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계는 미인대회와 닮았다. 더 기발한 아이디어와 더 충격적인 스펙터클이 소란스럽게 경쟁하는 그 속에서 자연의 물성을 가져다 초월의 세계를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작가가 있다. ‘한국인’ 임에도 일본에서 중요한 미술 사조를 일구었으며 ‘한국인’임을 내세우지 않아도 이미 뉴욕과 파리에서 동시대의 무게 있는 아티스트인, 그리고 뼛속까지 한국인인 화가 이우환. 그의 파리 아틀리에에서 아티스트가 발산하는 고요한 여백과 마주했다.
아주 불경스러운 이야기부터 꺼내자면, 이우환의 작품이 내게 깊은 첫인상을 남긴 순간은 작가가 매우 싫어하는 장소에서였다. 미술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몇 년 전의 아트 옥션. 작품 가격을 십수억까지 올려놓은 건 당시의 경제적 문화적 정황과 분위기, 어떤 우연과 집단적 열광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때 상기된 얼굴로 이우환의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은밀한 전설을 공유하는 뉘앙스가 맴돌았다. 물론 ‘캔버스에 점 몇 개일 뿐인데’라고 작품에 대해 무성의하게 묘사하는 무례한 호사가들을 포함해서. 몇 년이 지나 이제 서울의 미술 시장에는 그 한낮 같던 뜨거움은 가라앉았다. 갑작스러운 숭배와 스타 만들기가 어지럽게 횡행하는 미술계에서, 어쩌면 작가는 자신을 둘러싼 호들갑이 어서 지나가기를 담담하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인터뷰를 극도로 꺼리는 아티스트와 만나기 위해 에디터는 여러 차례 편지와 질문지를 보냈다. 다행히 곡진한 의도가 전달된 모양이었고, 도쿄와 뉴욕, 텍사스 휴스턴을 오가는 숨 가쁜 일정 가운데 마침내 그리고 간신히, 파리에서의 토요일 아침 10시를 확보할 수 있었다. 피갈 근처의 1층 건물, 대문과 마당을 함께 쓰는 옆집 문을 한 차례 잘 못 두드렸을 때 거기 사는 다른 화가가 ‘우판’의 아틀리에는 옆이라며 검지손가락을 왼쪽으로 폈다.
정확히 아침 10시가 되었을 때 내 앞에는 맥북과 가나자와에서 왔다는 녹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주름진 얼굴의 이 화가가 앉았다. 문을 제외한 작업실의 삼면에는 제작 중인 캔버스들이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일필휘지 단숨에 그려내는 것처럼 회자되던 그의 ‘점’은 실제로 보니 도톰하게 입체감이 느껴졌다. 물감에 돌의 성분을 갈아 섞어 쓰며, 한 번 그리고 마르면 그 위에 덧칠을 서너 차례 반복해 40일 정도에 걸쳐 완성하기 때문이다. 벽에는 현대미술관 ‘주 드 폼(Jeu de Pomme)’에서 그가 가진 전시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허리를 숙인 채로 넓은 붓을 들고 캔버스에 칠하는 모습은 신중한 잭슨 폴록처럼 보였다.
많은 아티스트들을 그들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인터뷰했다. 대규모 컨베이어벨트인가 소규모 가내수공업인가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그곳들은 대개 공장 같았다. 컴퓨터가 얼마나 개입되어 있는가 하는 작업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정통 회화 작가들조차 어시스턴트들의 손을 빌려 작품을 완성하는 경우가 많은, 그야 말로 대량생산의 시대니까. 그런 면에서 작품과 직접 접촉하고 붓이나 물감, 캔버스의 상태가 그날의 미묘한 변화를 결정한다고 말하는 이우환의 작업 방식이야말로 잊고 있던 회화의 ‘오라’를 일깨운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어느새 그림이 내게 그리게 하고 있다’고 이우환은 그림과 자신의 관계를 묘사한다. 오래된 방식의 접촉과 응시를 숱하게 통하며 캔버스와 평생을 지나온 사람에게서 나오는 담담한 기술이었다. 인사와 인터뷰 사이, 기록되지 않을 이야기들을 나누는 차 한 잔의 시간 동안 주 드 폼의 포스터를 보며 나는 올해 초 그곳에서 있었던 중국 작가 아이 웨이웨이의 전시를 입에 올렸다. 정부에 반대하는 발언으로 작가가 구금당한 이후 그의 블로그가 폐쇄되자, 이전에 올린 별 의미 없는 사진들까지 전시되고 있었다. 관객들이 만두며 잠자는 고양이, 엘리베이터에서의 셀프 카메라 같은 걸 진지하게 관람하는 상황에 대해 웃으면서 듣던 작가는 경남 억양이 도드라지는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던 정체성이 주변의 여건에 의해 하나의 메타포가 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오늘날의 시간이랄까 정치성의 공기가 그걸 의미 있게 보여주는 거지, 그 공기가 사라졌을 때는 또 아무것도 아니게 될 수 있지요. 예술 작품이 인기가 있다 해도 정말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가 문제예요. 그건 시간이 흘러봐야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지난해 구겐하임에서는 ‘무한의 표시(Marking Infinity)’라는 제목으로 이우환의 회고전이 열렸다. 한국 작가로는 백남준에 이어 두 번째, 아시아 작가로서는 세 번째다. 1936년생인 이 아티스트는 서울대 미대를 다니던 스무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래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존재로 공부하고 작가가 되었으며, 유럽에서는 ‘동양적’이라는 존재 규정과 다투며 자발적 이방인으로 살았다. 산문집 <여백의 예술>에서 그는 ‘나에게 동양적이라는 말만큼 미심쩍은 것은 없다’고 쓰고 있다. “고향을 떠나면 고향에 돌아가지 말아야 해요. 외국에 유학을 가면 금방 마치고 한국에 와서 대학교수가 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자기 공동체가 아닌 타자들 앞에서 자기를 세우고 거기서 통할 수 있나 남과 싸우면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유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어떤 시간과 공간이 지나고 나서 지금의 공기가 사라졌을 때 무엇이 남을까, 상상해보면 많은 것들에서 거품이 걷히고 시야가 또렷해진다. 이우환이 ‘그 자리에서 싸운다’고 표현했을 때 그 싸움의 상대가 있다면 누굴까. 그건 다른 나라, 미술계의 인정, 성공, 이런 가치가 아니라 아마 가장 파괴적인 힘을 지닌 시간의 유한함 그 자체가 아닐까.
world wide interview LEE UFAN
얼마 전 텍사스 휴스턴에 다녀오신 걸로 안다. 어떤 목적의 방문이었나?
휴스턴이라는 데는 서너 번 갔는데 NASA가 있는 곳이라는 정도밖에 몰랐다. 땅은 사막에 가깝지만 비가 잦고, 습기가 많은 곳이다. 거기에 아시안 소사이어티 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홀이 생겼다. 일본의 요시오 다니구치라는 건축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인데 그가 건물에 조각 작품을 넣는 작업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다니구치는 너무 수줍은 사람이며 섬세하고 여성적인 사람이다. 휴스턴이라는 와일드한 도 시에 자기처럼 정갈하고 섬세하고 수줍은 건물을 세웠다.
MoMA 리뉴얼을 한 일본 건축가 말인가? 더블유와도 도쿄에서 인터뷰한 인물인데, 그분 건물이라면 프랭크 게리같은 건축가의 화려함과는 확실히 대비되겠다.
정확히 정반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물로 돈지랄을 하고 싶을 때 프랭크 게리 이상이 없다고 본다. 그런 돈칠갑의 냄새없이 아주 뉴트럴하고 퓨어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다니구치란 사람이다. 이를테면 약간 여성적이라 할 만큼 섬세한 공간을 만든다. 꽤 큰 공간에 2층의 일부를 터서 하늘도 보이고, 네 벽 중 한 면이 바깥으로 열린 데다 내 조각을 넣은 거다. 그 조각은 반 외부에 위치한 거나 마찬가지다. 철판은 한 모서리를 들어 마치 돌을 보고 윙크하고, 돌은 또 거기에 대꾸하는 식으로 그쪽 철판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게 앉혀놨다. 철판과 그 돌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공간의 느낌이 와 닿게 하는 게 중요하니까.
반응은 어떻던가?
유럽에서 오래 활동했기 때문에 미국, 유럽, 한국 미술 관람객의 차이를 느낄 것 같다. 차이가 확실히 있다. 유럽은 대단히 오랜 역사와 특이한 이미지를 축적하고 있는 곳이다. 이 사람들은 문화의 역사가 깊다 보니 미술사적인 어떤 배경을 중요시하고, 반면 직설적인 표현이나 나이브하고 소박하게 뭔가 제공한다거나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미국 쪽은, 문화적 역사가 짧은 나라다. 근데 또 배경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러시아, 유럽… 제각기 너무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다양하게 모인 경우기 때문에 ‘일단은 그 배경 이야기는 그만두고, 미국이라는 이름 아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하는 데 미국적 태도의 특성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주 뉴트럴해지는 부분이 있다. 미국인들은 전시에 대해 전문가나 일반인이나 반응이 유사하다. “원더풀”, “베리 스트롱”, “베리 심플”… 말이 아주 간단하다. 알겠는지 모르겠는지를 그냥 그대로 뱉어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전시를 한마디로 정의 내리려는 사람도 없거니와, 부끄러워서라도 그렇게 얘기 못한다. 어쨌거나 내가 구겐하임에 전람회를 하게 된 배경에는, 유럽에서 오래 버티고 나름대로 알려졌다는 게 힘이 됐다. 그냥 한국이나 일본에서 무작정 뉴욕으로 진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백남준이라는 분도 독일이 기본적으로 무대가 되고 오랫동안 미국을 왔다갔다했기 때문에 전람회가 이루어진 거다. 그런 여러 가지 배경의 힘을 얻고 있다는 걸, 다만 알고 인정하자는 거다. 미국 와인은 한 모금 마시면 대단히 와일드하고, 힘도 있다. 근데 꿀꺽 삼키면, 지금 내가 뭘 마셨더라 하고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꼬리가 거의 없다시피 약하다. 그게 꼭 미국 사람 같다. 눈 앞에서는 와, 하고 액션이 큰데 뒤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근데 유럽 사람들은 처음 머금었을 때보다 여운, 뒤꼬리가 길고 여러 가지 향과 느낌이 떠올라야 좋은 와인으로 친다. 그게 유럽이다. 좋다 나쁘다의 가치 판단을 떠나서 그런 차이가 있다.
미술 관람객과 와인의 비유를 한국으로 가져오면 어떨까, 한국 사람들은 일단 술이 좀 독해야 하고 마시면 취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웃음) 지금은 그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활이 안정되고 사회에 여유가 생기면 취하지 않고 마시는 그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되리라 본다.
한국을 떠나서 산 세월이 더 길다.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지겹도록 들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
56년에 떠났으니까. 나도 내적으로는 한국인이라는 의식이 강하다. 하지만 말로, 표현으로 그걸 강조하면 거꾸로 자기가 스스로 바깥에 대해서 문을 닫아버리는 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국적 정체성, 한국성 이런 걸 너무 강조한다. 나는 한국에 갈 때마다 그 문제 때문에 늘 부딪치고 잘못 얘기해서 오해를 살 때도 많다. 외국에 나와 있는 분들은 가능한 한 자기 일을 열심히 해서 돋보이게 되면 자연히 그게 한국을 대변하게 되고 한국을 좋게 보이게 하는 거라는 식으로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말하면, 내부에 있는 분들에게는 한국인임을 감춘다거나 부끄러워한다는 식의 전혀 다른 오해를 사는 일이 생긴 것이다. 가령 파리에서 한국적인 것, 한국인임에 대해 얘기하면 “아 그러십니까, 잘 놀다 가세요” 하는 반응이 와버리고 대화가 진전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같은 테이블에서 오늘날 세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동등하게 주고받아야 서로 의미 있어 한다. 그런 가운데 한국인의 특성이 나타나면 자연히 이 사람은 한국에서 왔으니까 저런 식의 발언을 하나 보다, 이렇게 되는 거다. 한국의 특이성을 강조만 하는 걸로는 한국이 매력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한국의 고전 미술을 가지고 와서 전람회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휴스턴에서도 미술관 오픈 전시로 록펠러 재단 컬렉션 특별전을 했다. 도자기와 불상 계통이 두 점인가 나왔는데 소개나 설명이 불충분했다. 어수룩하다, 담소하다, 소박하다, 자연스럽다…이런 어휘들은 미술계에서 통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문화적인 용어가 아닌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미술사에서 쓰는 ‘자연스럽다’는 말이야말로 문제가 있다. 전 세계에 자연을 안 가진 나라는 없다. 인공적, 인위적인 게 덜하다는 뜻이겠지만 자연은 일단 문화에 대비되는 개념 아닌가. 많은 서양 사상가들은 자연을 폭력적이고 무질서하고 카오스한 상태로 봤다. 그러니까 이를 통제하기 위한 질서를 제시하고 다시 짜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건 서양인들 사고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다. 한국적 미를 설명하는 어휘를 개발해야 한다. 내가 이런 쓴소릴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늘 욕을 얻어먹는다
‘그리는 일’이라는 선생님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작품이 불가사의한 힘으로 가득 차 보이는 것은, 대개 나와 그림이 겨루었던 것이다. 이 텐션과 밸런스의 무언가가 나를 화가이게끔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작품과 겨룬다는 표현이 근사했다. 미술 작품을 볼 때 곧 예술가의 내면 세계라고들 여기는 생각을 흔들어주는 듯했다.
아이디어를 내고 모든 걸 생각해서 결론을 내린 다음, 그걸 그리는 것은 아니다. 모티프랄까 힌트,아우트라인을 우선 내가 마련하는거다. 막상 캔버스 앞에 서면 그날의 날씨와 공기, 나의 생리와 기분, 붓과 물과 기름, 물감… 이런 상태와 관계가 모두 늘 똑같지 않다. 내가 드로잉해놓은 대로 이쪽 몇 센치 저쪽 몇 센치 정해서 그날 콤포지션에서 그리자고 하는데 막상 그리려고 하면 마음이 달라진다. 좀 더 비켜나야겠는 거다. 그리고 한꺼번에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수 없이 칠한 거다. 그날 몇 번이고 칠하고, 일주일 내지 열흘 말려서 또 칠하고 그걸 3~4번 반복하면 그림 하나 완성하는 데 40일 정도 걸린다. 처음에는 이것보다 작다가 점점 커진다. 그릴 때마다 조금씩 어떤 차별성이랄까 어긋남이 나오는 거다. 그런 어긋남의 느낌이 없으면 그리는 재미가 없어진다. 생각대로 그리는 게 아니다. 생각한 그대로면 재미가 하나도 없다. 생각이 꼬투리가 돼서, 생각이 어떤 뭔가를 물고 오는 부분이 돼서 다른 게 거기 첨가된다거나 빠진다거나 해야 그림이 재미가 있지.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관철해 내는 데서 의의를 찾는 아티스트도 많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건 불가능하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온갖 수단으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의 밑그림을 분석한다. 스케치는 단일하지 않다.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살아 있는 거다. 살아 있기 때문에 드로잉과 결과물은 늘 바뀐다. 그릴 때마다 순간순간 살아 있기 때문에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는 거다. 짜증을 부리다가도 또 조금 더 덧칠해보자, 빼보자, 바꿔보자 그런 무수한 차이성 안에서 노는 거다. 그래서 비슷한 그림을 수많이 그리게 된다. 그릴 때마다 화가의 무수한 생각이 왔다갔다한다. 세잔이라 는 화가는 그런 의미에서 어떤 철학자보다 위대했다. 사물을 바라보는 일, 그림을 그리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발견한 거다. 데카르트가 그랬다시피 인간은 모든 사물을 거기 있는 그대로가 아니고 이쪽이 보고 싶은 대로 짜서 본다. 모든 외부 세계는 인간이 머릿속에서 재구성해서 보기 때문에 신용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 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게 모네 그리고 세잔이다.모네는 같은 대상물인 수련을 봄여름가을겨울 아침점심저녁 다 다르게 봤다. ‘외계가 존재한다’는 건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지만 실은 위대한 말이다. 서양 근대 철학자들은 전부 인식하는 내면에, 자아 속에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세잔은 그림을 그릴 때 감각이라는 단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건 나무를 그리건 사과를 그리건, 시시각각 바뀌는 걸 안 거다. 예술은 예술가 혼자 모든 걸 짜서 고안해내는 게 아니다. 자연이라는 엄청난 그 무엇과 소통하는 신비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작곡가가 음악을 하는 것이다. 아주 작은 그런 차이성 때문에.
지금 당신을 가슴 뛰게 하는, 살아 있게 하는 작은 차이는 뭔가.
늘 느끼고 생각하는 건 내가 못다 하고 있어 안타깝다는 거다. 이 나이를 먹고 책도 읽고 하니까 보이는 것이 조금씩 더 많아지는데, 거기에 비해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능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은 역시 무언가 순간순간 반짝 하고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을 때 진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런 순간을 안다는 것만 해도 너무나 신비적이고 경이롭다.
- 에디터
- 황선우
- 포토그래퍼
- KOO DONG E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