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을 흩뿌려놓은 로브스터, 비밀스러운 숲 속의 몬스터, 핑크빛 달… 빛나는 아이디어와 천부적 재능을 바탕으로 상상력 넘치는 판타지를 연출하는 세 명의 패션 세트 디자이너를 만났다.
천부적 재능과 엄격한 작업 철학을 접목하는 게리 카드 (Gary Card)
게리 카드(31세)가 흥미를 느끼는 세트 디자인은 흔히 클래식한 소파에서 연출하는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 “내 작업은 주로 기괴하고 드라마틱한 세상과 관련되어 있는데, 내가 들여다보고 싶은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요.”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독창적인 비전 덕분에 그는 2002년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하기도 전에 니콜라 포미체티에게 세트 디자이너로 발탁되었다. “그때는 모든 게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니콜라가 늘 문을 두드리며 무언가를 물어왔으니까요.” 카드는 특유의 동부 해크니식 악센트로 과거를 회상했다. “사실 당시엔 잡다한 것을 많이 만들어내는 스타일이었어요.” 올여름 개인 전시회를 열 정도로 광범위한 작업 포트폴리오를 두고서 그가 겸손하게 말한다. 그중에는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컬러풀한 플라스티신(유토)으로 몰딩한 막대처럼 빼빼 마른 외계 생물체를 빠뜨릴 수 없다. “아마도 내가 엄청난 트레키(Trekkie, 스타 트렉 시리즈의 열광적인 팬)라 할지라도 그리 놀라진 않을 겁니다.” 레이디 가가의 월드 투어를 위해 만든 특이한 해골과 뼈 장식물은 <심슨 가족>에도 패러디될 정도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신이 쓴 두꺼운 뿔테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습관이 있는 그는 어릴적부터 뭔가를 만들면서 자랐다. 건축가인 아버지 크리스토퍼는 주말마다 아들을 건설 현장에 데려가 기계 작동법이나 엄격한 작업 윤리에 대해 가르치곤 했다. 크리스토퍼는 아들에게 모험과 재미가 가득한 침실을 위해 계단, 짚 와이어, 도르래 등을 만들어주기도 했다(현재 카드 부자는 함께 협업하고 있다). 크리스토퍼는 패션 사진가이자 게리의 절친인 제이콥 수튼의 해크니 스튜디오도 설계했는데, 게리 역시 이곳에 작은 오피스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 소품들로 가득 찬 다소 어수선해 보이는 선반은 그의 세상을 들여다보는 힌트가 되어준다. 코믹북에서부터 프린스 앨범, 형광색 배경지의 거대한 더미에 이르기까지, 그는 풍선껌 핑크빛 달을 가리키며 작년 잡지 촬영 때 사용한 것이라 설명한다. “나에겐 잊지 못할 순간이었어요. 팀 워커는 천부적인 스토리텔러예요. 그가 촬영한 노란 잠수함과 비틀스 테마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이키델릭한 판타지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유쾌하고 컬러풀하며, 아주 그래픽적이죠!”
펑키한 감성과 경쾌한 색감, 의외의 소품을 탁월하게 조화시키는
애나 번스(Anna Burns)
애나 번스의 스튜디오는 이스트 런던에 있다. 한때 지하실을 갖춘 상점이었던 이곳은 판자로 덧댄 창문에 난방 장치도 되어 있지 않았다. 뒤쪽으로는 키치스러운 무대 커튼이 드리워져 있으며, 그 위로는 네 개의 반짝이는 디스코 볼이 장식되어 있다(집 안 곳곳에는 32개의 디스코볼이 더 있지만 이곳에 가장 화려한 버전이 달려 있다). 번스의 디자인 철학은 ‘잘못된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으로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어딘가 불편하고 기이하지만 절대 추하지 않은 것을 만들길 좋아해요”라고 이야기한다.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붉은 로브스터가 포함된 주얼리 화보나 포토그래퍼 토마스 브라운과의 협업으로 만든 소용돌이치는 우산 설치물, 발렌시아가 남성복 캠페인에 사용된 파워풀한 배경막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을 기묘하게 조화시키는 재능을 타고났다. 톰보이스러운 독특한 분위기의 번스는 오늘 페이드 진에 끝이 뾰족한 화이트 슈즈를 신었다.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책들로 가득한 방에서 포즈를 취한 그녀(39세)는 첫아이를 출산한 두 달을 제외하고는 지난 12년간 쉴 새 없이 세트 디자이너로 활동해왔다. 이 길로 들어선 건, 윔블던 예술 대학에서 파인 아트를 전공하던 중 미국의 80년대 펑크 아티스트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부터다. “특히 토니 아워슬러, 폴 매카트니, 마이크 켈리 등은 내 생각과 작업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어요.” 독일 출신의 포토그래퍼 마이클 바움가텐과의 작업 역시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두 사람은 오랜 협업자로서 2009년 이미지와 시, 위트가 어우러진 사진집 <The Deformers: Attempted Deception>을 발간했고, 단편 필름, 라이브 액션, 애니메이션 등을 포함해 다양한 분야에서 협업하고 있다. 그녀의 작업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점은 무엇보다도 ‘콘트라스트’를 꼽을 수 있다. 스튜디오 뒤편에는 핑크색의 유리 해골, 아기 실물만 한 크기의 어릿광대, M16 라이플총을 삼각대처럼 세워 만든 핑크 화분대, 다양한 책을 비롯한 방대한 양의 소품이 흩어져 있다. 그녀는 19세 때 처음으로 사격을 해보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위협적인 소품일지라도 얼마든지 여성스럽고 경쾌하게 재해석할 수 있어요. 물론 처음의 생각보다 훨씬 터프해 보이긴 하지만요.”
웅장한 스케일과 빛나는 아이디어로 연출된 마법 같은 세트를 짓는
앤디 힐먼(Andy Hillman)
작품 속에서만 판단한다면, 포토그래퍼 팀 워커의 사진 속 풍경을 책임지고 있는 세트 디자이너 앤디힐만은 ‘거대한 몽상의 세계 라라랜드에서 가망 없는 로맨틱을 꿈꾸는 낭만주의자’처럼 보인다. 조 말론 향수 광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만들어낸 야생 블루벨 꽃이 가득한 공간과 흰토끼들을 본다면 이런 생각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그는 다르다. 울 모자에 닥터 마틴 워커를 신고 있는 힐먼(34세)은 마치 중세 시대 벌목꾼을 연상시킨다. “저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에 살고 있어요. 단지 나 자신을 표현할 또 다른 자유로움을 갖고 있을 뿐이죠.” 그는 동료 세트 디자이너인 앤디 나이트(Andy Knight)의 널찍한 웨어하우스에서 거대한 프로젝트들을 기획한다. 이곳에서 용접을 하고 톱질을 하고 페인팅을 하면서 남다른 스케일의 대규모 설치예술품을 탄생시킨다. 그의 뒤로 보이는 거대한 퍼스펙스(아크릴 유리) 소재의 붉은 장미꽃은 도버 스트리트 마켓 상하이점에서 의뢰해 만든 것으로, 노란 가시와 에메랄드 잎사귀가 매력적이다. 힐먼은 주로 “올드 패션의 낭만적인 심벌과 하이테크 재료 사이의 콘트라스트로부터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알렉산더 매퀸의 화보에 등장한 담배를 피우는 해골 등의 소형 프로젝트는 대개 이스트 런던의 사무실에서 작업하는 편이다. 그가 늘 주의하는 건 특정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2013년 미쏘니 F/W 캠페인에선 거센 바람이 부는 해변가에서 모델을 은신시킬 거대한 3D 주춧돌을 만들었고, 지난 9월 크레이그 맥딘과 촬영한 패션 화보에선 목가적인 세팅을 배경으로 도시 건축물이 찍힌 큐브들을 늘어놓았다. 웅장한 스케일의 작업일 경우, 종종 그 특성상 재료의 재활용이 이루어진다. 팀 워커와 협업으로 연출된 거대한 플라스틱 인형들은 2012년 멀버리 캠페인의 몬스터를 만드는 뼈대로 거듭났다. 디자이너는 당시 털북숭이 몬스터를 만드는 과정이 생각보다 힘들었다고 털어놓는다. “북슬북슬한 생물체를 만드는데 그렇게 세부적이면서도 복합적인 과정이 필요할 거라고 예상치 못했어요.” 힐먼의 원래 꿈은 숲 속에 헛간을 짓고 가구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 가지 제품만 계속 만들어내기엔 제 인내심이 턱없이 부족했죠.” 그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한다. “날 흥분시키고 자극하는 건 끊임없이 또 다른 도전을 생각해야 하는 이런 일이에요.”
글|Viloet Henderson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정진아
- 포토그래퍼
- RICK MORRIS PUSHINSKY, JASON LLOYD EV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