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끝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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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하는 기분으로 해치우게 되는 뻔한 송년회가 지겨워진 사람들이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은 밤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해를 인상적으로 마무리해줄 특별한 마침표에 관한 상상.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다가 심술궂은 작가가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쓴 음식 묘사를 읽으며 침샘이 콸콸 범람한 경험이 있는 식탐 독서가들을 위한 파티. 일단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이 잔뜩 등장하는 책을 고른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버트럼 호텔에서>(이 호텔에서 판다는 커스터드 크림 도넛에 대한 묘사는 정말이지 사람 애간장을 다 녹인다)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하루키의 여행법>(‘우동맛여행’에 실린 사누키 우동에 대한 묘사를 읽고 있노라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우동인 것만 같다) 같은 책이 좋겠다. 그런 다음, 골라둔 책에 등장하는 요리를 즉석에서 만들어줄 수 있는 셰프를 초빙해서 밤새도록 열띤 낭독회와 탐욕스러운 시식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아, 상상만 해도 흐뭇하다. 뜻 있는 식탐 독서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립니다. –신윤영(<젠틀맨> 피처 디렉터)

제아무리 강력한 피로해소제라고 해도 단잠을 이길 수는 없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한 사람들을 위해 호사스러운 수면 송년회를 열 생각이다. 널찍한 홀을 하나 빌려 퀸사이즈 침대(갓 세탁한 흰색 시트가 깔린 것으로), 온돌 매트, 물침대, 해먹, 텐트, 학생용 책걸상, 지하철 의자 등 다양한 취침 도구로 채운다. 참석자들은 각자 원하는 자리에 가서 원 없이 REM수면을 즐기면 된다. 물론 자리끼는 프리미엄 생수로 제공한다. 아울러 제임스 블레이크 콘서트, 교장 선생님 훈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전작 상영전 등 불면증 환자도 당장 쓰러뜨릴 법한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마련할 계획. 제야의 카운트다운, 새해 첫 해돋이 그딴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1월 2일쯤 일어나면 어떨까? –유현택(영화사 그린나래 미디어 팀장)

‘미드’와 ‘오덕’이라는 단어가 있기 전이었지만, 두 단어의 의미가 시작된 것은 아무래도 1994년 10월 30일, <엑스 파일>의 파일럿이 한국에 방영된 날이었을 것이다. 올해 마지막 날, 늙어버린 왕년의 엑필들을 ‘나는 믿고 싶다’ 포스터가 걸린 어두침침한 방에 몰아넣고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에피소드들을 틀어대는 것이다. 노란 연필들을 천장에 던지고, 해바라기 씨를 씹어가며 그렇게 방영 20주년의 첫 태양을 맞이하고 싶다. –유성관(한국영상자료원 디지털 정보화팀)

한 해가 끝나갈 때마다 유부남들은 아직 독신인 후배들의 뒤를 졸졸 쫓으며 광란의 송년회를 꿈꾼다. 꿈꾸지…만 여기저기 기웃거려봤자 적응도 못하고, 결국에는 맨날 가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며 이미 100번 넘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게 된다. 몇 년째 똑같으니 이젠 정말 지겹고 송년회 따위 다신 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준비했다. 남자만을 위한 마지막, 끝장, 쫑, 파티! 일단 기러기아빠 혹은 싱글 후배의 빈집을 섭외한다. 비싼 샴페인이 넘쳐나고 화려한 게스트가 집결하는 흥청망청 하우스 파티가 될 거란 홍보 메시지를 돌린다. 다들 모이면 곧 다른 손님들이 합류할 거라고 하며 싸고 도수 높은 소주나 막걸리 등을 나누어 마신다. 그리고 잠깐 시간이나 때우자면서 남자들끼리의 끝말잇기, 남자들끼리의 술 마시기 왕게임, 남자들끼리의 진실게임 등 하면 할수록 우울해지는 유흥을 이어간다. 다음 순서는 통기타 반주와 함께하는 1970~90년대 히트곡 떼창. 샴페인은 아직 소식이 없고 소주 박스는 슬슬 바닥을 드러낸다. 고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따라 부를 때쯤이면 다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취기로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에서 현실을 받아들이며 하나 둘씩 자리에 눕기 시작할 것이다. 파티의 정점은 영화 감상. 상영작은 바로 <러브 액추얼리>다. 모두가 바닥에 널브러져서 그 짜증나게 러브 러브 러브 러브 러브 러브 해대는 노래를 듣는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한번 더 본다. 아마도 이번 생 마지막 송년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원석(영화감독)

<댄싱9>과 <슈퍼스타K>를 제작하면서 주변에서 제일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는 이런 거다. “PD님께서 제일 잘 부르시는 노래는 뭐죠? 제일 잘 추는 춤은 어떤 건가요?” 그러나 사실 내게 춤과 노래는 유흥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다. 허각 같은 가창력은 언감생심. 노래방에 가면 탬버린부터 찾는 비루한 음치이며, <댄싱9> 녹화장에서 참가자들의 흥겨운 댄스에 나도 모르게 몸을 들썩였다가 누가 봤을까 싶어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저주받은 몸뚱이인 것이다. 그래도 본 건 있으니 언젠가, 정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댄싱9>과 <슈퍼스타 K>대기실은 근처도 갈 수 없는 동병상련의 신세들을 불러 모아(너무 부끄러운 분들을 위해서는 가면 제공) 한민족의 가무 DNA를 거스른 이들의 진정한 한풀이 가창 무도회를 개회하고 싶다. 잘나지 못한 서로를 바라보며 힐링도 하고 한 해 동안 쌓인 모든 울분도 광란의 고성과 몸부림으로 떨쳐버리는 진정한 송년회! 가만 생각해보니 가면보다는 안대와 헤드폰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김용범(<댄싱 9> CP)

직업상 환경상 매년 만화가들과 송년회를 한다. 올해도 아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솔직히 지겹다. 사람들은 참 좋지만 만화 이야기만 하는 송년회가 지겹다. 다른 직업군도 마찬가지일진 모르겠는데 만화가들은 모이면 맨날 만화 이야기만 한다. 매일 매일 만화와 씨름하고 연재에 시달리는 것만으로 모자라 만나서까지 만화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송년회는,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으니 만화가들을 죄다 모아놓고 절대로 만화 이야기를 못하게 하는 송년회다. 만화에 관련된 단어 자체를 전부 금기어로 해놓으면 이 사람들이 뭘 어떻게 할지 궁금하다. 어색한 채로 아무 말도 없거나 벽이나 천장만 쳐다보다가 갈지도 모르겠다. 상관없다. 아, 1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만화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고, 쫌. –강 풀(만화가)

지난 몇 년 동안 해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준 것이 바로 스카이다이빙이다. 빡빡한 서울살이 때문에 그간 자주 못 본 친구들 일곱 명과 함께 하와이로 가서 해 뜰 무렵 다 같이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것이다. 잠시나마 로켓이 된 듯한 짜릿한 급강하 후에 낙하산이 펴지면서 속도가 줄어들거든 하늘에서 빙빙 돌며 저쪽에서 뜨는 해를 보면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를 생각이다. 그리고 착지한 뒤에는 친구들을 한 명씩 꼭 껴안아주고 싶다. –박모과(한식당 parc 대표)

개운하게 땀도 흘리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기분 좋게 취하기까지 할 수 있는 태릉인 풀코스를 제안한다. 일단 장소는 그랜드하얏트 서울의 클럽 올림푸스 테니스코트로 정한다(충격적으로 아름답다). 파티다 보니 역시 먹거리가 중요하다. 남도 요리의 대가인 김윤자 선생님과 방배동 최경숙 선생님 등 요즘 <신애라의 요리의 정석>에서 맹활약 중인 요리 연구가들을 초빙해 푸짐한 한식 차림을 부탁드린다. 술은 아무래도 진 앤 토닉이 좋겠다. 막 수입이 개시된 몽키47 진과 11월부터 판매에 돌입한 엘리펀트 진을 넉넉히 준비하고 최상급 토닉워터인 겐츠와 피버트리는 해외 배송으로 공수한다. 음악은? 이미 고인이 된 루벤 곤잘레스가 하룻밤만 복귀해 피아노를 두들겨주면 안 될까? –장용석(그래픽 디자이너)

꽃과 열매, 한약재를 넣고 빚은 우리 전통주의 맛과 향은 값비싼 양주 못지않다. 문제는 밀주 단속이 엄격했던 일제 시대 그 맥이 거의 다 끊어졌다는 점. 현재 전통주를 맛보기 위해서는 가양주의 맥을 잇는 술도가를 백방으로 수소문해야 한다. 먼 길 달려가 맛본 전통주는 하나같이 향긋하고 달큼하면서 알싸한 게 항상 곁에 두고 맛보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게다가 한평생 전통을 이으면서 자연스레 바깥세상을 배척한 술도가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도 잘 섞이지 못하는 형편. 이번 연말, 교통의 요지 대전에 평상 하나 펼쳐놓고 전국 술 명인을 모두 불러 모아 술과 함께 정까지 나눴으면 한다. –이주연(<KTX 매거진> 에디터)

사람들은 종종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 대한 험담을 옮기고 다닌다. 그래서 소문의 주인공을 직접 만난 뒤, 그가 근거 없는 비방의 피해자였음을 깨닫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역시 사람은 직접 겪어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험담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을 한데 모으는 연말 파티를 기획하면 어떨까? 밤새 술과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지고, 더 나아가 함께 작업까지 해본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서로 막연한 거부감을 갖고 지내다가 거한 술자리를 가진 뒤 둘도 없는 절친이 된 지인들이 있다. –고태용(디자이너)

소중한 사람들과의 모임을 하고 싶다. 아주 소소하고 특별할 것 없는 자리다. 그런데 송년회 중간에 특별한 시간을 갖는 거다. 시간을 정하고 최소 30분 이상 함께 침묵한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든지 하는 행동은 금물. 다소 쑥스럽더라도 서로를 쳐다보면서 말이 필요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 –전용훈(출판사 1984 대표)

영국에 살 때 놓치고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시크릿 시네마’라는 이벤트다. 영화 한 편을 테마로 정해 그대로 재현하고 상영하며 종국에는 파티를 즐기는 형식인데, <쇼생크 탈출>과 <프로메테우스>편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 연말에 아파트 인테리어 공사를 끝내고 이사하는 선배가 있다. 이때를 기회로 삼아 시크릿 시네마 파티를 해보고 싶다. 초대된 사람들의 아파트 입소(입장)가 끝나면 불을 끄고 사이렌을 울린다. 다들 깔끔한 죄수복으로 갈아입은 뒤 식판에 음식을 배급 받아 저녁을 먹는다. 대화는 금물. 교도소장인 선배의 지시에 따라 짐풀기 노동을 마친 후에는 오아시스 같은 맥주를 제공받는다. 이때 흐르는 음악은 당연히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아리아 ‘저녁 바람이 부드럽게’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다시 불이 꺼지고 드디어 탈출, 그때부터는 진짜 집들이 겸 송년회 파티가 시작된다. –강보라(프리랜스 에디터)

에디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포토그래퍼
GETTY IMAGES/MULTIB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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