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산하는 열정 대신에 고요히 수렴하는 미덕을 가진 배우. 이자벨 위페르는 용암을 뿜는 빙산처럼 양가적인 존재감을 지녔다.
배우의 얼굴과 몸에 영화적 온도가 있다면 이자벨 위페르의 그것은 명백히 차가운 쪽이다. 흔히 폭발하거나 끓어 오르는 에너지의 발산이 연기의 고급 기술처럼 여겨질 때, 위페르는 한없이 투명에 가깝게 수렴한다. 불이 아니라 얼음으로 단련된 칼같이, 보는 사람에게 서늘하고 예리한 자상을 입힌다. 오디오를 끄고 자막을 가린다 치면, 어떤 배우들은 얼굴에 사건 전개를 다 드러내곤 한다. 그러나 위페르는 모호한 무표정의 스펙터클로 건조하게 관객의 심장을 조인다. [피아니스트] [여자 이야기] [룰루] [레이스 뜨는 여인]… 우리가 영화에서 목격해온 바대로 위페르 의 연기는 이런 냉담한 방식으로 걸출하다.
“한꺼번에 모아놓고 보니까 배우의 인생으로서 스토리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모델이 나 한 사람이고 작가가 여러 명인 것도 의미가 있어요. 배우는 일종의 백지예요.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보여줄 수 있죠.”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자신의 사진 전시에 대해 위페르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시는 피터 린드버그, 유르겐 텔러, 낸 골딘, 리처드 아베돈, 헬무트 뉴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등 당대의 사진가 70여 명이 그녀를 수십 년 동안 찍은 작품들의 집합으로, MoMA(PS1)를 비롯해 파리, 베를린, 마드리드, 도쿄 같은 도시를 거쳐 막 서울에 당도한 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위페르는 프렌치 시크를 대변하는 뷰티 아이콘도, 아우라 넘치는 슈퍼스타도 아니다. 그러나 평범하지만 예민한 여자의 얼굴 덕분에, 영화에서 그러하듯 사진 속에서도 더 뚜렷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8월 13일까지 열리는 이 사진전에는 ‘위대한 그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전시장을 돌아보면 아마도 한 여자의, 배우의 역사 속에서 평범함과 위대함이 맞닿은 순간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interview with HUPPERT
전시된 사진들에서 수십 년의 시간 흐름이 보인다. 당 신에게는 감흥이 어떤가?
사진이란 시간을 초월한 예술 이라고 생각한다. 사진들 자체에서 특별히 시간의 흐름 을 느끼진 않는다. 사진이란 오히려 시간과 관계없이 두고두고 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각각의 사진에서도 그 시절보다는 사진작가와의 관계가 더 떠오른다.
그렇다면 작업했던 사진가 중에서 가장 각별했던 관계 는 누구인가?
한 명의 사진작가만 꼽으라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대체로 휴머니스트적인 성향을 가진 사 진가들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들과의 작업이 더 더욱 유쾌했던 건 포즈를 만들어 취하고 이런 것보다는 일상에서의 자연스러운 산책 같은 그런 움직임을 찍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 촬영과 자연스러운 일상 촬영 사 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스튜디오에서 찍을 때는 패션 화보처럼 뚜렷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어떤 필요성 같은 게 결부된다.
사진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무엇인가?
많은 작가들이 나의 여러 모습을 개성 있게 표현했고 저마다 의 이미지와 시선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선 호도로 말하기 굉장히 어렵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경우는 촬영 과정이나 결과물에서 나를 놀라게 했다. 작 업 과정이 상당히 간결했으며 짧은 시간 안에 순식간에 촬영이 이루어졌다. 우리 집에 방문해서 조금 얘기를 나 누다가 어느 순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인위적인 포즈를 취하거나 하는 일 없이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찍혔는 데 내 삶의 한 부분을 떼어다가 사진으로 표현한 듯 했다. 또 모델의 이런 면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사진작가 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천경우 작가도 이번 전시를 위해 당신을 촬영했다.
천경우 작가는 이번 작업을 위해 독일에서 파리로 왔 다. 특이한 시도를 통해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이미지를 찍었다. 모호하고 확실하지 않으면서도 규 정된 듯한, 반대되는 개념이 공존하도록 포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작품을 위해 30분에서 45분 정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포즈를 취해야 했다. 그런 긴 부동자세를 취하 게 하면서 나에게서 집중력을 얻어내려는 시도인 듯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함께 작업한 영화감독들과는 어땠 나?
클로드 샤브롤이 가장 호흡이 잘 맞았다. 다양한 장 르를 표현할 수 있었고, 나의 여성적 요소를 발산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준 감독으로 가장 많은 편수를 함께했으며 호흡도 잘 맞았다. 그런가 하면 미하엘 하네케는 아주 강렬하고 활기 넘치면서 에너제틱한 감독이었다. 그리고 브누아 자코의 경우 이전과 다른 스타일로, 심오 하고 심층적이면서 배우로서 큰 즐거움을 맛보게 해준 내겐 의미가 큰 감독이었다.
함께 작업하고 싶은 한국 감독이 있나?
이창동, 임상 수, 홍상수, 김기덕… 이런 감독들과 언젠가 호흡을 맞 춰보고 싶다. 한국 영화와 프랑스 영화는 거리를 둔 차 가운 유머 같은 것이 코드가 맞아서 통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창동의 세련되면서도 절제된 감성을 좋아하고, 프랑스 정서와도 가깝다고 본다. 이런 유사성 때문에 한 국 영화가 친숙하게 느껴진다. 박찬욱, 봉준호 역시 같 이 작업하고 싶은 감독이다. 박찬욱은 내가 칸 영화제 심사위원일 때 영화를 심사한 적이 있고, 봉준호는 그때 황금카메라상을 받았다.
감독 말고 한국 여배우는 어떤가?
<밀양>의 전도연이 굉장히 잘하더라. <시>의 윤정희 씨도 아주 좋았다.
최근작 <코파카바나>에서는 친딸과 함께 연기했다. 딸 이 20대가 된 것을 보면서 젊을 때의 당신 자신과 비교 하게 되진 않나?
딸과 연기하는 건 즐거웠다. 100% 연 기라기보다 실제 모녀관계가 반영되었지만, 또 현실과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아주 일치하지도 않은 걸 표현해 야 했다. 꼭 딸이라서가 아니라 자녀를 키우는 여자로서 의 즐거움이 있다.
연기할 때 가장 염두에 두는 한 가지가 있다면?
카메라 앞에서 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의 진실성을 늘 염 두에 두고 조심하면서 생각한다. 늘 진실된 것을 카메라 앞에서 표현하고 표현되도록 하기 위해서 신경 쓴다. 연 기에 있어서도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삶에서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하나?
사람들의 삶 을 더 좋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창출한 사람이든 수혜 자이든. 보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 다. 하지만 나 자신이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요즘 프랑스에서 한국 영화를, 한국에서 프랑스 영화를 찾는 관객이 늘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란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평화적 방법으로 소통할 수 있는 훌륭한 대화의 창이라고 생각한다.
- 에디터
- 황선우
- 포토그래퍼
- 주용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