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올림픽이라 불릴 정도의 규모와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 미술전, 동시에 가장 뜨거운 담론을 만들어내는 가장 젊은 미술 잔치. 올해 11월 27일까지 열리고 있는 제54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열기 속으로.
“베니스의 해인가, 아닌가?” 연초마다 여름휴가를 떠올리면 일순위로 떠오르는 질문이다. 그리고 홀수 해라면 자연스럽게 행선지는 결정된다. 산타루치아 역에서 나오면 금박지를 덮어놓은 듯 눈앞에서 반짝이는 담녹색 바닷물과 바람에 남몰래 간직해온 로망이 실현되는 듯 벅찬 감동과 자유를 느끼며 숨을 깊이 들이마시게 된다. 밤엔 그 금박지가 그대로 하늘의 별밭을 만든다! 일단 베니스에 도착하면 모든 감각이 새롭게 더 넓어지고 풍부해지는 기분이다. 괴테가 베니스를 처음 보았을 당시 “나에게 베네치아는 어느 화가가 가장 최근에 그린 최고의 명화를 보는 것 같았다”라 말한 것과 같이 베니스를 만나는 풍경은 늘 감격적이다.
2년마다 전 세계의 조명을 받으며 펼쳐지고 올해로 54회를 맞이하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미술 올림픽이라 불릴 정도로 최고 규모와 그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 미술전이지만 현재의 가장 뜨거운 담론을 만들어내는 가장 젊은 미술 잔치이기도 하다. 올해엔 무엇으로 시끄러웠을까? 우선 그 규모가 이전에 비해 어마어마해졌다. 89개국 국가관이라는 역대 최다 규모를 기록하며 1500장에 달하는 카탈로그를 채운 작가 리스트를 가지고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꾸려낸 총감독은 스위스 취리히 쿤스트하우스의 큐레이터이자 세계적인 미술잡지 <파켓>의 편집장인 비체 쿠리거(Bice Curiger)다. 비체 쿠리거는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s)’의 ‘nations’을 소문자로 표기함으로써, 유연하게 ‘ILLUMI’와 ‘nations’을 결합시키는 재치를 발휘했다. 즉 빛, 조명, 계몽을 뜻하는 ‘일루미네이션’에 ‘국가’라는 의미가 더해진 것인데, 그래서인지 출품작 중에는 말 그대로 ‘빛’의 효과에 집착해 다소 일차적으로 소재를 사용한 듯한 인상을 주는 발광재료-형광등, 네온, 조명, 프로젝터 영상 등의 매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으며, ‘국가’라는 개념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해석을 담아낸 국가관도 한국관을 포함, 여럿 있었다.
비엔날레 총감독의 기획력이 집중되는 중앙홀. 비체 쿠리거는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비둘기를 비롯해 시그마 폴케(Sigma Polke), 신디 셔먼(Cindy Sherman) 등 정상급 작가들의 현대 작품과, 르네상스 초기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의 작품 세 점을 함께 걸었다. 빛을 잘 표현한 과거의 거장 틴토레토의 실험적인 회화의 창의성을 현대 작가들과 대조시켜 주목을 끌고자 한 의도겠지만, 기대하게 되는 소위 비엔날레적인 자극을 주기에는 단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을 비롯한 이 훌륭한 고전 작품은 대부분의 일반 관람객에게는 좋은 반응을 얻었고, 기획자의 의도를 잘 보여주었다는 평도 있었다. 비체 쿠리거가 제시한 주제의 맥락과 미술사적 문맥으로 본다면 이러한 시도는 자연스러운 매치이기도 하며,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간결한 독창적 인상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조선소를 개조하여 전시관으로 만든 아르세날레 본 전시장에 들어섰다. 입구에 하마터면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마틴 크리드(Martin Creed)의 작품이 소리 없이 고장난 전등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국제 전시의 단골손님 저 마틴 크리드도 잊지 않고 참가했어요’라고 속삭이듯이 말이다. 빛과 공간의 연금술사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프로젝트, 나비드 누어(Navid Nuur)의 형광 설치 조각과 은사자상을 수여한 하룬 미르자(Haroon Mirza)의 설치작품은 관람객들의 큰 관심을 받았으며, 빛이라는 주제를 충실하고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우스 피셔(Urs Fischer)는 파라핀으로 제작한 16세기 조각가 장 볼로냐의 작품과 인물상에 불을 켜놓았는데, ‘대형촛불’이 된 이 조각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변형해가며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었으며, 여러 차례 노광시킨 사진을 중첩시켜 현실과 가상을 아우르는 주제로 광력을 보여준 코리네 바스무트(Corinne Wasmuht)의 회화 또한 본 전시의 주제를 그럴듯하게 구현해냈다. 그러나 다소 노골적으로 ‘빛’을 드러낸 작품이 많았기 때문에, 뭔가 실험적이고 계몽적인 모색을 발견하는 재미는 덜했다. 규모는 방대해졌지만 질적으로는 새롭다기보다 대체로 점잖은 편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날의 피로를 모조리 씻어주는 기특한 작품을 만났다. 아르세날레의 본 전시에서 황금사자상을 차지했고, 올초 미술관 리움에서도 화제가 된 미국 크리스천 마클레이(Christian Marclay)의 이다. 영화 4천여 편에서 시계 장면만을 편집해 재현한24시간짜리 영상으로, 스크린에서 보이는 시간은 전시를 관람하고 있는 내 시계의 시간과 정확히 맞아떨어져 ‘시간’이라는 키워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수많은 영화에서 시계가 등장하는 장면들만 골라 약 1분 간격으로 절묘하게 편집하여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 속의 허구가 단순히 재현체가 아닌 현재 시각을 알리는 기능적 기계라는 사실이 자못 놀라우며, 스크린이라는 가상공간과 거기서 보여지는 현재의 시간, 기계적인 메커니즘, 영화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해 흥미로웠다.
베니스 시는 본래부터 비엔날레를 관광과 연계시켜 총체적 문화관광사업으로 성공시키는 동시에 새 미술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자르디니 공원의 국가관이 해당국의 임차료와 지원비로 운영 관리되고, 베니스는 매년 어마한 관광수입을 챙기는 것을 보면 ‘베니스의 상인’다운 영리한 사업기질은 탁월하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그리하여 비엔날레 시즌이 되면 각국은 보이지 않는 치열한 문화 경쟁의 장이 되어 비엔날레의 열기를 더한다. 올해의 국가관 전시 중에는 정치적인 이슈를 직접적으로 어필하는 곳이 많았다. 특히 이집트의 커미셔너 샤디 엘 노쇼카티는 지난 1월 타라르 광장에서 무바라크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총탄을 맞아 사망한 젊은 예술가 아슈메드 바지오니(Ahmed Basiouny)를 기리는 작품을 출품했다. 오디오와 비디오를 통해 사회문화적 탐구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온 그의 전시를 취소하려는 집트 문화부의 주장에 굴하지 않고, 그가 촬영한 시위 장면과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또한 벨기에관에서는 성폭행 혐의로 구속된 스트로스 칸 전 IMF 총재의 모습을 작품 안에서 볼 수 있었다.
관람객의 줄이 끊이지 않았던 영국관의 설치미술가 마이크 넬슨(Mike Nelson)은 전시장 자체를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바꾸어버렸다. 통로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이스탄불의 골목길, 사진가의 암실, 수북이 먼지가 덮인 낡은 창고 등 낯선 공간들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어느새 실제인지 가상인지 헷갈리게 되고, 그 안의 조명은 물론 습도와 기온까지 치밀하게 계산 후 설치하여 심리적 긴장감을 더하고, 위장된 공간들이 각각의 내러티브를 제공하는데 방마다 마주하는 감정의 변화가 강력하게 다가왔다. 프랑스관의 크리스티앙 볼탄스키 역시 전시관 내부 전체를 차가운 철골 구조물로 채웠다. 좁은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크레인과 은빛 파이프 사이를 빠르게 지나다니는 신생아들의 흑백사진이 보인다. 공장의 기계음과 함께 작은 방에는 큰 전광판에 전 세계의 사망자와 출생자 인원을 표시하는 숫자가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의 작품의 제목은 인데, 탄생과 사망, 그리고 인생에서 만나는 우연성과 수많은 선택과 기회를 생각하게 한다. 흙먼지 날리는 자르디니의 마당 한쪽에 거꾸로 뒤집힌 거대한 탱크 위를 러닝머신 삼아 달리는 운동선수가 있었다. 이 퍼포먼스로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은 미국관은 비교적 쉬운 상징적 소재들로 전쟁과 운동선수, 파워게임 등 미국의 물질주의와 사회 정치적 모순을 보여주었다. 아마 부시 시절이었다면 이런 노골적인 전시 기획은 자제했겠지만, 전시장의 덩치 큰 작품들은 자신들의 우월성과 욕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듯 했다.
이번 황금사자상을 수여한 독일관의 대표작가 크리스토프 슐링엔지프(Christoph Schlingensief)는 작년 8월 폐암으로 작고했지만 그가 죽기 전에 촬영한 자전적 영상물들은 그대로 전시되었으며, 전시장 내부는 마치 성당을 옮겨놓은 듯한 대규모 설치미술로 꾸며졌다. 전시 자체는 훌륭했으나 작가의 죽음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작가 사후 발 빠르게 움직여 회고전을 준비한 독일의 숨은 전략을 생각하면 감동이 다소 덜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자국의 전시에는 각별한 기대감과 섬세한 시선이 동반된다. 나 역시 화려한 꽃무늬 빨래가 옥상에 널린 한국관 파빌리온에 도착했을 땐, 시간에 쫓겨 강행군으로 일관했던 분주한 발걸음을 잠시 늦추고, 이미 익숙한 작품 앞이지만 여느 때보다 진지한 감상자의 자세로 돌아갔다. 이용백 작가는 에서 한국사의 분단의 아픔과 상처, 비성숙한 자본주의, 신계급주의를 표현했고, 는 신뢰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상황을 화려함으로 위장한 현대인의 모습을 그렸다. 특히 와 에 대한 관람객들의 관심이 남달랐다. 기획자와 작가에게 늘 골칫덩이라고 익히 들어온 한국관의 전시관 구조(기둥이 많고 자연광이 들어오며 조잡한 벽의 구조)가 작가의 최대치를 보여주기엔 제한적 여건으로 작용했겠지만, 전시관 통유리 안쪽에 피에타 조각을 디스플레이하고 옥상에 엔젤솔저의 빨래를 연출한 것은 전시관의 한계를 최대한 고려한 것이라고 보였다. 윤재갑 커미셔너가 지은 전시 제목 과 이용백 작품과의 만남은, 다른 국가관들이 재현한 전쟁과 테러, 혁명, 정치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지구촌의 어두운 실상과는 확연히 비교될 만큼 평화적인 메시지와 시적인 마무리, 그러면서도 동양의 정체성과 한국적인 정서를 세련되게 보여주기에 완벽했다.
스위스 국가관의 토마스 허쉬혼(Tomas Hirschorn)은 트래시아트의 선구자이자 작년 광주 비엔날레에 참여해 국내에서도 꽤 알려진 작가다. 그는 벽면 전체를 두른 비닐과 목재, 알루미늄 포일로 난반사되는 자극적인 싸구려 광택의 불편한 조명, 온통 훼손되고 더럽혀진 플라스틱 마네킹과 유해들, 날카로운 유리조각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통신기기, 매거진 조각 등을 산만하게 늘어놓은 콜라주와 설치작업으로 사방을 채웠다. 대략 쓰레기장에서 볼 만한 풍경이다. 날카로운 조각에 닿기라도 할까봐 조심스럽게 들어가다 보면 그 과잉에 질식할 정도다. 라는 쿨한 제목으로 정치적 위선, 병리적인 소비문화 등 현대인의 삶과 나르시시즘의 병폐 등을 신랄하게 꼬집는 이 작가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현대미술에서 쉽게 보여온 형식적 실험과 엽기적이고 거친 성향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비체 쿠리거 역시 주제에 탐독하는 미술사적 방법론에 따른 구성을 택하였다지만, 방대해진 규모 탓일까, 기획전이 주는 명확한 이슈를 캐치하고, 그 흐름에 동참하기는 다소 약한 느낌이었다. 주제와의 맥락을 파악하기 힘든 작품도 더러 있었고, 유럽으로 편중된 서구 중심적인 구성도 따분하게 느껴졌지만, 어쨌거나 새로운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늘 작은 기쁨이 된다.
베니스를 떠나 그곳에서의 장면 장면을 리플레이하고 보니 내 가슴속에 그 어떤 작품보다 더 강력한 화인으로 남아 있는 것은 베니스의 골목, 사람, 물, 시장 등 그저 풍경이었다. 결국 비엔날레는 베니스가 있어 가능하고, 베니스는 비엔날레의 풍경 속에서 더 의미를 갖는다. 삶과 예술이 그러하듯이.
- 에디터
- 황선우
- 포토그래퍼
- 레스, PARK YUN YOUNG
- 기타
- 글 | 박윤영(아트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