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에서 보낸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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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관심사는 ‘어디’ 보다는 ‘어떻게’로 옮아왔다. 여행이 쉽고 흔해진만큼 누구나 가는 도시에서 나만의 경험을 만들고 오는 게 중요해졌으니까. 하지만 그 목적지가 남극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남극에 가기 전에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이 뭐냐 물으면 언제나 빙하를 깬 얼음으로 위스키 온더록스를 만들어 마셔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술친구들의 부러움을 가장 많이 샀던 사진.

솔직히 남극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눈과 얼음과 펭귄뿐이었다. 물론 그곳에 가서 보다 많은 것들을 만났지만 여전히 나에게 남극의 이미지는 펭귄들이다. 펭귄들과의 첫만남.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 섬에는 젠투펭귄과 턱끈펭귄 두 종류가 서식한다. 가끔 길 잃은 아델리펭귄이 기지 주변을 서성거리는데 대개는 '난 누구, 여긴 어디...'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펭귄은 확실히 고양이와 닮은 구석이 있다. 왜 이런 동물이 존재하는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그 존재만으로 위안이 된다는 점에서.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하지만 확실한 오락거리 눈썰매. 언제나 눈썰매용 비닐포대를 지참하고 다닌다. 사진의 주인공은 뮤지션 이이언.

남극의 눈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오염되지 않은 순백은 성스러운 기분마저 들게끔 한다. 저질 체력 때문에 등반은 힘들어도 눈밭을 걷는 기분은 언제나 즐겁다.

남극에서 맞은, 밤이 찾아오지 않는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기지 앞 바다를 가득 메운 유빙들. 최고의 성탄 선물이었다.

1년에 한 번 야외 바비큐 파티가 열리는 새해전야. 얼음과 불, 물과 땅. 남극의 새해 풍경.

세 번째 펭귄마을을 방문했을 때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꽤나 심한 눈보라를 만났다. 모두들 꽁꽁 얼었고 대피소에서 끓여 먹은 라면은 구원의 음식 그 자체였다.

남극에서의 이동수단은 주로 조디악이라는 고무 보트가 담당한다. 아르헨티나 카를리니 기지에서 찍은 풍경.

기지에서 1시간 정도 걸으면 거대한 빙벽이 나타난다. 멀리서 보는 빙벽과 눈앞에서 보는 빙벽은 아예 다른 존재 같다. 떠나기 전날 오후 조용히 조우한 푸른 벽.

떠나는 날 밤, 기지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겼다. 조만간 새로 지을 건물이 들어서면 모두 사라질 곳들이다. Andy Khun 수진이와 함께 다녀감.

작년 12월부터 올해 1월 사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극지연구소가 주최한 남극 노마딕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예술가 자격으로 남극에 다녀온 것은 아마도 일생에 한 번뿐일 경험이 될 거다. 적어도 과학자나 다이버, 정비기술자로 직업을 바꾸지 않는 한. 다녀온 후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도) 그곳이 어땠느냐고 물어온다. 사진으로 보여준 그대로냐고. 대개는 그저 좋았다고 답한다. 사진 속 풍경 그대로라고 답한다.

물론 나의 답은 거짓이 아니다. 그곳의 풍경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고 나는 네모난 프레임 속에 부지런히 그 풍경을 쓸어 담았으니까. 적어도 사진은 프레임 속에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프레임 바깥에 있는 것들을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더블유의 독자들을 위해 무수한 사진들 속에서 몇 장의 사진을 골라봤다. 이 사진들 속 남극은 거짓이 아닌 진짜 남극이다. 눈과 얼음과 펭귄들과 약간의 동물들과 식물들과 사람들. 프레임 바깥의 것들은 아쉽게도 이 지면에 소개하기 힘들 것 같다. 그것들은 보다 추상적이고 어둡기도 하며 때로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바람이나 죽음 혹은 삶과 죽음의 또렷한 사이클, 그리고 외로움 같은 것. 나는 아름다운 풍경과 좋은 사람들 속에서 전에 없던 우울증을 겪었다. 누구도 주지 않은 상처를 느꼈고, 그것은 여전히 아물지 않을 흉터처럼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남극에서 보낸 그 여름은 내게 멋진 기억으로 남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 남극을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아마도 당신에게 이런 농을 던질 것이 분명하다. 글∙사진 | 이강훈(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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