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하게 꽉 차 있고, 묵직하게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에게는 차가운 금속 덩어리지만 다른 이에게는 생명을 담는 가능성의 그릇이다. 사용할 수 없는 이 화분은 역설적으로, 쓸모없기 때문에 예술로서 의미를 갖는다. ‘빅 팟’의 작가, 장 피에르 레이노를 파리의 자택에서 만났다.
worldwide interview JEAN-PIERRE RAYNAUD
아트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를 직접 ‘봤다’ 혹은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진으로 보고 아는 미술은, 아주 많이 양보하자면 고전적인 회화까지가 아닐까 싶다. 캔버스의 2D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현대 미술은 오감을 동원해 경험하는 차원의 문제가 되니까. 가령 베를린의 국회의사당을 통째로 포장하거나 오렌지색 천이 달린 문들을 쭉 세워 뉴욕 센트럴 파크를 둘러싼, 크리스토와 장 클로드 부부의 대지 미술 작품을 생각하면 사진이나 스케치로 그 기록을 접하고 아는 건 실제 보는 것과 아주 다른 경험일것이다. 이처럼 한 공간 안에서 그 스케일과 소재감을 직접 느낄 때의 감흥이 유독 특별한 미술 작품이 있는데, 장 피에르 레이노의 ‘빅팟’ 시리즈 역시 그렇다. 국내 금융사 광고에도 등장하면서 이 커다란 화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특정한 장소에 설치된 상태로 이 거대한 구조물을 접하는 건 아는 것과 또 다른 감흥을 준다. 예를 들어 베이징의 자금성이나 파리의 퐁피두 센터 앞에 놓였을 때, 그리고 관람자가 그 앞에 서서 바라볼 때 빅팟이 있는 풍경은 비로소 완성된다. 텅 빈, 혹은 차가운 금속으로 된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누군가는 여기 심겨진 씨앗을 짐작하거나, 거기에서 자라날 무성한 가지와 잎을 상상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품을 것이다.
레이노는 파리에 있는 자신의 오래된 복층 아파트에서 편안하게 더블유 인터뷰 팀을 맞았다.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은 뉴욕으로 여행을 가고 없었다. 겨울의 이른 아침, 복층으로 된 집에 빛이 잘 안 들어 사진이 잘 나오지 않을까봐 속상해했으며, 계절이 바뀌면 자신이 매일 출퇴근하는 바르비종의 아틀리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바르비종은 파리에서 1시간여 떨어진 퐁텐블로 숲 근처의 아름다운 마을로, 소박한 시골 풍경에 반한 화가들이 모여들어 작품을 만들고 교류한 지역이다). 이 아티스트가 자신의 아이패드를 가져와 보여주는 사진 속에서, 장 미셸 빌모트가 모던하게 개조한 바르비종 아틀리에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시아 식으로 아름답게꾸민 정원의 식물들 가운데에는 당연하게도 빅팟이 놓여 있었다. 물론 그 풍경이 그 장소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는, 직접 가서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프라이빗한 장소로 초대해줘서 고맙다. 당신의 작품과 기록이 밀집되어 있는 이곳에서 인터뷰할 수 있어 대화가 더 풍성해질 거라 기대한다.
사실 파리의 집보다는 바르비종의 아틀리에로 초대하고 싶었는데 아쉽다. 바르비종이 훨씬 근사한 공간이지만 파리에서 만나는 게 인터뷰하기 더 편하니까. 정원이 참 아름다운데 날이 따뜻해지고 식물이 자라면 그곳에서 다시 만나면 좋겠다.
파리에 머무는 시간과 바르비종에 머무는 시간은 어떻게 나뉘나?
매일 왔다갔다한다. 사실 파리에서 50킬로미터 밖에 안 떨어진 데다 거기가 공간도 훨씬 넓고 자연과도 가까이 있다. 나는 그곳에 완전히 아시아 식의 정원을 만들어놓았다. 아름답게 정원을 꾸미고, 대나무 의자도 놓았다. 바르비종의 아틀리에는 내 친구인 건축가 빌모트와 함께 만들었다. (빌모트 또한 더블유와 인터뷰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아, 그런가? 그는 정말 유능한 건축가여서 아주 오래된 공간을 모던하게 바꾸는 역할을 근사하게 해줬다. 정원에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수집한 것이 많이 있다. 난 아시아를 좋아하고, 아시아 스타일을 사랑한다.
사실은 여기 오면서 어떤 사이즈의 화분 작품이 있을까 기대했다. 이 공간에는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바르비종 아틀리에에 진짜 빅팟이 있는 광경이 근사하다.
빅팟은 이렇게 눈이나 나뭇잎, 햇볕 같은 자연 요소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더 아름답다. (그가 아이패드를 가져와 보여준 파빌리온 사진을 보고 스태프들 모두가 동시에 아름답다며 탄성을 내질렀다). 이건 노르웨이 스타일의 파빌리온으로, 1880년에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당시 노르웨이관으로 쓰인 걸 가져왔다. 에펠탑이 지어진 해이기도 하다.
당신의 예전 전공이 원예학이라고 들었다. 정원을 공들여 가꾸거나 화분에 애착을 갖기 시작한 것과 이 점이 서로 연관관계가 있을까?
내 생각엔 그렇다. 형식적 분석까지 할 순 없지만, 화분은 자연의 시적인 오브제라고 생각한다. 원예를 공부하다가 내가 미술로 방향을 바꾸었을 때 그 단순하고 명확한 사물을 가지고 온 것 같다. 미니멀하고 모던한 모양을 가진, 대칭적 형태의 화분 말이다. 내가 원예계를 떠나 미술계로 오면서 가지고 온 단 하나의 유산이다. 화분 모양이라는 건 심벌이고 어떤 사인이다. 이게 벌써 55년 전 일이지만.
미니멀, 대칭, 균형이 잡힌 형태도 의미가 있겠지만 내용적으로도 봤을 때 생명을 키워내는 그릇이기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당신 스스로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나?
예술이란 분야는 인생을 말한다. 삶의 대용인 것이다. 그런데 이게 진짜 삶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진짜 삶은 인간, 동물, 식물 같은 자연이다. 반면에 예술 작품은 개인적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사실 예술은 삶에서 필요 없어 보이지만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그 점이 가장 미스터리하다.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왜 우리가 피카소의 작품을, 마네의 작품을 가지고 싶어 하겠나? 하지만 인간은 아름다움뿐 아니라, 인생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예술을 필요로 한다. 어쩌면 생명의 유한함을 초월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내 화분은 아무 기능이 없다. 나에게 그건 그냥 하나의 조각이다. 닫혀 있고, 그래서 안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 다만 예술 작품이라는 사인만 보여줄 뿐이다. 예술 작품은 어느 것에도 사용되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오히려 아무 데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흥미로운지도 모른다. 만약 화분 안이 비어 있다면 그걸 여러 용도로 쓸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작품으로서 더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생활에 사용되는 물건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랬다면 여기저기 다 쓰여서 너무 일반적인 것으로 전락할 테니까.
50년대 말 알제리 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고 들었다. 치열한 전장에 있을 때야말로 예술이라는 것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존재의 목적,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진실은 나도 끝까지 모를 것 같다. 과거의 지나간 시간이나 경험한 사실들이 예술에 반영되기도 할 거다. 흥미로운 점은, 아티스트는 뭔가 표현하기 위해 자기 일생에서 어떤 요소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난 프랜시스 베아컨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마티스가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는지 궁금하지 않다. 그런 정보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에는 예술가의 경험이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예술의 목적은, 예술가의 일대기를 설명해주는 게 아니다.
퐁피두에 설치된 당신의 작품을 봤다. 장소특정적인 미술의 특성상 머릿속 아이디어와 실제 작업을 마친 후에 다른 인상을 받은 적이 있나?
퐁피두 작품 같은 경우 위치가 한 번 바뀌었다. 같은 자리에 10년이 넘게 있었기 때문에 내가 미술관 측에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같은 자리에 한 작품이 너무 오래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 작 품을 보지 않는 것 같다. 따라서 작품에 다시 생기를 불어 넣어야 했다. 마치 오래 사귄 커플이 잠시 떨어져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보는 위치가 바뀌면서, 그 화분에 두 번째 삶을 준 셈이다. 내 작품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다양한 장소에 적응을 잘하며, 커뮤니케 이션과 물리적 거리가 중요하다. 난 내 작품이 시체처럼 가만히 죽어 있는 걸 원치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 사람들 을 이해시키는 건 정말 힘들다, 왜냐면 뮤지엄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화분을 처음 봤을 때 친근하게 느끼는 사람이 많다.
여러 도시에서 여러 차례 전시를 했는데, 화분은 어린이를 포 함해 모든 사람이 한눈에 알아보는 사물이다. 사람들이 한눈에 내 작품을 알아보게 하기 위해 단순하고 누구나가 아는 사물을 이용하는 것, 그게 내가 일하는 방식이다. 커 뮤니케이션의 한 방법인 것이다. 사람들이 이 작품의 탄 생 신화를 알든 말든 그건 전혀 상관없다. 왜냐면 사물 자 체에는 모두가 아는 고유한 사인이 있기 때문이다. 조용 하고 고요하고, 힘도 있으며, 자연에 관련된 것인 동시에 자연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다. 고요한 사물인 동시에 인 간이 만든 것이다. 조각을 한 것이 아니지만 이 사물 자체 가 조각품이다. 이 사물은 사람과, 자연과, 둘러싸인 건물 과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이런 복합성 때문에 이 화분이 세계 곳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화분 시리즈가 누구나가 한눈에 알 수 있는 작업이었다 면, 화가들의 이름을 다양한 색으로 표현한 글씨 시리즈 는 사전 지식이나 배경 지식이 필요한 작업으로 보인다.
예술은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끌어당김이 있을 뿐이다. 나는 작품 안으로 들어가 여행할 것을 권한다. 가능하면 가장 쉬운 오브제를 사용하려 한다. 예를 들어 (옆에 있는 신호등 시리즈를 가리키며) 이건 단순히 세 개의 페인트 통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 않나. 사람들에게 그것들 이 복잡해지기 전 그 가장 단순한 상태를 보여주고 싶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단순한 것을 보면 무서워한다. 명확하 게 받아들여야 할 것 앞에서 명확한 것을 찾지 못한다, 왜?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난 더 똑똑해 보이기 위해 더 복잡한 미술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은 단 순함이 있는 마티스의 종이 자르는 시리즈를 좋아한다.
가장 최근 작품에는 해골이 등장하는 것 같은데 어떤 맥 락인가?
1만 년 된 해골의 사진을 찍은 다음 세라믹에 새 기는 방법을 통해 작업했다. 죽은 이의 역사가 아닌, 이 해 골로서의 또 다른 삶을 입힌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아이 들이 단어 공부할 때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을 붙여 넣었 다. 각각의 작품에 들어가는 알파벳은 아무리 조합해도 단어가 되지 않는 게 특징이다.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움 이 있고, 죽음과 삶이 있는 이 균형 잡힌 것이 난 좋다. 마 치 인생처럼 말이다.
- 에디터
- 황선우
- 포토그래퍼
- 조보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