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스타, 엔터테이너와 아티스트, 디자이너와 발레리나, 영화감독. 유럽 매체와의 만남에서 그들이 드러낸 모습은 개인의 영광인 동시에 지금의 그들이 있게 한 한국 문화의 성취이기도 했다. 한국의 눈부신 도약에 주목한 이탈리아 <L’uomo Vogue>의 특집 인터뷰를 더블유가 독점 공개한다.
드라마의 여왕 김희선
지난 20여 년간 한국의 변화는 엄청났다. 극동아시아의 가장 보수적인 국가에서, 관대하고 역동적인 나라로의 급격한 진화가 일어난 것이다. 김희선은 바로 이 변화의 중심에 있는 X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시간에 퇴색되지 않는 미모를 지닌 이 1977년생 여배우는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과 그것이 이끈 90년대 한국 경제 성장의 혜택을 받으며 윤택하게 자란 세대의 상징과 같다.
15세에 광고 에이전시에 캐스팅되어 모델, 그리고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김희선은 빠르게 스타덤에 올랐다.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도 없었지만, 언제나 뛰어들 용기는 있었던 것 같아요.” 김희선은 이렇게 당시를 회상한다. 연기를 배운 적도 없이, 그리고 주어진 부분을 준비할 시간도 거의 없이 그녀는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재빠르게 남들을 관찰하고, 실수하는 걸 겁내지 않는 법을 배워갔다. “더 잘할 수 있었냐구요? 아마도 그랬겠죠. 하지만 나는 늘 내 방식대로 해왔고 지금까지 꽤 괜찮았어요.” <프로포즈> <미스터Q> <토마토> 등의 드라마를 거치며 그녀는 드라마 스타이자 최고의 셀레브리티로 명성을 얻었다.
김희선이 맡은 캐릭터는 주로 그녀 세대를 반영한 것으로, 한국 여성에게 고전적으로 부여되던 성격보다 한결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여배우가 술을 마신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한다거나, 가십과 스캔들로 신문 1면을 장식하면서도 호감을 잃지 않은 것도 김희선 때에 일어난 사회적 변화였다. 이제 결혼해서 다섯 살 난 딸을 두고 있는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자면, 20년 전의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이었는지 새삼느낄 수 있는 부분이죠.”
패션의 뉴웨이브 Juun. J
“한국 패션은 지금 글로벌 마켓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됐을 뿐 아니라, 디자이너들에 대한 관심도 커져가고 있어요. 일본 아방가르드 스타일 디자인과는 다르면서, 서구화된 디자인과 동양적인 디테일을 아우르고 새롭게 해석하는 웰메이드 컬렉션을 보여주고 있지요. 패션을 대하는 한국인의 애티튜드 역시 아주 긍정적이고 트렌디하고요.” 한국 패션의 뉴웨이브는 80년대 초 서구권에서 일었던 바람이나 그를 압도해 파리로 떠나게 한 일본의 물결처럼 거세지는 않지만, 방법론적이고 미학적인 격변을 일으키는 중이다.
론 커스텀의 성공을 바탕으로 2007년 Juun. J 컬렉션을 론칭한 그는 ‘빛의 도시’ 파리에서 언론과 바이어들의 찬사를 받으며 데뷔했다. 삼성 제일모직의 파트너라는 거물로 성장한 Juun. J는 이제 경쾌하고도 거침없는 행보를 지속하고 있다. 테일러링 테크닉에서 숙련된 기술을 바탕으로 구조와 해체에 솜씨를 보이는 그는 특히 트렌치코트와 같이 고전적인 옷장에서 꺼낸 아이템을, 마치 일그러진 렌즈를 통해 바라보듯 능란하게 변형해내는 데 뛰어나다. 젊은이들의 패션에 대한 관심, 그리고 스트리트 문화는 Juun. J가 ‘스트리트 테일러링’이라고 부르는 스타일로 나타났다. 과장된 볼륨, 영웅주의와 양성성의 복합적인 믹스는 지난 시즌 의상에서 드러난 또 다른 특징이다.
“남성성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에 대한 태도와 생각은 사람마다 달라요. 저는 남성성이란 긍정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패션에서는 젠틀하고 너그러운 애티튜드를 갖는 것.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진정한 영웅은 무기, 힘, 근육이 아닌 감성과 논리를 지닌 남성이에요. 여성도 마찬가지고요.” 이 디자이너만이 갖고 있는 자신의 패션 미학은 이렇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요소를 섞는다’는 걸 중요시합니다. 남성적이되 여성적이고, 강하지만 부드럽고. 실루엣은 강렬하지만 디테일에는 정교함이 있고. 클래식한 동시에 미래적이고요. 두 가지가 어울리면 Juun. J의 새로운 룩이 생겨요. 전 유일무이한 미를 찾으려고 노력해요.”
집을 등에 진 유목민 서도호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아티스트 가운데 한 사람인 서도호는, 집과 주거 공간을 개인의 정체성, 그리고 개인과 사회의 관계라는 아주 밀도 높은 주제에 대한 메타포로 삼는 작가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부모님과 가족은 지금도 서울에 있어요. 20대 후반에 뜻한 바가 있어 미국으로 갔고, 뉴욕에서 전업 예술가로 살았죠. 예술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하며 지냈던 기간이라, 뉴욕에서 보낸 시기가 제 커리어에 있어서는 중요해요. 몇 년 전부터는 거의 런던에서 머물러요.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옮긴 거죠. 세 도시는 제게 개인적으로나 예술가로서나 각각 특정 시기를 대표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전 세 도시 모두에 스튜디오를 두고 있고요. 저로서는 세 도시를 왔다 갔다 한다는 느낌보다 각각이 하나의 거대한 집이라는 느낌이 더 강해요. 세 곳 모두 제겐 다른 의미가 있지요.”
지속적으로 옮겨가며 살았음에도, 서도호에게는 고향과의 유대가 매우 강하다. “모든 작품이 한국과 연결되어 있어요. 내가 만드는 모든 것에 내 경험이 반영되니까요. 한국에서 태어나서 거의 30년을 살았는걸요. 한국을 아무리 오래 떠나 있어도, 내 뿌리, 내 배경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어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한국과 더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 같은 작품이 있다. 예를 들어 서도호의 ‘서울 집’ 시리즈는 작가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을 모티프로 한다. 뉴욕에 적응해야 했던 90년대 말에 작가는 편안했던 어린 시절에 그가 살던 한국 전통 양식의 가옥을 낯선 도시로 옮겨와보자는 생각을 했고, 1:1 스케일의 실크로 제작했다. 그리고 이 집을 트렁크에 넣어서 이 도시 저 도시 가지고 다니며 전 세계 미술관에서 전시했다. 그의 최근작으로 11월에 개관한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 ‘매달려’ 설치된 ‘집 속의 집’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다. 이중으로 된, 천으로 만든 집 두 개가 하나로 합쳐지는 작품이다. 집 하나는 작가가 미국에서 처음 살았던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덴스에 있는 18세기 맨션이며, 다른 집은 작가가 어렸을 때 한국에서 살았던 집이다.
“제 작품들은 정체성의 과정을 탐구한다고 하고 싶어요. 제가 흥미를 갖는 것은 개인적인 공간입니다. 나와 함께 움직이는 공간, 또는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지고 다녀야 하는 공간, 아니면 내가 의식도 못하는데 나를 따라다니는 공간. 들어가 있으면 내가 기분이 좋고, 보호받는 것 같고, 편안하고 자유로운 공간. 그리고 내게 강요된, 나를 억압하고 정의하고 소외시키는 공간. 저는 이 두 가지 힘이 합쳐진, 또한 긴장을 이루는 곳인 개인적 공간을 탐구합니다. 제 목표는 개인적 vs. 집단적 같은 안이한 이분법을 피하는 거예요. 그보다는 이 정의의 한계를 묻고 싶어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개인인가, 라고.”
한글의 힘 안상수
디자이너 안상수는 한글을 디지털 세계에 접목해 언어를 통한 한 나라의 문화의 힘을 보여주는 아티스트다. 10월 9일은 대한민국의 한글날로, 1447년 세종대왕이 만든 한국 고유의 문자 ‘한글’의 창제와 반포를 기념하고 기리는 날이다. 최근 10년간 한글의 가치를 높여온 안상수 디자이너, 그의 나라에서 한글날은 단지 어느 대단한 왕의 업적을 기리고 즐기기 위한 국경일이 아니다. 한글날을 만들고 그것을 국경일로도 지정해 기념한다는 자체가 한글이 한국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랜 세월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겪은 나라, 한국에서 한글은 그들의 문화와 독립을 상징한다. 현재 한글은 공식적으로 남한과 북한에서 사용하고 있다.
안상수 디자이너는 커뮤니케이션과 출판 목적의 그래픽 작품이나 포스터 작업을 통해 한글을 그의 연구와 실험의 주요 원천으로 삼았다. 그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한글에 접목하면서 계속해서 한글을 새롭게 그려냈다. 20세 초 미래주의, 구성주의 그리고 다다이즘 작가들이 동서 유럽의 언어를 창조의 재료로 삼았듯, 그도 한글을 통해 디자인 혁신을 일으켰다. 덕분에 서울은 오늘날 그래픽 디자인에 있어 매우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여러 매체나 프로젝트 등을 통해 소개되었으며 올해로 7회를 맞은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타이포 잔치’, 그리고 안상수 디자이너가 설립하고 디렉터로 있는 파주 타이포그래피 학교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래에 한글이 세계적인 문자로서 타이포그래피 연구와 발전을 위한 심벌이 될 수 있을까? “한글은 젊은 글자이며, 매우 뛰어난 문자입니다. 또 과학적이며 언어학적으로 화려한 문자기 때문에 한글은 다방면으로 개발, 적용이 가능하죠.” 안상수 디자이너는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한편, 그는 여러 미디어 매체를 동해 실험하고 즐기는 것을 좋아한다. 최근에는 홍콩 K11의 전시장에서 자신의 프로젝트인 ‘One Eye’의 셀렉션을 선보였다. 어떤 사물 또는 한 손으로 눈 한쪽을 가린 사람의 사진을 찍는 프로젝트다. 안상수는 1988년 이후 자신이 만난 모든 사람을 사진에 담았다고 말한다. “현재까지 3만 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어요. 특별한 의미를 가진 프로젝트는 아니지만, 단순히즐거움을 위한 놀이도 아닙니다.”
인간성의 탐구자 박찬욱
“복수와 폭력이 내 영화의 핵심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사용하는 도구일 따름이죠.” 2004년 <올드 보이>로 관객과 평단을 뒤흔들었으며 쿠엔틴 타란티노가 심사위원장이던 칸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한국의 영화감독 박찬욱은 이렇게 설명한다. <올드 보이>는 복수와 고통, 잔혹함에 대한 그의 3부작 가운데 <복수는 나의 것>과 <친절한 금자씨>사이에 있는 두 번째 작품이다. 박 감독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복수나 폭력보다 내가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남을 탓하지 마라는 거예요. 내 영화의 주인공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일이 잘 안 풀렸을 때 남 탓을하지 않는다는 것. <복수는 나의 것>에서 비극적으로 죽는 소녀가 제 메시지의 한 예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떠난 엄마도, 워커홀릭인 아빠도, 자기를 죽이는 납치범들도 탓하지 않아요. 소녀의 유령은 대신 ‘수영하는 법을 배웠으면 죽지 않았을텐데’ 라고 말하죠.”
연출자로서, 작가로서 박 감독은 자신의 영화 가운데 어느 작품을 가장 아끼는지 고르는 건 불가능하다고 털어놓는다. “한국에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어요. 원래는 아이를 손가락에 비유해서, 자기 아이 중에 더 좋은 아이 더 미운 아이가 없다는 뜻이에요. 예술가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 같아요. 제 작품 중 하나를 고를 수는 없어요. 다 똑같이 아껴요. 하지만 내 영화 중 어떤 영화라도 혹평을 받으면 괴로울 겁니다. 혹평을 받았던 첫 두 영화를 제가 여전히 아끼는 것처럼 말이죠.” 그의 최근작이자 첫 영어 연출작인 <스토커>는 미아 와시코브스카, 니콜 키드먼, 매튜 구드 같은 스타 캐스팅에 필립 글라스, 클린트 만셀이 영화 음악에 참여해 미국에서 제작되었다.
박찬욱은 욕망과 미스터리, 그리고 우아한 스타일이 한데 어우러진 이 스릴러 영화에 적임자였다. “요즘은 개인적인 사진을 찍고 있어요. 사진에 빠진 지는 한참 됐어요.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사진 동아리에 들었으니까. 제 사진의 주제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촬영장의 배우들, 그리고 풍경. 풍경 사진을 찍을 때는 정말 별것 아니지만 초현실적이고 유머러스한 것에 집중하려고 해요.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지만 디지털 카메라랑 관련 장비도 샀어요. 지금은 라이카 렌즈들을 써보고 있고요. 훗날 영화일을 놓게 되면 아내와 차를 몰고 막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을 거예요. 기회가 된다면 어딘가에 발표하고 싶기도 해요. 잡지에 실릴 만큼 섹시한 사진들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웃음).”
시대의 개척자 강수진
한국 발레의 개척자, 강수진의 이야기는 마치 다른 시대의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그녀가 어렸을 적, 한국에 아직은 생소했던 예술인 발레를 소개한 시점으로부터 기껏해야 3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할아버지는 유명한 화가셨고, 어머니는 우리에게 예술이란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어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인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한국 전통 무용에 관심을 가졌어요. 서양식 무용 교육, 정통 발레를 접하기 전까지 말이죠. 그땐 아직 그게 뭔지도 몰랐지만, 발레는 순식간에 날 사로잡았어요. 그 수업은 정말이지 조악했는데도 말이죠. 당시 한국에는 기량을 갖춘 발레 선생님이 없었어요.” 몬테카를로의 클래식 무용 아카데미 디렉터인 마리카 베소프라소바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찾기 위해 아시아를 여행하던 중이었는데, 강수진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베소프라소바는 즉시 강수진의 부모에게 딸을 데려가 유럽에서 공부시키겠노라 약속한다. “우리 가족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나는 열다섯 살에 국제 학교에 들어가게 됐어요. 영어 한 마디, 프랑스어 한 마디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학생들에 비하자면 전혀 준비를 하지 않은 채로 간 거예요. 매일매일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어요. 하나 예를 들자면, 그때까지 나는 한국 음식 외에 다른 음식을 먹어본 적도 없었죠. 정말이지 그건 다시 태어나는 것 같은 경험이었어요.”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타고난 자질과 비상한 성실성 덕분에 열일곱 살의 나이에 로잔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제가 받은 장학금으로 어디서든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다반 베소프라소바 선생님은 저에게 1년만 더 자기와 함께 있으라고 조언하셨죠. 인간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훌륭한 무용수는 단지 기술만을 배워서는 될 수 없는 거니까요. 저는 선생님 집에서 마치 친손녀처럼 머물렀고, 그분은 저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탈리아의 예술부터 시작해서 식탁 차리는 법까지 말이죠.”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강수진은 더 넓은 레퍼토리를 위해 자신의 다양한 재능에 걸맞은 무대인 슈트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한다. 무엇보다 그녀를 매혹시킨 레퍼토리는 드라마적인 발레들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오네긴> <카멜리아 레이디> 등의 작품을 거쳐왔지만, 그녀는 평론가들 사이에서 다른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되는 걸 듣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동양의 무용수가 유럽 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물과 동화되려 노력한다고 생각하는 건 일종의 인종 차별이죠. 무대에서 표현되는 감정이 보편적이듯, 저에게 예술이란 세계 공통어예요.” 그사이 발레가 대단히 인기를 얻게 되면서, 한국에서 강수진은 국가적인 자랑거리이자 본받아야 할 롤모델로 위상이 높아졌다. “이전 세대에 비하면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제가 유학할 땐 외국에서 공부하기 위해 비자를 받기도 힘들었지만 요즘은 관문이 활짝 열렸죠. 학교나 동료들도 최고 수준에 이르렀고 한국의 무용수들은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춤에 대한 우리의 바람, 발레를 위한 커다란 열정 외에 감춰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에디터
- Fashion editor / Summer Bomi Kim , 글 / Valentina Bonelli(강수진), 글 / Francesca Felletti(박찬욱), 글 / Francesco Spampinato(안상수), 글 / Elena Bordignon(서도호), 글 / Nicola Scevola(김희선), 글 / Angelo Flaccavento(Juun.J)
- 포토그래퍼
- 박정우, ERIC GUILLEMAIN, MARCO PIETRACUPA
- 스탭
- Fashion stylist / Ye Young Kim, Fashion assistant / Ji Yun Lim, Kim Ah Reum, MakeUp artist / Lee Junsung@Garten.(김희선), Hair Stylist / Lee Enoc@Vott.(김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