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패션계의 애정과 헌사를 독차지하는 건 전설적인 톱모델이나 우아한 여배우가 아니다. 파격적인 무대로 구설수에 오른 팝계 악동과 가십을 끌고 다니는 TV 스타 출신의 초짜 모델이 새로운 패션 헤로인으로 떠오르고 있으니까. 오늘날 지극히 대중적인 뮤즈와 콧대 높은 하이패션계가 손을 맞잡은 흥미로운 패션 요지경 속으로.
지난 2월 밀라노 F/W 패션위크 기간, 제레미 스콧의 데뷔쇼로 이슈를 모은 모스키노 쇼 현장. 20분 정도 미뤄지는 게 당연한 패션위크 문화에서 이례적으로 40분 이상 지연되는 찰나, 쇼장 입구가 시끌벅적해졌다. 돌아보니 리타 오라가 쇼장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 반쯤의 환호와 반쯤의 야유를 받으며 카메라 부대가 위치한 캣워크에 올라와 인증샷을 찍은 그녀는 생기발랄하게 자신의 퍼스트로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여전히 모스키노 쇼는 시작하지 않았다. 이윽고 케이티 페리가 모습을 드러냈고, 당당히 캣워크 위에 올라 불평을 퍼붓는 카메라맨들을 향해 ‘까불면 혼나’라는 식의 제스처까지 날리는 그녀라니. 마침내 예정 시간을 50분이나 훌쩍 넘긴 뒤 시작한 모스키노 쇼는 맥도널드 패러디와 스폰지밥 등 대중문화 코드를 차용한 룩을 가득 쏟아냈다. 마치 리타 오라와 케이티 페리 같은 팝 아이콘을 겨냥한 제레미 스콧의 헌사인 양 말이다. 그렇게 수백 명의 VIP와 프레스를 기다리게 한 초유의 당당함은 그녀들이 단순히 팝스타가 아닌, SNS를 통해 대중의 마음을 흔들며 패션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뉴 패션 헤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요즘 패션계를 보면 유서 깊은 패션 하우스들이 ‘뮤즈’라고 부르짖는 아이콘의 잣대가 크게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다. 페라가모 슈즈와 인연을 맺은 오드리 헵번이나 구찌의 재키 백에 영감을 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디올의 레이디 디올 백을 탄생시킨 고 다이애나 비 등 고결하고 우아한 아름다움과 명성을 지닌 옛 패션 아이콘에 비하면 오늘날의 뮤즈들은 천박하기 그지없다. 사실 다시 생SIK각해보면 장 폴 고티에의 콘브라로 당시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모은 마돈나가 오늘날 팝스타 패션 무리의 원조격이고, 케이트 모스도 90년대 헤로인 시크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반항적인 패션 아이콘이었으니 그게 비단 오늘의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같은 기준을 들먹이기 전에 사회는 끊임없이 진화와 퇴보를 거듭하며 변화하고, 그 맥락에서 동시대와 호흡하는 패션의 자화상을 짚어보는 수밖에. 하지만 다시 보아도 요즘의 경향은 정말 새롭다.
카메라를 향해 백태가 낀 혀를 길게 내놓는 걸 즐기는 팝스타 마일리 사이러스만 봐도 그렇다. 얼마 전 공연에선 그 특유의 시그너처 ‘메롱 페이스’를 활용한 무대 장치를 배경으로 거침없는 저질 댄스를 선보이고, 공연 중 객석에 앉아 있던 케이티 페리와 돌발 키스를 해 동성애자 이슈를 낳았으며, 그전에는 한 남자 가수와 함께(그것도 유부남인)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춤판을 벌여 그를 이혼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할수록 패션계의 반응은 오히려 열광적이다. 사이러스는 다름 아닌 3월호 미국판 더블유의 커버걸 자리를 꿰찼으며, 독일판 보그 역시 커버를 내주는 등 하이패션계의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대표적인 하이패션 팝스타는 누가 뭐래도 리애나. 어마어마한 인스타그램 추종자를 이끄는 그녀는 이번 F/W 시즌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갓 선보인 따끈따끈한 프라다의 뉴 룩을 입고 파리의 미우미우 쇼장에 등장하는 한편, 파리 패션위크의 노른자인 샤넬, 스텔라 매카트니, 발맹, 랑방 등의 퍼스트 로를 순회하며 디자이너들과 애정 넘치는 포옹 신을 연출하기도 했다. 실제로 패션을 사랑하는 팝 아이콘으로서 디자이너들과 깊은 친분을 자랑하는 그녀의 모습은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스텔라 매카트니, 알라이아, 올리비에 루스테잉 등과 함께한 친근한 사진첩에는 ‘우리 동네 패션돌’과 같은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리틀 리애나’로 불리는 리타 오라 역시 샤넬의 칼 라거펠트가 아끼는 뮤즈로서 샤넬 쇼에 초대받고, 샤넬의 룩과 액세서리를 무대에서 즐겨 착용하는 걸로 유명하다. 마일리 사이러스 역시 샤넬 백팩과 퍼 액세서리를 즐겨 착용한다는 점에서(공식적으로 브랜드가 인정한 뮤즈는 아니지만) 클래식한 헤리티지와 진보적 성향을 동시에 추구하는 패션 하우스들의 현실적인 변모를 느낄 수 있다. 또 캘빈 클라인 컬렉션이나 베르사체 역시 리타 오라와 마일리 사이러스가 자신들의 드레시한 의상을 입은 모습을 연이어 보도 자료로 내놓으며 팝 아이콘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편 모델계 일각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TV 프로그램이나 가십란의 입김을 얻어 유명세를 탄 신진 모델들 말이다. 일례로 새로운 헤로인의 이슈화에 일가견이 있는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가 이 흐름에 한몫을 하고 있다. ‘리틀 마돈나’라고 불리는 헤로인 시크의 팝스타 스카이 페레이라를 마크 제이콥스 2014 S/S 캣워크에 내세운 것과 2013 F/W 쇼에서 릴리 맥미나미에게 상의를 탈의한 워킹을 권유해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사례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번엔 켄달 제너다. 켄달은 모델이기 전에 킴 카다시안의 이복 여동생이자, 미국에서 인기몰이 중인 리얼리티 패밀리 프로그램 <카다시안스>에 등장한 TV 스타다. SNS를 통해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레이스 시스루 룩을 입은 셀피 컷을 올려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는 등 철없고 용감한 캐릭터로 벌써부터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녀. 마크가 이런 그녀에게 새 2014 F/W 시즌의 시스루 룩을 입혀 런웨이에 내세우자 두 언니이자 셀레브리티인 킴 카다시안과 클로에 카다시안은 SNS를 통해 “최고로 멋지다, 내 동생”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어서 런던의 자일스와 파리의 샤넬 무대까지 휩쓸었으니 가히 이번 시즌의 라이징 모델로 꼽힐 만한 그녀. 나아가 미국판 보그는 마크 제이콥스 쇼에 서자마자 제너를 데리고 바로 인스타그램 화보를 찍어 셀레브리티이자 모델로서 그녀의 대중적 가치, 다시 말해 SNS 파급 효과를 누리기도 했다.
또 카린 로이펠드는 또 다른 리얼리티 시리즈인 <리얼 하우스 와이프> 비벌리힐스 편의 주인공으로 유명 음반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의 부인인 욜랜다 포스터의 딸, 지지 하디드를 낙점했다. CR 북의 지난 커버 걸인 케이트 업튼과 비슷한 종류의 백치미를 지닌 그녀는 톱모델 린지 윅슨과 함께 브루스 웨버의 카메라 앞에 선 채 이번 CR 패션 북의 커버 모델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단순히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드러낸 비키니 차림으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화끈한 지면을 채우거나 게스의 광고 모델로 활약하는 것에서 나아가하이패션계에 대단한 신고식을 치른 셈.
콧대 높고 평가에 인색한 하이패션계가 이토록 열광적으로 이들을 환대하는 까닭은 도대체 뭘까. 우선 오늘날 무시할 수 없는 SNS의 파워풀한 영향력을 지닌 이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차가운 경제 논리 외에도 열정적인 이들을 패션계로 끌어들인 이유는? 여기서 시간을 초월한 두 명의 어록을 살펴보자. 1913년, 디자이너 폴 푸아레는 “모든 여성은 자기만의 개성을 발견하고 자기만의 스타일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대다수 여성은 자신만의 개성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단 단 하나의 생각을 좇아가기 바빠요”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오늘날 케이티 페리의 말. “부모님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고, 진실성을 갖고 있으며, 타인을 존중하고, 음… 그리고 브리트니처럼 되지만 않는 한 내가 뭘 하든 개의치 않죠.” 이 둘을 견주어보자면 패션계가 오래전부터 부르짖던 최고의 아름다움, 즉 자유로움과 당당함이란 조건에서 뉴 패션 헤로인들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기상천외한 돌발 행동도 요지경과 같은 패션계의 아량으로 덮어줄 만한, 아니 오히려 부추기고 싶은 매력이 있으니. 자, 이제 당신도 하이패션의 장벽을 가차 없이 허문 그녀들의 손을 들어준 채 더없이 새로운 잣대로 패션을 만끽할 때가 되었다. 바로 오늘날 패션 파워 게임의 승자인 그녀들처럼.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박연경(Park Youn Kyung)
- 아트 디자이너
- Art works by PYO KI S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