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 메스니와 키스 자렛의 음악적 동지, 예술로서의 음악을 지키는 레이블, 음반 아트워크를 작품의 경지에 올려놓은 선구적 브랜드… 이 모두는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가 이끄는 ECM에 대한 설명이다. 관련 전시와 뮤직 페스티벌, 영화제가 예정된 9월에는 차분하지만 선명한 소리들을 찾아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키스 자렛의 , 아니면 칼라 블레이의 이었던 것 같다. 20대 초반에 ECM의 음반을 처음으로 구입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유사시의 잘난 척에 대비한, 허세가 앞서는 쇼핑이었다. 블레이의 곡 중에서도 드물게 편안하고 아름다운 ‘Lawn’을 자주 듣긴 했으나 앨범 전체를 소화하지는 못했다.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은 여행처럼 자유롭게 이어지는 키스 자렛의 즉흥 연주 역시 한 번에 삼킬 수 있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CD를 장식장에 꽂아두는 것만으로도 뭔가 근사한 일을 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의 내게 ECM은 허영심을 충족시켜주는 레이블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1969년에 설립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고아한 브랜드는 대중의 취향을 곁눈질한 적이 없다. 바다 한가운데에 공방을 지은 장인처럼 특유의 색깔을 묵묵히, 그리고 치열하게 지킨다. 그래서 음악팬들에게 ECM의 음반은 가볍게 집어 들었다가 빠르게 잊는 소모품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랫동안 곁에 두고 정성껏 음미하고픈 사치품에 가깝다.
키스 자렛과 칼라 블레이를 비롯해 팻 메스니, 칙 코리아, 얀 가바렉 등 ECM과 견고한 유대를 맺고 있는 뮤지션들의 목록은 상당히 길고 화려하다. 감독인 장 뤽 고다르와 고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사운드트랙 역시 이 레이블을 통해 제작됐다. 하지만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하는 인물은 역시 설립자인 만프레드 아이허다.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이자 프로듀서였던 그는 불과 20대 중반의 나이에 장차 음악 산업에서 의미 있는 위치를 점할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키스 자렛의 같은 초창기 타이틀의 성공은 ECM이 자리를 잡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어주었다. 이후로도 아이허는 클래식, 민속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브랜드의 실험적인 울타리 안에서 포용해왔다. ‘현대 음악의 에디션들(Editions of Contemporary Music)’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사는 나름의 기준으로 선별하고 편집한 동시대적인 음악이다. 물론 ‘동시대’라는 단어가 단지 지금의 시점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음악은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든 생생한 빛을 내뿜는다면 누구에게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작곡가의 시각과 그 생각을 전할 뮤지션이 필요할 뿐이죠.” 만프레드 아이허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올해 초 뮌헨의 하우스 데어 쿤스트에서는 ECM의 아카이브를 망라한 전시가 열렸다. 오는 8월 31일부터 11월 3일까지, 서울 인사동의 아라 아트센터에 들어설 프로젝트는 당시의 규모를 능가한다. 도도한 레이블의 역사와 철학을 꼼꼼하게 훑는 <ECM :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하나의 브랜드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의 합인지를 깨닫게 해줄 전시다. 레이블과 공동으로 주최하는 아시아 최초의 기획인 만큼 동원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료가 지하 1층부터 4층까지의 공간을 채우게 된다. 설립 초기의 활동, 1984년 뉴 시리즈 론칭 이후의 변화, 앨범 커버 아트워크, 그리고 ECM 사운드에 관한 기술적 해설 등으로 각 섹션이 구성될 예정이다. 한편 전시 개막 무렵, 즉 9월 3일부터 7일까지는 ECM 뮤직 페스티벌이 열린다. 일단 어쿠스틱 기타의 거장 랄프 타우너와 한국 보컬리스트로서는 최초로 ECM에서 앨범을 발표할 신예원이 합동 무대를 갖는다. 전설적인 비올리스트 킴 카쉬카시안, 깊고 진한 보컬의 힘이 돋보이는 노마 윈스톤 트리오의 공연이 이어진 뒤에는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 오보이스트 하인츠 홀리거, 그리고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 시향이 피날레를 장식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만프레드 아이허는 영화계와도 돈독한 교류를 이어온 인물이다. <ECM 필름 페스티벌 : 장 뤽 고다르와 ECM> 은 그 우정의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상영 프로그램은 <누벨바그> <영화사>를 포함한 고다르의 연출작들, ECM에 관한 다큐멘터리 <사운드 앤 사일런트 : ECM 이야기>, 하인즈 뷔틀러와 만프레드 아이허의 공동 연출작 <홀로세> 등이며 일정과 장소는 8월 31일부터 9월 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다.
ECM을 말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음반 디자인이다. 최소한의 도구로 최대한의 표현을 하는 이들의 커버 아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예술성을 인정받는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스무 살 무렵에는 다소 난해한 재즈 사운드보다 묵직하고 긴 여운을 남기는 재킷에 이끌렸던 것 같다. 특히 수많은 걸작을 남긴 뒤 은퇴한 그래픽 디자이너 바바라 워지리시는 레이블의 디자인 언어를 완성했다고 평가받는다. “귀를 눈처럼 생각해야 하죠.” 콘텐츠와 정확히 조응하는 디자인의 비밀을 만프레드 아이허는 이런 문장으로 귀띔했다. 청자들에게도 ECM의 앨범은 귀로 풍경을 보고, 눈으로 음악을 듣는 경험이다.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 안에서 사람들은 고요하면서도 분주한 여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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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처 에디터 / 정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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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S | COURTESY OF ECM RECO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