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건강한 가능성, 열일곱 살 여진구.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부터 <보고 싶다>까지를 지나는 동안 여진구는 키가 4cm 더 자랐다고 했다. 그 사이 배우로서 딛고 올라선 높이는? 자로 잴 수는 없겠지만 4cm는 훌쩍 넘지 않을까 싶다. 요즘 가장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10대 중 한 명인 이 소년은 나이답지 않게 깊은 표정과 낮고 따뜻한 음성을 지녔다. “변성기 중에는 많이 힘들었어요. 촬영할 때마다 대사 끝이 자꾸 갈라져서. 그래서 한동안 말도 잘 안 하고 제 소리를 모른 채 지냈거든요. 그런데 <해품달> 무렵부터 그런 말씀을 자주 들었어요. 목소리가 참 좋다고요.”
어쩌면 여진구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이 가진 장점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어린 배우는 재주나 장기를 과시하려는 욕심 없이 맡겨진 역할에 솔직하게 몰입한다. 스스로가 잘한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아이 특유의 불편한 노련함이 없다고 할까? 캐릭터의 감정에 도달할 때도 빠르고 손쉬운 편법 대신 느리고 어려운 정공법을 택한다. <보고 싶다> 촬영장에서는 거의 내내 눈물을 흘려야 했는데, 극 중 배역인 한정우 대신 여진구의 감정을 빌려다 쓴 적은 거의 없다고 했다. “대본에 나온 것 외에 다른 생각은 안 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물론 그 느낌이 아예 잡히지 않는 날도 있어요. 그러면 아침부터 굉장히 답답해요.” 잠시 입을 다물었던 그가 뭔지 수줍은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더듬더듬 덧붙인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늘 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건지 자꾸 불안하거든요. 그래서 노력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덕분에 더 좋은 연기…까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그나마 나아지는 것 같아요.”
여진구의 데뷔작은 여덟 살 무렵 출연한 <새드 무비>다. 엄마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란스러워 하는 아들 역할이었다. 작년쯤 TV에서 방영해주는 걸 우연히 다시 봤는데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고 민망해서 곧 채널을 돌려 버렸다고 한다.
“그때 일은 거의 다 까먹었지만 딱 한 장면이 생생해요. 병원 앞에서 비를 맞으며 우는 신이 있었거든요. 아빠 역할을 하신 선배님이 팔을 덜덜 떨면서 끌어안아 주시는데 그 감정이 확 느껴지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해가 바뀌면 열일곱이 되는 배우는 새 영화 크랭크인 전에 얻은 마지막 일요일을 더블유와의 인터뷰에 써야 했다. 장준환 감독이 10년 만에 발표하는 차기작이 될 <화이>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과 조 라이트의 <한나>를 가로지르는 듯한 이야기다. 여진구는 친부모를 살해한 뒤 자신을 범죄 조직의 일원으로 만든 양아버지들을 차례로 찾아다니며 복수하는 소년 킬러로 등장한다.
“감독님이 숙제를 많이 내주셨어요. 범죄자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어떤 경험을 했을까,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 후에는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것들을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혹시 <지구를 지켜라>는 봤느냐고 물었더니 캐스팅 전에는 장준환 감독에 대해 아예 몰랐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작품이 개봉되고 컬트의 신전에 올랐던 2003년에는 불과 여섯 살이었으니 당연한 일일 거다.
적잖은 사람들이 종종 여진구의 나이를 잊곤 한다. 배우로서의 집중력, 또래보다 한 옥타브쯤 낮은 목소리, 혹은 서늘한 눈매나 듬직한 체격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은 의상 준비를 위해 매니저에게 치수를 물어봤다가 잠시 어리둥절했다. 여진구가 아니라 <26년>의 진구 사이즈가 아닐까 헷갈렸다고 하자 그가 제 나이처럼 ‘으하하’ 웃었다. 물론 그 웃음마저도 우퍼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듯 묵직했지만. “제가 20대인 줄 아는 분들이 지금도 계세요. <보고싶다> 때도 쉬는 시간이면 현장 스태프 형들이 ‘진구야, 같이 담배 한 대 피우고 오자.’ 이러셨거든요. ‘저 열여섯 살인데요.’ 이러면 깜짝 놀라시고.”
벌써부터 청년이 엿보이는 외모를 제외하면 여진구는 스스로가 친구들과 별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방 벽에는 어떤 걸 그룹 사진을 붙여뒀는지 떠봤더니 “제가 그런 성격이 아니라…” 라고 대답하는 걸 보면 조금쯤은 다를 수도 있겠다 싶다. 쇼 비즈니스의 화려함은 이미 이 소년에게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 수 있는 게 배우라는 직업의 가장 큰 매력이며, 이 경험이 장차 자신의 삶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는 그에게 만약 스무 살의 자신을 인터뷰하게 된다면 무얼 물어보고 싶은지 질문했다. “운전면허는 땄냐고요. 빨리 면허증을 갖고 싶어요.” 그 면허증으로 어딜 가려는 걸까?
“처음 운전대를 잡으면 일단 직진만 할까봐요. 과연 어디가 나오나 그냥 달려볼 것 같아요.” 뚜렷한 목적지가 있어도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조급해할 필요는 없는 시기가 10대일 거다. 너무나 큰 가능성 앞에 서 있기 때문에 여진구는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정진아
- 포토그래퍼
- 신선혜
- 스탭
- 헤어/강현진, 메이크업 /이준성, 어시스턴트|이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