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필름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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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음악, 흐릿한 화면, 허공을 응시하며 유영하는 모델…. 개념 미술처럼 어렵고 심각한 패션 필름에 흥미를 잃었다고? ‘확 깨는’ 기발한 플롯, 핫한 음악, 그리고 빵 터지는 웃음까지, 이번 시즌의 패션 필름은 대중과 좀 더 친근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싶은 디자이너들의 열망을 고스란히 담았다. 과도한 업무에 지치고 일상이 지루할 때 보아도 좋을 패션 필름 10선.

거장의 자존심 by 레인 크로퍼드

패션 필름의 선구자 닉 나이트가 다시 한 번 디지털 테크닉의 한계를 깼다. 레인 크로퍼드의 2013 S/S 룩북 비디오에서 지방시, 프로엔자 스쿨러, 하이더 애커만의 룩을 입은 모델 밍 시의 리드미컬한 워킹은 2D와 3D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놀라운 테크닉을 통해 새로운 영상으로 탄생했다. 단순히 룩을 보여주는 것을 뛰어넘어 한번 보면 영원히 잊히지 않을 파워풀한 이미지를 남기는 영상.

자화자찬 by 랑방

필름을 감상하는 도중, 난데없이 인터넷 전화벨이 울릴 때까지 당신은 이 필름을 그저 흔하디흔한 2013 S/S 광고 비주얼의 비디오 버전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필름의 백미는 이제부터다. 마치 광고 촬영 현장을 원격 조정하는 듯 영상을 보는 내내 “세상에, 멋져!” “아, 저 두 백은 정말 마음에 드는걸” “좋아!” “잘은 모르겠지만, 조명이 정말 멋져 보여” “마치 꿈꾸는 것 같아, 구름 속에 있는 것 같기도하고” 등 끝없이 감탄사를 늘어놓는 귀여운 알버 엘바즈. “완벽해”라는 코멘터리를 끝으로 그와의 영상 통화는 종료된다.

여자라면 by 미우미우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코끝이 찡해지는, 그리고 마지막엔 친한 친구에게 전화 한 통 걸게 되는 가슴 뭉클한 영화 한 편을 감상하시라. 제28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영화제 역사상 처음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흑인 여성 감독 두버네이가 연출한 이 필름의 제목은 <The Door>. 필름에서 등장인물들은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위해 문앞에 서있고, 그들의 가슴 뜨거운 위로에 힘입어 주인공은 비로소 슬픔에서 당차게 벗어나 스스로 문을 통과해 나간다. 여기서 그녀가 갈아입는 미우미우의 2013 S/S 의상들은 고뇌를 탈피해가는 여성의 심리를 대변하는 매개체. 여성, 사랑, 우정, 그리고 패션의 상관관계를 이토록 날카롭게 파헤친 패션 필름이라니, 과연 미우치아 프라다답다.

팝아트의 승리 by 겐조

겐조는 2013년 리조트 컬렉션의 테마인 ‘정글’을 팝아트라는 필터를 통해 채 1분이 되지 않는 짧은 영상에 강렬하게 담아냈다. 뱀, 레오퍼드, 빽빽이 우거진 숲 등 정글의 다양한 테마를 애니메이션, 콜라주, 합성 등의 기법을 이용해 표현한 이 필름을 보는 동안 당신은 현란한 네온 컬러와 펑키한 사운드가 흐르는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초현실 세계로 by 델피나 델레트레즈

우주를 연상시키는 귀고리, 뱅글이나 꿀벌 모티프의 주얼리, 주술적인 눈과 해골 모티프의 장식 등 그녀의 대표적인 디자인에서 알 수 있듯, 그녀의 관심사와 영감의 원천은 일상보다는 비일상, 현실 세계보다는 상상 저 너머의 초현실적인 세계다. 르네 마그리트나 살바도르 달리 같은 초현실주의 작가의 회화를 보는 듯한 그녀의 2013 F/W 광고 영상은 그런 그녀의 미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

환상 여행 by 루이 비통

여성이 패션을 통해 꿈꾸는 게 ‘판타지’라면, 루이 비통의 패션 필름이야말로 당신의 판타지를 충족시킬 가장 훌륭한 창구다. 고혹적인 이미지의 모델 애리조나 뮤즈와 스타급 이미지 메이커인 이네즈 & 피노트 듀오,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로케이션, 이 세 가지 이름만으로도 이 광고 영상의 완성도를 짐작할 수 있을 듯. 애리조나 뮤즈가 루브르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열기구를 타고 탈출하는 엔딩은 루이비통 역사상 ‘여행’이라는 헤리티지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장면으로 손꼽히지 않을까.

패션 블록버스터 by 캘빈 클라인

치밀하게 짜인 플롯, 파워풀하고 수려한 영상미, 웅장한 음악. 이 삼박자를 모두 갖춘 블록버스터급 패션 필름. 미니멀하면서도 역동적인 세트와 배우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모델 수비 코포넨이 연출하는 농밀한 섹시미, 그리고 모든 장면을 패션 화보로 착각하게 만드는 완벽한 스타일링 등이 관전 포인트다. 이번 시즌의 지면 광고 비주얼을 이 필름의 캡처 화면으로 하고, 유튜브의 필름을 보라는 문구를 커다랗게 넣은 자신감이 당연한 듯.

시, 그리고 McQ by McQ

McQ가 2013년 가을 시즌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쇼 대신 패션 필름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패션 하우스의 컬렉션 프레젠테이션 방식의 진화를 대변한다. 데칼코마니와 합성 등 다양한 디지털 편집 방식을 통해 컬렉션을 은유적이면서도 꽤 효과적으로 보여준 이번 패션 필름을 기존 패션 필름의 최신 업그레이드 버전이라 불러도 좋겠다.

웃기는 패션 필름 by 알렉산더 왕

랩 아티스트 아질리아 뱅크스와의 캠페인 비디오 시리즈 발표 이후 공개한 한층 대담한 콩트식 패션 비디오. SNL 뺨치게 웃기는 패션 필름이라니, 궁금하지 않은가. 코미디언 앤젤라 존슨이 알렉산더 왕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일하는 무례한 점원으로 등장하고, 슈퍼모델 알레산드라 암브로시오, 래퍼 에이셉 라키, 뉴욕의 유명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이먼 두난 등이 등장해 차례로 그녀에게 당하고 떠난다. 패션계 거물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막무가내 점원에게서 카타르시스마저 느끼는 동안, 알렉산더 왕에 대한 호감도와 친근감이 급상승할 것.

여장남자 by 디스퀘어드2

이번 시즌 디스퀘어드2의 광고 비주얼은 필름으로 감상해야 제맛이다. 두 디자이너의 1990년대 ‘어두운’ 추억을 모티프로 한 이 필름에서 딘앤댄 듀오는 몸소 여장을 한 채 머트 앤 마커스가 연출한 흑백 무성영화 속 미스터리하고 박진감 넘치는 드랙퀸 쇼의 주인공이 된다. 완벽하게 여성으로 변신한 이 두 디자이너의 외형뿐 아니라 배우적인 끼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그들의 연기에 혀를 내두르게 될 것.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이지은(Lee Ji 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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