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하이는 당장이라도 뛰어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 카메라 앞에서든, 음반 차트에서든, 9주년을 맞은 그들의 음악 인생에서든.
이른 아침부터 스튜디오에 모인 사람들의 손에는 블랙 커피나 에너지 드링크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아직 잠이 묻은 얼굴 가운데서 에픽하이 멤버들이 눈에 띈다. 지난 며칠간 뮤직 비디오 촬영과 TV 녹화 스케줄을 연달아 소화했으니 좀 지쳐 있었을 거다. 그래도 표정만은 밝았는데 촬영 이틀 전 공개한 신곡 ‘춥다’가 거둔 성적 덕분인 듯했다.
<K팝스타> 시즌 1의 준우승자인 이하이가 피처링한 이 쓸쓸한 노래는 발표 되자마자 각종 음원 사이트 정상을 차례로 밟았다. “사실 ‘춥다’는 예전의 에픽하이를 그리워하는 팬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이걸 듣고 짐작한 앨범과 막상 발매될 앨범은 상당히 다를 거예요.” 타블로의 설명이다. 그는 지난 여섯 장의 음반과는 전혀 다른 사운드를 들려줄 이번 컴백이 데뷔보다도 더 데뷔 같다고 덧붙였다.
3년간의 공백기는 에픽하이에게 그리 편안한 휴식이 아니었다. 특히 타블로는 집요하고 근거 없는 인신 공격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 문제를 되짚으며 막 딱지가 앉은 상처를 긁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멤버들은 7집 에 담겨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현재의 자신들을 말해준다고 했다. 그걸로 대답은 충분해 보였다. 마지막 컷을 위해 벽을 따라 늘어놓은 앰프 위에 올라선 세 명이 갑자기 공중으로 점프했다. 사진가가 이미 충분하다고 말한 뒤에도 멤버들은 좀 더 뛰어오르고 싶어 했다. 아침에 섭취한 카페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오랜만에 도약을 재개한 에픽하이는 다시 내려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음반 발매에 앞서 공개된 ‘춥다’에 대한 반응이 곡 제목과 다르게 뜨겁다. 에픽하이를 기다린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증거가 아닐까 싶다.
타블로 솔직히 지금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앞으로 인터뷰 때마다 이런 질문을 듣게 될 거다. “지금 실감이 나세요?” 그런데 그럴듯한 대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음원 공개가 6시였는데 긴장한 나머지 5시 50분쯤 잠이 들었다. 이제 새 노래가 공개되니 많이 사랑해달라는 트윗을 남긴 뒤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깨어보니 8시였다. 그 사이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지난 3년간 받은 수보다 훨씬 많이 도착해 있는 거다. 좋은 일로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연락 을 받은 게 간만이라 얼떨떨하다.
데뷔 앨범도 아니고 벌써 7집인데, 이번 작업이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나?
미쓰라 정말 죽을힘을 다해서, 없던 것도 짜내서 만든 앨범이다. 3년이라는 시간의 부담이 컸다. 옆에서보는 분들이 이미 잘하고 있다고 해도, 더 잘해야 할 것 같고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주 힘들게 작업했다. 끝내고 났을 때는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과 뿌듯함이 있었고.
타블로 반면에 나에겐 가장 즐거운 작업이었다. 작년에 솔로 음반 낼 때 많이 고통스러웠는데 이번에는 힘을 확 빼고 했다. 에픽하이를 할 때만 맛볼 수 있는 기분이 있다. 지난 3년 동안 그걸 모른 채 지냈다. 다시 모여 장난치면서 작업하다 보니 음악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처럼 즐거웠다. 곡에서도 그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거다. 그래서 이번 앨범은 어쩌면 데뷔 앨범보다도 더 데뷔 앨범 같다. 신인이 된 느낌이고 그래서 더 좋다.
대단히 밝은 분위기의 앨범이라는 귀띔이 있었다.
타블로 에픽하이 역사상 가장 밝은 음반일 거다.
그런데 선공개된 곡은 그리 밝지 않다.
타블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에픽하이 스타일에 가까운 곡이다. ‘춥다’를 듣고 짐작한 앨범과 막상 발매된 앨범은 다를 거다. 확실히 반전은 있다. 누구에게는 반갑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달갑지 않은 반전이겠지만. 아무튼 이 노래들이 현재의 우리라는 생각을 한다. 듣고 있으면 괜히 기쁘다. 우리가 이제 이 정도로 웃을 수 있는 상황이 됐구나, 어쩌면 예전보다도 더 많이 웃고 있구나 싶어서.
그렇다면 왜 ‘춥다’를 가장 먼저 공개한 건가?
타블로 트위터로 에픽하이 노래 중에 어떤 걸 가장 좋아하느냐고 새삼스럽게 물어본 적이 있다. 대부분이 ‘우산’, ‘1분 1초’ 등 감성적인 곡을 꼽더라.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요소가 한데 담긴 노래를 오래 기다려준 팬들에게 앨범이 나오기 전에 선물하고 싶었다.
이번 앨범에서는 얼터너티브 록부터 브릿팝, 올드스쿨 힙합까지 과거의 사운드를 에픽하이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1990년대의 음악을 새삼 주목한 이유가 있나?
타블로 언젠가부터 열정과 즐거움이 죽어가는 것 같아 고민했다. 에픽하이가 막 시작하는 팀이라면 뭘 하고 싶어 할까, 생각해보니 음악을 순수하게 좋아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나 미쓰라, 투컷에게는 그때가 90년대 중후반이다. 힙합, 얼터너티브 록, 그런지에 빠졌고 형이나 누나, 부모님 어깨너머로 70~80년대 음악을 들었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는 통째로 90년대인 거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한 사운드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많지 않다. 당시의 소리, 악기, 감성을 에픽하이 스타일로 되살리면 그 무렵 경험한 즐거움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낡고 촌스럽게 들릴 위험을 감수하고 밀어붙였다. 좋다, 나쁘다의 평가는 듣는 사람들 몫이지만 우리 셋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였다.
결성 9주년을 맞아 앨범 제목을 로 정했고 노래도 딱 9곡만 담았다. 꽉 채운 10보다 9가 더 좋은 이유가 있다면?
타블로 20곡도 채울 수 있을 만큼 작업량은 충분했다. 우리가 원래 트랙을 넉넉히 넣는 편이다. 예전 음반은 30곡이 넘는 것도 있다. 그런데 그중 지금까지도 마음에 드는 걸 추리면 10곡이 채 안 된다. 그럼 나머지 20곡은 뭐였을까? 다시 듣다 보니 90년대 앨범들은 트랙이 상당히 적더라. 그 대신 하나하나에 굉장히 정성을 쏟은 게 느껴졌다. 그게 맞는 방법 같다. 이왕 예전 느낌으로 가고 싶다면 곡도 줄이고 좀 더 집중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고르고 고른 결과가 9곡이다. 마침 9주년이라 공교롭게 느껴졌다. 사장님께서 ‘춥다’ 공개 날짜와 앨범 발매일을 각각 9일, 19일로 정하셨는데 그때까지 앨범 제목이 라는 건 모르셨다. 안 그래도 내가 9를 굉장히 좋아한다. 존 레넌의 팬이고 그가 ‘No. 9 Dream’, ‘Revolution No.9’ 같은 노래를 불렀으니까. 좋은 일이 9와 함께 계속되다 보니 여기에 좀 꽂혔다.
심지어 이번 음반은 90년대 장르의 동창회다. 과거에 열광하는 건 젊음과 멀어질 무렵의 징후라던데.
타블로 이 콘셉트를 처음 기획 팀에게 밝혔더니, 그럼 복고적인 거냐고 묻더라.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90년대가 벌써 복고인가 싶어서. 물론 우리도 스마트폰 쓴다. 삐삐 갖고 다니는 거 아니다. 하지만 90년대를 단 한 번도 멀게 느껴본 적이 없는데 그게 벌써 레트로고 올디스가 됐다.
최근에 부쩍 이런 의문이 든다. 30대가 90년대 음악이나 영화에 열광하는 건 객관적으로 당시의 콘텐츠가 뛰어났기 때문일까? 어쩌면 좋았던 기억과 추억이 포개져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투컷 그럴 수 있다. 90년대에는 어떤 진심이 있었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과정이 지금보다 번거로웠고 노래 하나를 들으려면 CD를 구입해서 플레이어에 걸어야 했다. 이런 진심과 정성이 추억을 만들지 않나 싶다. 물론 세대마다 느끼는 바가 다를 거다. 난 아직도 90년대가 컬러로 보이는데 어린 친구들에게는 이미 흑백이다.
아직 심의 전일 텐데 가사 중에 19금 가능성이 엿보이는 건 없나? 대부분의 에픽하이 앨범이 미성년자 청취 금지 판정을 받았다.
타블로 걸릴 내용이야 많다. 눈치를 채느냐 못 채느냐가 관건이다. 처음에 음악할 때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멋있으니까 해보자는 게 많았다. 욕도 그래서 했다. 누가 봐도 빨간 딱지를 붙일 수밖에 없도록 시작부터 끝날 때 까지 ‘Fuck’을 외쳐댔다. 그런데 하다 보니까 그런 식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쓰라 우리도 시스템 안에서 꾀가 늘어난 거다. 한동안은 돌려서 말하는 법을 택하다가 이젠 돌릴 것도 없이 바로 던지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게끔 수를 쓴다.
타블로 이번 앨범을 들어보면 모든 트랙에서 뭔가를 비꼬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성향이다. 단, 우리는 당하는 사람이 눈치 못 채게 비꼬는 게 재미있다. 감성을 공유하는 삐딱한 사람은 다 눈치채고 있는데 ‘올바른’ 부류만 그걸 못 본다. 에 이런 요소가 많아서 걸릴지 안 걸릴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본인의 경험을 가사로 옮길 때가 많나? 아니면 소설을 쓰듯 가상의 캐릭터를 설정하나?
타블로 나는 항상 일종의 스토리를 쓴다. 내 경험과 느낌, 주변 사람의 사례를 조금씩 반영하지만 직설적으로 내 이야기를 옮기진 않는다. 그런데 솔로 앨범 때 특히 오해를 받았다. 화자와 나를 동일시하고 쓴 건 ‘밑바닥에서’ 뿐이다. 하지만 다들 앨범 전체가 나의 독백일 거라고 짐작했다. 이소라 씨와 함께한 ‘집’은 그냥 히키코모리에 대해 쓰고 싶어서 만든 노래였다. 안타깝게도 그 캐릭터가 당시의 나와 너무 닮았다는 게 문제였다. 사람들이 내 가사가 곧 나인 것처럼 이해했다.
미쓰라 나도 내 얘기는 거의 안 쓴다. 되도록이면 내 경험이 노래에 안 ‘묻었으면’ 한다.
투컷 자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제삼자가 볼 때는 쓴 사람 각자의 성향이 가사에 자연스럽게 묻어 나온다. 취향이나 말하는 방식이나.
타블로 다른 누가 부르든 이 노래가 그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길 바란다. 그래서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는 자제하려고 한다.
몇 명의 피처링이 눈에 띈다. ‘춥다’에는 [K팝스타]의 준우승자인 이하이가 참여했는데, 프로그램 출연 당시부터 눈 여겨본 건가?
타블로 응원했던 후보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과 자기만의 방식으로 부르는 건 정말 다르다. 난 가창력으로 노래를 판단하는 게 정말 싫다. 그 사람의 목소리에서 무엇이 느껴지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하이 씨 노래를 처음 듣고 무척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릴 때, 세상을 잘 모를 때만 낼 수 있는 감성도 마음에 들었다. TV를 보면서 언젠가 피처링을 부탁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우리 회사로 온 거다. 웃긴 점은 이하이의 목소리를 좋아하면서도 그것과는 조금 다른 목소리를 주문했다. 내 버릇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있는데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고 내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그 느낌을 보컬에게 주문하면 새로운 목소리가 만들어진다.
그 외의 게스트로는 개코와 박봄이 있다. 친하다는 것과 같은 소속사라는 것 외에 이 사람들을 택한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된다.
타블로 트랙 리스트가 발표되면 어떤 사람들은 소속사가 피처링 면면에까지 영향을 미쳤겠구나 짐작할 거다. 하지만 전부 멤버들끼리 결정한 내용이다. 게다가 우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애들은 아니지 않나.
투컷 시킨다고 다 하진 않으니까. 타블로 다 이유가 있어서 참여해달라고 한 거다. 박봄 씨가 한 노래는 정말 시원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미쓰라 에너지와 아주 높은 고음이 중요했다. 다른 분들도 잠깐 고려는 했는데 박봄 씨가 시원하게 질러주는 걸 듣고 아 이거구나, 했다.
타블로 노래 제목이 ‘Up’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람을 업되게 해주는 보컬리스트를 생각해봤는데 당연히 박봄 씨였다. 개코는 그냥… 친해서. 다른 이유는 없다. 사실 이번 음반은 피처링 비중이 상당히 낮다. 왜냐면 우리가 랩뿐만 아니라 노래도 직접, 그것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문득 노래가 하고 싶어졌다.
미쓰라 스킬적으로 잘하진 못한다. 단지 우리 노래를 우리보다 잘 표현할 사람이 없겠구나 싶었다.
타블로 스킬적으로는 엿 같다. 그런데 맛있는 엿이 되고 싶다. 더 비싼 마카롱도 있지만 엿도 가끔 먹으면 맛있으니까. 랩만큼 노래 비중이 커졌다는 점, 그게 이번 앨범의 가장 큰 변화다. 물론 “얘네가 노래를 해도 될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솔직히 우리조차 의심했다. 타이틀 곡 ‘Don’t Hate Me’는 원래 이적 형에게 부탁할까 고려 중이었다. 그런데 테디 형이 내가 녹음한 가이드를 듣더니 너무 좋으니까 이대로 가라고 했다. 이 느낌을 네가 아닌 누가 내겠느냐면서.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래서 그 뒤를 이어 쓰라도 노래하기 시작하더니….
미쓰라 막 코러스도 넣고.
타블로 맞다. 쓰라가 화음을 넣고 진화를 거듭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노래를 잘 부르기 시작했다. 그전에 앨범 작업이 끝나버리긴 했지만.
미쓰라 그런 생각은 한다. 우리가 가능하다면 이 노래를 못 부를 사람은 없다. 굳이 키를 낮추지 않아도 된다.
타블로 노래방에서 120점도 나올 수 있다. 커버 콘테스트를 하면 대부분 원곡보다 좋다는 평을 들을 거다.
요즘 뮤지션들의 컴백은 예능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구분되는 느낌이다. 이번에 에픽하이는 어느 쪽인가?
타블로 예능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이 있는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5집부터 뜸해졌다. 그러니 이번에 안한다고 해도 놀라운 변화는 아니다. 어쩌다 기회가 되면 또 열심히 할 거다.
출연 자체를 즐기기는 하나?
미쓰라 가끔은 재미있다. 그런데 잘 못할까 봐 걱정이 된다.
타블로 불러주면 고마운 일이지만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재미있는 점이 하나 있다. 예전에는 힙합이나 인디 신에서 예능에 나가는 팀이 우리뿐이었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해서 이젠 다 하는데 우리만 빠져 있는 모양인 거다. 시대에 뒤떨어진 건가 싶다.
미쓰라 혹은 너무 앞서갔을지도.
그래도 <무한도전>에서 ‘전자깡패’라는 명곡을 탄생시키는 데 공헌했다. 정형돈은 그 이후 자신 안의 갱스터를 발견했는지 결국 형돈이와 대준이까지 결성했다.
타블로 우리보다 더 잘나가는 래퍼가 되셨다. 형돈이 형은 MC 빡돈을 깨워준 게 우린지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어느 먼 훗날에 아, 그런애들이 있었지, 기억만 해주면 감사하겠다.
한때는 맵더소울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지금 속해 있는 YG엔터테인먼트는 한국 매니지먼트 중에서도 가장 큰 회사 중 하나다. 는 거기서 내 놓는 첫 앨범인데, 일할 때 환경의 차이를 많이 느끼나?
타블로 들어온 사람들만 아는 이야긴데, 여기가 엄청나게 체계적이고 어마어마한 분위기는 아니다. 다른 기획사에도 있어봤고 독립도 해봤지만 지금이 언더 시절 못지않게 자유롭고 편하다. 회사 전체가 오로지 음악뿐이다. 거의 오타쿠 집단 같다. 우리는 사옥의 2~3층을 오가며 작업하고, 4~6층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른다. 그다지 화려한 느낌도 없다. 그냥 좀 좋은 소파가 있는 정도?
YG라는 소속이 필요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타블로 독립 상태에서 바로 YG로 갔다기보다는 먼저 지옥으로 갔다가 거기서 기어 나오고 있을 때 양 사장님이 손을 내미셨다. (강)혜정이가 원래 YG 소속이었으니까 스태프들이 사람 대하는 걸 보며 평소에 느낀 바도 있었다. 단지 소속 배우의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날 가족처럼 챙겨주더라. 어떤 욕심이나 전략을 갖고 매니지먼트를 택하지는 않았다. 그냥 이곳은 내 와이프가 소속됐으며, 뮤지션의 색깔을 인정하고 잘 지원해주는 회사다. 우리에겐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는데 밖에 있는 사람들 눈에는 뭔가 대단한 결정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맵더소울 시절에는 잠깐이나마 매니저도 두지 않고 활동했다. 인터뷰를 요청하려고 회사에 전화했더니 투컷이 받아서 일정을 잡더라는 이야기를어느 기자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투컷 당장 인력은 없고, 누군가 그 역할을 맡아야 했다. 두루 아는 사람이 많은 내가 자연스럽게 한 거다.
타블로 나한테는 회사 차린 때가 가장 후회 되는 시기다. 상처만 많았다. 그 당시의 우리를 좋아하는 팬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 시기가 아픔만 상징한다. 개인적으로는 그 무렵 낸 앨범은 쳐다보기도 싫고 듣기도 싫다. 나쁜 기억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다시 들어도 정말 괜찮다 싶은 에픽하이의 노래로는 어떤 걸 꼽겠나?
타블로 나는 ‘Fly’ 들으면서 진짜 운다. 그 곡을 듣거나, 노래방에서 부를 때면 울컥한다. 그 노래가 상징하는 모든 게 우리한테는 너무 벅차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꾸준히 잘나갔더라면 이런 느낌을 갖지 못했을 거다. 그 후 더 치솟기도 했지만 완전히 무너지기도 했다. 그래서 ‘Fly’만 들으면 오래전 우리 셋이 가장 많이 웃고 즐거웠을 때가 떠올라 눈물이 난다. 다시 활동하면 이 곡을 부를 일이 생길 텐데 좀 걱정이 된다. 전주만 시작돼도 어쩔 줄을 모르니까.
미쓰라 ‘Love Love Love’. 이즈음 부터 음악 색깔이나 우리의 생각이 부쩍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이 곡 하나만은 밝았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기도 하고. 사실 나는 활동 당시 이 곡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것이 맞는 방법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내 고집도 중요하지만 그건 적당히 부리고, 팬들이 정말 듣고 싶어 하는 걸 들려주는 것도 의미 있지 않나 싶다. 이젠 밝은 음악을 하고 싶다.
투컷 나는 ‘Fan’이다. 당시에는 그냥 정신이 없었다. 막연한 느낌만 기억날 뿐 자세한 건 까먹었다. 뭔가에 홀린 듯이 살았다.
타블로 그즈음의 기억은 그것뿐이다. 1위 하면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꽃가루. 정신없는 와중에 여기저기서 그것만 보였다.
투컷 ‘Fly’가 우리를 도약시켰다면 ‘Fan’은 제대로 터뜨려준 곡이다. 그 느낌이 그립고, 다시 경험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
미쓰라 그때 더 즐길 걸 그랬다.
타블로 이 기사가 나올 즈음 그걸 느끼고 있으면 너무 고마울 것 같다. 사람에게 인생에 두 번째 기회가 가능하구나, 한 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구나 하는 걸 느끼고 싶다.
‘월드 스타’ 싸이가 같은 소속사다. 사실 에픽하이도 아이튠즈 차트 등에서 성적이 괜찮았는데….
타블로 싸이 형의 ‘강남스타일’ 이후로는 해외에서 얻은 약간의 반응이 화제가 됐다는 것 자체가 창피해서 미치겠다. 기사를 다 찾아서 없애 버리고 싶다. 물론 아이튠즈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을 때는 뉴스 보며 우리도 흐뭇해했다. 하지만 지금 싸이 형을 보고 있으면 우리 존재가 너무 작아지는 거다. 도 해외에서 작은 반응을 얻긴 할 거다. 그런데 기사는 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이제 해외 진출 좀 했다고 말하려면 ‘강남스타일’ 정도는 되어야 한다.
미쓰라 지금껏 얻은 것도 감사한 성과지만, 그 앞의 어마어마한 것 때문에 이번에는 조용히 지나가고 싶다. 우리는 해외 진출이 아니라 해외에 여행, 아니 구경 좀 다녀온 수준이다.
오래전의 인터뷰에서 한때는 해체 위기를 겪었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셋이 9주년을 맞게 됐다.
타블로 해체 위기는 항상 있는 거다.
미쓰라 인터뷰하는 지금도 위기 중일지 모른다. 우리는 알 수 없는 팀이기 때문에.
타블로 그렇지만 자의로 해체할 일은 없다. 한다면 타의로, 원하지 않는 해체를 하는 거겠지. 이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9년에 9년을 더해 18년이 됐을 무렵에는 에픽하이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나? 말하고 나니 숫자의 어감이 좀….
타블로 어제 멤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지금 사람들이 앨범에 많은 기대를 하는 건 확실하지 않나. 이때 최대한 즐기자. 이렇게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관심을 갖고 환영 해주는 날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젠 나이도 적지
않으니까. 젊음을 믿고 뭔가 신나게 해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진짜 딱 그 마음이다.
지난 6집 이후 타블로와 투컷은 결혼을 했고 이미 아버지가 됐거나 곧 아버지가 될 예정이다. 미쓰라는 7집을 준비하면서 멤버들이 전과 달라졌다고 느끼진 않았나?
미쓰라 타블로 씨는 내가 걱정할 정도로 작업실에만 붙어 있다. 거의 결혼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가 태어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투컷 씨는 사정이 다르지만, 아무튼 기대하고 있다. 투컷 씨의 복귀를, 늦바람을.
타블로 늦바람 수준이 아니라 늦토네이도일 수도 있다. 늦허리케인 이거나.
미쓰라 투컷을 볼 때마다 빨리 이 노래처럼만 되라고 생각한다. 지디&박명수의 ‘바람 났어’.
투컷 저도 빨리 원래의 저를 찾고 싶습니다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정준화
- 포토그래퍼
- 유영규
- 스탭
- 스타일리스트 / 지은(Gee Eun), 메이크업/ 임해경, 헤어 / 황수진(이가자 헤어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