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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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즌 캣워크에 등장한 여자들은 위태롭지만 우아하다. 흥미진진하고 탐미적인 스타일을 구사하는 그녀들은 관능적 매력에 현실적인 감각까지 지녔다.

이번 시즌의 헤로인은 감각적이고 화려하며 섹시함을 발산한다. 실크 뷔스티에와 실크 스커트는 모두 Dior 제품.

이번 시즌의 헤로인은 감각적이고 화려하며 섹시함을 발산한다. 실크 뷔스티에와 실크 스커트는 모두 Dior 제품.

패션계에 뉴 우먼이 등장했다. 풀 스커트에 벨트로 한껏 조인 재킷 그리고 어깨를 슬며시 드러낸 스타일로 성장한 여자.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고 불온해 보이는 그녀는 가죽을 사랑하고 레이스에 대한 취향도 뚜렷한 데다 탐스러운 모피도 즐길 줄 안다. 강렬한 소재와 색감을 감각적으로 소화해내는 그녀에게선 매혹적인 관능미도 넘친다. 이른바 ‘베티 블루’ 스타일이다. 그녀가 연인과 어디를 걸어가는지 혹은 그녀가 혼자서 어디를 정처 없이 헤매는지는 알 길이 없다. 매 시즌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컬렉션에 어울리는 ‘여성상’을 창조해낸다. 올 가을/겨울의 여성은 열정과 풍부함을 사랑하되, 한동안 패션계를 지배해온 공작새처럼 화려한 여성들과는 완전히 차별화 된다. 성숙한 매력을 과시하는 이들은 ‘블로거’ 스타일에는 이질감을 느낀다. 온통 뭔가를 외쳐대는 듯한 강렬한 색채감과 과장된 액세서리 그리고 충돌하는 듯한 프린트는 이들에게는 지치고 소모적인 것이다. 이번 시즌 뉴 우먼은 성숙함과 화려함을 포용하되, 훨씬 정갈한 라인의 현실성을 드러낸다. 그녀를 규정하는 건 친숙함에 대한 재해석이다. 몸에 꼭 맞는 플레어 코트에선 50년대의 향수가 느껴지고, 라운지 파자마는 할리우드식 글래머러스와 결합되었다.헤리티지풍의 트위드 울 소재의 커다란 재킷, 체형선에 맞춘 시스 드레스와 두툼한 힐 펌프스, 또 어딘가에는 페이턴트 가죽 액세서리나 베가스 핀업 걸을 연상시키는 벨트, 혹은 대담하게 파인 네크라인 등을 응용한 비틀림과 변형이 존재한다. 사무실에서 특별한 저녁 약속으로 직행할지라도, 그녀의 흥미로운 스타일링과 분위기 있는 색감은 그 자체만으로도 손색이 없다. 감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삶의 연륜이 풍부하게 묻어나는 스타일이다. 한마디로 우아하지만 못된 여자다.

그렇다면 이 뉴 우먼을 누가 어떻게 규정할까? 미우치아 프라다, 마크 제이콥스의 여성을 한번 들여다보라. 프라다 여사는 자신의 컬렉션을두고서 ‘가공되지 않은 우아함(Raw Elegance)’이라 표현했다. ‘패션의 어떤 측면이 여성의 욕망에 도화선이 되어주는가?’라는 질문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가죽, 모피, 레이스, 다이아몬드’였다. “난 형체가 살아 있는 소재를 좋아해요. 지나치게 부드럽거나 가벼운 것 혹은 너무 쉬운 것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아요.” 새빨간 가죽 코트에 펜슬 스커트와 스틸레토 힐, 보이시한 스웨터를 입은 그녀가 밀라노 스튜디오에서 말한다.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귀고리가 그녀의 귀에서 반짝인다.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끊임없이 새롭고 매력적인 걸 만들어내는 것이에요. 다들 매력적으로 보이길 원하니까요.” 프라다 캣워크(배경으로는 울타리와 좁은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고양이 등을 스크린 영사했다)는 마치 50년대 나폴리의 뒷골목처럼 보인다. 어둠 속에서 등장한 아름다운 모델들은 젖은 머리에 트위드 시프트 드레스의 한쪽 어깨를 과감하게 끌어내렸다. 시퀸 장식의 레이스 드레스에는 투박한 워커가 매치되었고, 매니시한 코트 안쪽으론 헴라인을 드러낸 비대칭의 가죽 스커트와 낡아서 닳은 듯한 할아버지 스웨터가 보인다(하지만 여전히 가슴은 글래머러스하게 강조되어 나타난다). 헤어 스타일리스트 귀도 팔라우(Guido Palau)는 프라다 캣워크의 비에 젖은 듯한 헝클어진 헤어를 연출했다. “우린 흑백 영화 시대의 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를테면 베로니카 레이크 같은 미묘하고 우울한 여자들 말이에요. 그녀가 연인과 함께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여부조차 중요치 않아요.” 판타지와 리얼리티가 매혹적으로 접목된 미우치아 프라다 우먼은 나일론 레인코트에 크고 화려한 주얼리를 착용했는데, 젖은 머리는 아마도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난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패션을 구입하는 데는 늘 모티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뉴 우먼은 당연히 드라마틱한 요소를 지닌다. 마크 제이콥스와 함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펑크: 카오스 투 쿠튀르(PUNK: Chaos to Couture)’ 갈라에 참석한 소피아 코폴라를 떠올려보라. 코폴라는 마크 제이콥스 가을/겨울 컬렉션의 은빛이 감도는 실크 파자마 차림으로 등장했다. ‘과연 그 안에 란제리를 입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그 어떤 레드 카펫 드레스보다도 잠옷을 패션으로 반영하는 반항적이고 인상적인 섹시함을 드러내면서. 조너선 선더스 역시 이즐링턴 스튜디오에서 뉴 우먼의 미묘한 섹시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난봄의 스포티한 룩과는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이에요. 모던한 그래픽 패턴 룩에 익숙했다면 그 잔상을 빨리 몰아내야 할 정도로요. 새로운 룩은 현실적인 색상에 특이한 소재를 조합하고 있어요. 노골적인 섹시함은 아니지만, 울에 페이턴트 가죽이나 비닐을 혼합해 묘한 관능미를 암시하죠.” 그는 앤티크풍의 새틴 소재(루비 레드나 에메랄드 그린) 시스 드레스에 브라컵 코르셋 벨트를 매치했다. 한동안 50년대 이미지를 연구한 선더스는 영국의 화가이자 조각가 앨런 존스(점잖고 우아한 신사 숙녀 시대의 성적인 억압 뒤에 숨은 도발적이고 풍자성이 강한 작품을 선보였다)의 에로틱한 조각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또한 선더스는 올 시즌은 ‘현실적이고 진정한 옷들의 시즌’이라 말한다. “클래식한 시프트 드레스와 피트 앤 플레어 코트는 모두 전형적인 드레싱 방식을 따르고 있어요. 하지만 컬러와 텍스처는 새롭고 특이한 애티튜드를 지니고 있죠.” 부드러운 하늘색과 분홍색의 오버사이즈 코트와 새틴 시스 드레스를 선보인 까르벵의 기욤 앙리 역시 유사한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자벨 아자니와 베아트리체 달을 탐구했어요. 80년대 뤽 베송이나 장 자크 베닉스가 연출한 상처받기 쉬운, 하지만 동시에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캐릭터들이죠.” 까르벵을 이끄는 이끄는 앙리는 달콤함과 씁쓸함을 적절하게 혼합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충돌하는 듯한 파스텔과 테디베어 스타일의 질감 그리고 번쩍이는 가죽 소재를 포함해, 파격적이고 엉뚱한 메리 존스가 까르벵만의 뉴 우먼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과 노력을 들인 과시적인 스타일링과는 달리, 뉴 우먼의 스타일은 애쓰지 않은 무심한 듯한 매력을 발산한다. “럭셔리는 이제 의미 없는 단어가 되어버렸죠.” 로샤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르코 자니니가 말한다. “난 의식적인 호화로움과 사치는 믿지 않아요. 대신에 섹시한 란제리를 일상적인 룩에 활용하거나 새로운 비율의 펜슬 스커트나 서클 스커트를 오버사이즈 코트와 매치하는 등 아이템을 입는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고 싶어요. 궁극적으로 내가 디자인하고 싶은 건, 세대를 초월해 여성들이 스스로 느낌과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그런 패션이죠.” 그의 여동생이자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인 미키(38세)는 부드러운 캐시미어와 프렌치 실크로 만든 옷을 보여준다. 로샤스 룩은 50년대 풀 스커트와 이미 옷장 속에 존재한 듯한 올드풍의 카디건, 이브닝 란제리 슬립에 걸쳐 입은 할아버지 때의 트위드 헌팅 코트, 주름진 헨리 티셔츠와 종아리를 스치는 하이웨이스트 스커트 등을 비롯해 모두 직관적이며 현실적인 룩이다.

새로운 세대에 주어진 욕망과 취향을 살펴보건대, 동시대 여성들은 기능적이면서도 뛰어난 스타일을 갈망하고, 동시에 ‘과시’를 외쳐대진 않지만 개성이 강하고 섹스어필할 수 있는 옷을 원한다. 셰릴 샌드버그의 자기계발서 <린 인(Lean In)>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요즘 여성들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데다가 원하는 바를 이룰 때까지 기꺼이 위험을 무릅쓸 준비도 되어 있으니까. 패션 디자이너의 역할은 우리가 ‘원하고 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또 매장에서 잘 팔리는 상업적인 제품 외에도, 패션을 한 차원 더 높게 끌어올릴 창조적 모티프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올 시즌의 뉴 우먼, 그녀의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부드럽고 인상적인 텍스처를 지닌 오버사이즈 코트, 매력적으로 물결치는 풀 스커트, 허리를 더욱 잘록하게 연출해줄 가죽 벨트, 관능적인 슬립 드레스와 파자마, 갓 샤워를 마친 듯한 헤어를 연출할 수 있는 젤 스프레이 등이다. 센슈얼한 여성이라면 아마 다들 이 리스트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번 시즌을 관통하는 패션 헤로인은 화려한 과시만을 즐기는 여성이 아니라 현실과 미학을 개척해 나가는, 우아하고도 치명적인 관능미를 가진 여성이다! 글 / 해리엇 퀵(Harriet Quick)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정진아
포토그래퍼
패트릭 드마셸리에, KIM WESTON ARNOLD
모델
다리아 워보이
스탭
헤어 / Sam Mcknight, 메이크업 / HANNAH MURRAY, STYLING / KATE PHE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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