던의 맨션에서 파자마 파티를 연 나탈리 마스넷(온라인 쇼핑 사이트 네타포르테 회장)의 경우를 떠올려보라. 또 본드걸들의 집회를 방불케 하는 포피 델레바인의 걸스 파티에서 인스타그램을 통해 퍼져 나간 카라 델레바인, 시에나 밀러, 알렉사 청 등의 쿨한 모습은 숱한 여성의 부러움을 샀고, 이는 수백만 개의 ‘좋아요’와 댓글에 반영됐다.
“난 여자들끼리의 이벤트에 강한 스릴과 전율을 느껴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하들리 프리먼(Hadley Freeman)의 말이다. “왜 이들은 인류의 50%에 해당하는 남자들을 배제할까요? 실제로 여자들끼리의 밤 외출 혹은 여자들끼리의 티타임을 시시한 수다 자리 정도로 치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에요.” 프리먼은 ‘굉장히 광범위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말한다. “여자들끼리는 남자들이 결코 알 수 없는 묘한 코드를 공유해요. 파티에서 마주친 여성에게 그녀의 H&M 이자벨 마랑 컬래버레이션 스커트를 칭찬한다면? 그녀는 답례로 당신의 멀버리 백에 아낌없는 찬사를 쏟아부을 거예요. 난 이렇게 우리끼리 공유할 수 있는 박애주의적 코드가 너무 좋아요. 얼핏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서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가장 인류애적 방식이니까요.” 여성 공동체는 서로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를 토대로 한다. “둘 혹은 여럿이 뭉치는 그 어떤 형태로든지, 여자들끼리의 데이트는 다양한 기쁨과 흥분을 안겨주죠.” 패션 아이콘인 로라 베일리(Laura Bailey)의 말이다. “난 그녀들의 이야기, 충고, 뷰티 팁에 늘 목말라해요. 남자친구들 역시 이 모임엔 결코 초대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죠. 내게 여자들끼리의 저녁 식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중요한 시간이에요. 물론 당연히 이건 인생에서 남자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죠. 사랑과는 또 다른 맥락인 우정을 소중히 여기고 동성끼리 좀 더 가깝게 연결되는 과정이니까요.”
절친끼리 모여 짤막한 휴식 시간을 갖는 것은 삶의 소소한 기쁨이다. 남자들이 프리미어 리그나 군대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들끼리 소파에 앉아 에씨 매니큐어에 대한 수다를 꽃피우는 건 마치 중력의 법칙처럼 자연스러운 이끌림이다.
여학생 클럽을 방불케 하는 이 모임은 이제 하나의 ‘문화’로 발전해가고 있다. 트위터에 로그온하면 언제든지 <가디언>의 편집장 카스 바이너(Kath Viner)의 토론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여류작가 도로시 파커의 유명한 ‘라운드 테이블(Round Table)’을 연상시키는 이 21세기판 토론장에서는 유머와 독설의 여신 케이틀린 모란, 방송인 로렌 라번, 카밀라 롱, 인디아 나이트, <인디펜던트> 칼럼니스트 그레이스 덴트 등을 비롯해 다양한 여류인사들의 심도 높은 토픽을 만날 수 있다. 일례로 작가인 줄리아 홉스봄(Julia Hobsbawm)은 트위터에 이런 말을 남겼다. “현대의 이상적인 결혼에 관련된 케이틀린 모란의 글을 읽고서 눈물을 흘렸다. 정말 아름다운 관점에서 쓰여진 칼럼이다. 또 그레이스 덴트의 칼럼은 어떤가? 그녀는 내게 교통체증 속에서 문득 다리 왁싱을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이들의 주제는 뷰티 케어나 불감증에서부터 반유대주의나 넬슨 만델라의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광범위하다. 게다가 리트윗을 통해 끊임없이 정보의 또 다른 공유와 해체와 강화의 과정이 이어진다.
이처럼 여자들만의 공동체는 가벼움과 진지함 모든 것을 아우르는 온갖 테마의 출현이 가능한 곳이다. 물론 하트로 남발한 앙증맞은 이모티콘이나 #dreamdates, #gorgeousgirls 같은 낯간지러운 해시태그 또한 존재한다. 나 역시 인스타그램을 통해 절친들의 시끌벅적한 수다나 쇼핑 아이템에 키스를 날려보내거나, 정성스레 땋은 헤어스타일 혹은 모공 없는 완벽한 피부 연출법에 격한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이곳에서의 행동은 흡사 여고생 무리와도 같다. 서로 물어뜯고 할퀴는 치열한 경쟁이나 비참함보다는 열정 어린 공유가 존재한다. 특히 여학교를 나왔다면 또래의 소녀들이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사 청과 카라 델레바인 같은 잇걸들의 데일리 룩에 열광하고 디자이너들이 벌이는 애프터 파티에 온 스타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로라 베일리 역시 마찬가지다. “난 인스타그램을 통해 가상의 여자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해요. 다양한 생각들을 빠르게 교환하고 훌륭한 취지나 새로운 비즈니스에 관련된 아이디어도 떠올려요. 게다가 단순히 샤넬백이나 아크네 부츠가 담긴 스냅샷 스토리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여자들은 단박에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어요. ‘와, 스타일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뜻하는 바를 이루시길! 사진들이 정말 보기 좋아요. 진짜 근사해요’ 등등 수많은 격려의 말이 쏟아지죠.”
하지만 진정한 여성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한 여학교 시절과는 다른 인생의 굴곡이 이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로 성숙하게 주고받는 피드백이 없다면 여자들끼리의 안정적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다. 하지만 70년대 후반의 여성 운동과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점은, 과거의 급진적인 이론과 딱딱한 틀은 거의 사라졌고 다들 스마트폰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워요.” 스텔라 매카트니의 말이다. “우리 이전 세대의 많은 것들은 이미 흘러갔고 세대 간의 변화도 아주 뚜렷하죠. 게다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대의 변화 가능성도 잠재되어 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우리가 ‘팀’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인류의 절반인 이성도 사랑하고 포용하는 동시에, 여성들 스스로를 지지할 수 있어야 하죠. 그래야 진정한 파워가 생겨나는 것이니까요.” 실제로 우린 귀네스 팰트로의 완벽한 몸매와 라이프스타일에 부러움과 질투를 보내면서도, 그녀가 자선활동의 일환으로 자신의 옷을 경매에 내놓는 순간, 전 세계의 고통받고 있는 불우한 아동에 대한 경각심이 생겨나는 한편 새로운 동지애가 결성됨을 느낄 수 있다.
“동지애를 자극하는 성공한 여성들이 자신의 파워를 통해 박애주의를 실천하는 문화가 발전하고 있어요.” 자선단체 키즈 컴퍼니(Kids Company)의 창설자 카밀라 바트만겔리지(Camila Batmanghelidjh)의 말이다. 늘 터번을 쓰고 있는 그녀는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 파키스탄의 여성 인권 운동가)와 더불어 여성공동체의 강력한 후원자다. “그저 찬사의 대상이 된다는 건 부질없는 일에 불과해요. 여성들은 스스로의 브랜드 파워를 선의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하죠.” 그녀는 TV 쇼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의 호스트 아만다 드 카드넷(Amanda de Cadenet)을 예로 든다. 이 자기 고백적인 여성 전용 토크쇼는 현대 여성들이 탐구하고 헤쳐 나가야 할 수많은 미션, 양육, 파워 등에 관련된 다양한 테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성’은 나의 영원한 주제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드 카드넷은 전화로 이야기를 전해왔다. 그녀는 다큐멘터리 <미스 리프레젠테이션, Miss Representation>의 제작진과 양성 평등에 관한 토론을 마친 직후였다(절친 데미 무어 역시 드 카드넷 프로그램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다). ‘컨버세이션’ 쇼는 주로 하얀 소파에서 맨발로 진행이 되며 ‘새로운 길을 열다’, ‘사이클을 파괴하라’, ‘스스로의 어색함과 나약함을 깨드려라’ 등의 토픽을 다루고 있다. 또 제인 폰다에서 드 카드넷의 또 다른 절친인 귀네스, 아리아나 허핑턴, 레이디 가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사들이 출연하는 데다가 18개국에서 10개국어로 방영되고 있다. “쇼를 통해 여성들의 문제를 독점적으로 다루는 디지털 플랫폼과 환경을 만들고 싶었어요. 난 20세를 넘어서야 비로소 여성의 가치와 아이를 갖는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남자들은 내 삶이 아니고 여자들이 내 삶이에요. 남자들은 그저 왔다가 갈 뿐, 여성들은 늘 곁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최근 나는 울슬리 레스토랑에서 여자들만의 브런치를 즐기며 서로 희소식과 가벼운 가십거리를 주고받았다. 좋은 시간일수록 정말 쏜살같이 흘러가버리는 법, 2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버렸는데 우린 이날 조지 부시와 버락 오바마 외에는 어느 누구도 남자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브런치를 마친 직후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벌써부터 봄이 만발한 것처럼 가벼웠다. 조만간 인스타그램에 올린 브런치 사진을 향해 쏟아질 사랑스러운 이모티콘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면서! 글 | Christa D’Souza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정진아
- 기타
- PHOTOS / WWD/MONTROSE, COURTESY OF POPPY DELEVIGNE, KATE FOLEY, HANNELI, TAYLOR TOMASI HILL, CHELSEA LEY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