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판타지의 집대성이라면 역시 파리, 상업적인 트렌드의 안테나인 밀란, 젊은 에너지를 원동력으로 현실적인 패션을 선보이는 뉴욕, 그리고 기발함으로 무장한 실험 패션의 인큐베이터 런던. 그간 4대 패션 도시를 설명하는 이 같은 정의는 2011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미니멀리즘, 생 로랑 풍의 70년대, 현란한 애시드 컬러, 하드코어와 고딕 펑크, 오리엔탈리즘, 보헤미안, 내추럴리즘이라는 S/S시즌의 큰 테마가 공통의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도시의 특성보다는 각 디자이너의 개성에 의해 완성되었다. 진득한 관찰과 기민한 발로 4대 패션 도시를 누빈 <W Korea>의 2011 S/S컬렉션 리포트.
NEW YORK
이번 시즌은 ‘철저하게 팔릴 옷만 만든다’는 뉴욕 패션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미니멀리즘의 발상지다운 정제된 분위기, 시선을 현혹시키는 애시드 컬러, 풍요로운 70년대, 편안한 내추럴리즘과 같은 굵직한 주요 무드가 ‘아메리칸 클래식’의 범주 안에서 골고루 버무려졌기에 더욱 의미 깊은 시즌으로 평가될 것이다.
NEO MINIMALISM
로다테, 알렉산더 왕 같은 거물급 신인들의 출현,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는 바잉 물량, 차곡차곡 아카이브를 쌓아올린 거장들의 견고한 하우스 구축. 몇 시즌 전부터 감지된 뉴욕 패션의 상승 곡선은 이번 S/S 컬렉션을 맞아 본격적으로 절정을 맞은 분위기다. 전반적으로 뉴욕에서는 이번 시즌 부드럽고 우아한 여성미를 강조했는데, ‘90년대식 미니멀리즘’이 패션 전반에서 영향력을행사하면서 그 발상지인 뉴욕이 더욱 중요해진 것. 그 중심에 있는 브랜드는 역시 캘빈 클라인이다.
기발 한 프린트보다는 좋은 소재에, 오밀조밀한 장식보다는 패턴과 커팅에 집중하는 프랜시스코 코스타의 존재감은 이제 90년대의 캘빈 클라인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정도다. 날렵하게 재단된 라펠 없는 재킷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균일하게 간격을 잡은 플리츠 드레스의 완성도는 소름을 돋게 할 정도였다.
데렉 램과3.1 필립 림 역시 캘빈 클라인이 깔아놓은 미니멀리즘에 자신의 재능을 보태 재빠르게 편승했다. 데렉 램은 미니멀리즘에 60년대 미국식 무드를 더해 화이트 실크와 데님을 섞어 차분하면서도 파워풀한 조합을 만들어내 눈길을 끌었고, 필립 림은 베이지, 아이보리 등의 뉴트럴 컬러를 바탕으로 남성적인 테일러링 위에 여성스러운 직사각의 에이프런을 두른듯한 장식만을 보태어 절제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나긋한 실루엣과 긴 헴라인에서 비롯되는 여성스러움,
랩 여밈이나 깊은 클리비지를 통한 은근한 센슈얼리티, 얇은 소재와 톡톡한 소재의 대비에서 오는 텍스처 플레이 같은 캘빈 클라인 식의 우아함은 나르시소 로드리게즈, 두리, 프라발 구룽 등의 쇼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칼라가 없는 재킷과 코트, 긴 헴라인의 드레스, 폭이 넓은 팬츠, 슬리브리스 튜닉 등의 아이템이 이 무드를 타고 S/S 시즌을 지배해나갈 주요 아이템임을 기억해야 할듯.
GLAMOROUS JET-SETTER
4대 도시를 불문하고 풍부한 컬러감이 런웨이를 장악한 가운데, 뉴욕에서는 특히 ‘S/S 컬렉션’이 아니라‘리조트 컬렉션’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젯셋족의 옷장에서 영감을 받은 스타일이 대거 출현했다. 그 중에서도 많은 패션 피플을 (좋은 의미에서) 경악하게 만든건 바로 마크 제이콥스로, 70년대라는 키워드를 보태 한층 세련되고 성숙한, 동시에 파격적인 젯셋 글래머를 표현해냈다. 70년대식 이브 생 로랑을 연상시키는 광택 있는 새틴 수트, 미소니 스타일의 지구라트 패턴드레스 등은 마크 제이콥스 특유의 간결한 레이어링, 커다랗게 부풀린 헤어스타일과 어우러져 미니멀리즘에 지친 이들에게 짜릿한 전율을 선사했다.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된 이반 미스필레어는 70년대의 프린트랩스커트 원형을 모던하고 스포티한 실루엣에 적용해 큰 관심을 받았고, 제이슨 우는 하이 웨이스트 팬츠와 쇼츠 등 40년대와 70년대가 적절히 버무려진 우아한 리조트 스타일을 선보였다. 레트로 리조트 룩의 유행을‘당장 입을 수 있을 만큼’ 상업적으로 풀어낸 디자이너는 역시 토리 버치다. 스트라이프 저지 드레스, 오렌지색 튜닉 등 상큼한 컬러를 중심으로 편안한 스타일을 연출했다. 좀 더 어린 고객에 집중한 브랜드에서도 젯셋 무드를찾을 수 있는데,
마크 by마크 제이콥스는 70년대 무드를 기반으로 애시드한 컬러와 캐주얼한 아이템을 더해 뉴욕의업타운 걸들이 환호할 만한 컬렉션을 소개했고, 피터 솜은 톡톡 튀는 플라워와 스트라이프 패턴으로 상큼한 마이애미해변의 여대생 같은 분위기를 선보였다.뚝 떨어지는 테일러링 위주의 미니멀리즘이 지겨워진 사람들에게 글래머러스한 젯셋 스타일은 톡 쏘는 탄산수처럼 반색할 만한(게다가 실제로 살 만한 아이템도 풍부한) 트렌드가 되어줄 것이 분명하다.
UTILITY CHIC
미니멀리즘이 시즌을 통째로 잠식하는 동안, 건축적이고 구조적인 실루엣, 엄격한 테일러링의 날들이여 안녕! 을 외치는뉴욕의 젊은 피 디자이너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알렉산더 왕, 랙&본, 리처드 채 등으로 대표되는 다운타운 멋쟁이들이었다. 새뜻한 계절이 왔으니 마치 별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비장의 무기를 꺼내든 그들. 바로 스트리트와 유틸리티, 아웃도어를 접목시킨 해체주의적인 스포티시즘이었다. 주제에 걸맞게 반복적으로 나타난 바이어스 커팅, 레이어드, 분방하고 자유로운 핏 등 90년대를 명백하게 환기시키는 요소들은, 실용적이고도 쿨하게 거듭났는데, 뉴욕 특유의 컨템퍼러리한 대중성 역시 놓칠 리 없었다. 알렉산더 왕은 얇고 부드러운 소재들을 양껏 동원하여 흐느적거릴 정도의 루스한 핏을 마음껏 즐겼다.
헬무트 랭과 앤 드묄미스터가 호령하던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다운타운식 분방함이 비닐을 씌운 체인 목걸이, 제멋대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헴라인, 편안한 오버올즈와 허리춤에 걸친 베이스볼 점퍼 등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오히려 공사중인 자신의 아틀리에와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영감을 받아, 모델들 머리에는 흰색 석고칠을 하고, 배관 테이프를 디테일로 활용했다는 전언이 사족처럼 느껴질 만큼. 예상치 못한 조합과 역설적인 쿨함에 있어, 랙&본은 모두가 주목해야 하는 차세대 스타였다. 북아프리카의 사막과 스포츠를 접목시킨 채, 란제리를 함께 선보이는 기염을 토했으니까. 짐짓 괴이하게 들리는 조합이지만, 디자이너가 휴가를 보냈다는 베키아 섬에서 직접 찍어온 스냅샷으로 만든 프린트, 밴드와 버클을 이용하여 만든 가터벨트와 탱크톱, 성긴 짜임의 니트 원피스, 스니커즈 힐, 체인 팔찌 등을 버무려 완성해낸 것은, 극도로 세련된 뉴욕식 스포티시즘이었다. 그것도 어디서 본 적 없는 관점과 조합으로 말이다.
리처드 채의 디퓨전 라인인 Love에는 앞선 두 디자이너들과 같은 신선한 변화구를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특유의 담백한 감성을 바탕으로 한 우아한 실용주의가 돋보였다. 뉴트럴한 색감의 시스루 톱 안에 스포츠웨어를 연상시키는 검정 브라를 레이어링하거나, 팬츠 위에 쇼츠나 스커트를 덧입는 식, 혹은 보이시한 셔츠나 재킷으로 프로포션을 제시하는 식이었다.
NEW AMERICAN CLASSIC
21세기 아메리칸 클래식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그건 바로‘쉽다’는 것.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무엇보다 어려울 것이 없는 클래식이야말로, 범지구적 불경기를 노련하게 헤쳐 나온 뉴요커 디자이너들이 하기에 가장 적당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 선두주자는 바로 도나 카란과 마이클 코어스, 랄프 로렌 등의 노장 디자이너. 70년대를 기점으로 하는 레트로 트렌드의 영향력과 풍족한 여성성을 적절히 가미하여 탄생시킨 뉴 클래식 속에는 자연에 가깝게 다가선 내추럴리즘과 낭만을 강조하는 맥시멀리즘이 주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부드러운 회색 면 티셔츠에 화려한 비즈 장식의 플레어 팬츠를 매치하거나 풍성한 티어드 스커트를 더하는 식으로 성숙하고도 세련된 로맨티스트로서의 면모를 과시한 마이클 코어스의 쇼는 시대의 요소가 미국식으로 전환할 때 발생하는 세련된 앙상블 그 자체였다.
그런가 하면 도나 카란쇼에서는 사막의 모래 빛, 꿀, 흰색에 은밀히 스며든 먹색 등 대지의 어머니라는 수식어다운 컬러로 먼저 압도했다. 줄을 지어 나온 바이어스 컷 드레스들에는 몸을 따라 흐르는 자연스러운 실루엣과 독특한 주름이 가득 잡혀 있었는데, 그것은 바스락거리기보다 우아하고 부드럽게 물결치는 종류였으니, 도나 카란이 의도한 자연스러움 안에서 발견하는 어떤 남성성과 편안한 여성성의 혼재였다. 하지만 주목할 건 역시, 컬렉션 전체를 아우르는‘공들이지 않은 아름다움’이었다. 애써서‘입기’보다‘걸치는’ 맛의 옷들. 그것은 하우스의 전통을 명랑하게 되짚은 랄프 로렌 컬렉션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요소였다. 성긴 레이스로 장식한 화이트 드레스는 여름의 서정을 담았고, 고급스러운 실버 티어드 스커트 위에는 플레이드 체크무늬 셔츠가 매치됐으며, 클래식한 스웨이드 소재는 캐주얼하거나 고급스럽게 매만져진 채 하우스 DNA의 순도를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노련한 대선배들과 기꺼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클래식에 승부수를 던진 디자이너가 있었으니, 바로 프로엔자 스쿨러다. 그들은 트위드와 니트 소재에 대한 연구와 그것을 다채롭게 비트는 역설을 통해, 21세기 부르주아 여성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클래식에 대해 명료한 주장을 펼쳤으니까. 날염 염색과 니팅을 뒤섞는 위트, 진짜 트위드부터 가짜 트위드까지 내닫는 탐구, 연어색과 형광색 사이를 잇는 봄의 빛깔들까지 뉴욕산 아메리칸 클래식의 새로운 계보가 특별한 맥을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에디터|최유경, 최서연
SCOOP
1. 블리커 대소동
90년대 미국산 시트콤 제목 같은 이 한바탕 소동의 주인공은 바로 뉴욕 블리커 스트리트의 ‘실세’ 마크 제이콥스다. 그는 패션위크의 시작과 더불어 자신의 매장(무려 세 개)이 위치한 블리커 스트리트 에 ‘BOOKMARC’라는, 위트 넘치는 이름의 책방을 내며 전 세계에서 모여든 패션 피플을 즐겁게 했다. 실제 마크의 개인 서재에 꽂힌 책들이 빼곡한 것은 물론이고, 깜찍한 키링과 노트, 음반까지 판매하는, 그야말로 ‘패션 지식인의 서재’. 이제 블리커 스트리트에 성지가 하나 또 늘었다.
2. 왕의 귀환
톰 포드가 이번 시즌, 여성복으로 컴백한다는 소식을 알려왔을 때 패션계는 그야말로 광분의 도가니였다. 당시 매퀸을 잃은 슬픔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달까. 하지만 인비테이션 같은 건 없었다. 오직 톰 포드의 홍보 담당자가 특정 매체의 기자들(그러니까 더블유 코리아 같은)에게 보내는 은밀한 초대의 메시지만이 있었을 뿐. 매디슨 애비뉴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열린 자그마한 살롱 쇼에는 그의 뮤즈인 카렌 엘슨, 비욘세, 줄리앤 무어 등이 시대를 거스른 듯 아름다운 자태로 캣워크를 해주었고, 오직 백 명의 손님만이 촬영 금지 요청을 얌전히 받들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줄줄이 쏟아져 나온 70년대와 30년대를 뒤섞은 톰 포드식 글램! 짐짓 지루하게 흘러가던 패션위크에 활기를 불어넣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3. 발렌시아가, 뉴욕으로?
뉴욕 패션 피플을 들쑤셔놓은 소문 하나. 발렌시아가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가 조만간 뉴욕 컬렉션 입성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 LVMH 모엣 헤네시그룹의 실세로 유명한 캐서린 로스를 브랜드 컨설턴트로 임명한 이후 흘러나온 이야기이니,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안 될것 뭐 있어요? 나는 소통의 수단을 넓게 측정하기 시작했어요. 그건 예술과 관련된 것일 수도, 영화일 수도 있겠죠. 뭐가 됐든 그 스케일은 아주 클겁니다.”
4. PARTY PARTY!
뉴욕 최고의 파티 고어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알렉산더 왕은 성공적인 쇼를 자축하며 미트패킹에 있는 한 스튜디오를 빌려 거대한 놀이공원을 하나 세웠다. 뉴욕의 힙한 인물들이 대거 참석한 것은 물론, 무대 위에는 아그네스딘을 끌어올려 클럽을 만들어버리는 분위기 메이커계의 총아 알렉산더 왕이 ‘정줄 놓는’ 사태까지. 그는 에이스 호텔에서 열린 ‘패션 나잇아웃’ 행사에서도 확성기를 직접 들고 나서서 “골라 골라!”를 외치기도 한 장본인 아닌가! 게다가 그가 컬렉션을 연 당시, 소호의 금싸라기 건물을 매입하여 플래그십 스토어를 신축하고 있던 것은 공공연한 사실. 모든 상황이 하나의 축제와도 같았을 그에게 이번 애프터 파티처럼 재미있는 것이 또 있었을까?
에디터|최서연
EDITOR’S PICKS
BEST ACCESSORIES 12
1. MARC JACOBS
액세서리를 대거 레이어링하는 스타일링을 선호하는 마크 제이콥스 컬렉션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끈 건 70년대풍의 빅 프레임 선글라스.
2. MICHAEL KORS
어떤 과장된 수식 없이도 자연스럽고 나긋하게 봄을 추앙한 마이클 코어스 컬렉션의 초록빛 잎사귀를 프린트한 크로셰 햇.
3. LOUIS VUITTON
다양한 원색의 핸드백이 주류인 이번 시즌, 루이비통은 살구, 노랑, 주황의 달콤하고 선명한 캔디컬러를 조합한 핸드백을 선보였다.
4. DIOR
색색의 가죽과 깃털, 새틴리본이 아름답게 엮인 이국적인 무드의 하이힐 샌들.
5. GUCCI
색상 조합이 그야말로 예술이었던 구찌 컬렉션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 것은 아시안 무드를 함축한 금빛 가죽 벨트였다.
6. JIL SANDER
이번 시즌 질 샌더의 놀라운 컬러감은 액세서리에까지 고스란히 적용된다. 원색과 흰색을 사용한 굵직한 스트라이프 백은 이번 시즌 머스트 해브 아이템 중 하나다.
7. MARNI
부드러운 가죽 소재의 삼색 수영모자와 메탈 소재로 만든 목걸이. 이번 시즌 트렌드인 어번 스포츠웨어 무드를 완성하는 완벽한 액세서리다.
8. YSL
킬힐 저리가라 할 높이의 투박한 플랫폼 샌들이 대세다. 안으로 깎아지른 듯한 조형적인 모양의 이그조틱 레더 샌들을 발표한 YSL이 대표적인 예다.
9. LANVIN
코스튬 주얼리를 하이패션계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랑방의 이번 시즌 모티프는 바로 곤충. 큼직한 스와로브스키 세팅이 눈에띈다.
10. CELINE
지난 시즌 엔벨로프(편지봉투) 백의 계보를 이어가는 화이트 컬러의 간결한 백. 숄더백이나 클러치로 이용할 수 있어 활용도 또한 높다.
11. FENDI
최상급의 악어가죽 소재를 쓴 클래식한 백에 덮개와 옆면, 앞면, 손잡이의 컬러를 각기 달리하여 고급스러운 컬러 블록을 표현한 펜디의 토트백.
12. PRADA
클래식한 옥스퍼드화나 브로그 슈즈 등 남성의 슈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고무 밑창과 에스파드류 힐을 조합해 만든 독특한 슈즈.
에디터|최유경
LONDON
신예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런던을 일컬어 크리스토퍼 케인은 에너지의 허브라고 칭했다. 이러한 런던에서 벌어진 2011년 봄의 축제는 강렬하고 흥겨운 에너지로 충만했다. 전통과 혁신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자신의 기량을 맘껏 발휘한 젊은 디자이너들이 차린 정찬은 신선하면서도 자극적이었으니까. 이는 단순히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를 넘어 패션쇼가 디자이너의 창의성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활로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뉴 탤런트’와 노장의 탄탄한 실력이 멋지게 앙상블을 이룬 런던 컬렉션의 2011년 봄/여름을 향한 긍정의 에너지 속으로.
A MATTER OF DETAIL
런던 디자이너들이 지닌 가장 큰 무기는 전통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아닐까. 물론 그대로 보여주기만 한다면 런던이 아니다. 무엇보다 진중함과 유머를 두루 사랑하는 영국인의 기질답게‘ 새로운 재미’라는 요소가 동반된다. 그 결과, 보편적인 트렌치코트나 아가일 패턴의 니트 베스트도 런던 디자이너들의 프리즘을 통하면 다채로운 빛깔로 재탄생하는 법. 이를 가장 탁월하게 보여주는 이가 바로 버버리 프로섬의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아닐까.
세 시즌째 런던에 안착해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한 버버리 프로섬은‘헤리티지 바이커’라는 주제를 통해 창립자 토머스 버버리의 유산을 지극히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현했다. 클래식한 개버딘 소재의 트렌치 재킷에 와일드한 바이커 재킷의 가죽 퀼팅 소매를 이어 붙인 것은 마치 영국 신사와 바이커족의 만남처럼 상반된 요소의 절묘한 조화를 선사했다. 게다가 어깨에 한가득 도열해 금방이라도 찌를 듯한 매서운 기세를 보인 스터드(좀 지나친 감이 있었지만), 장식적인 요소로 쓰인 체인및 지퍼 장식 등이 펑키한 무드를 더했다. 그리고 민트, 핑크, 탠저린 등 팝 컬러가 돋보이는 백과 벨트는 봄의 기운을 물씬 전하며 퍼스트 로에 자리한 새라 제시카 파커, 세레나 윌리엄스, 알렉사 청뿐만 아니라 전 세계 25개 버버리 매장에서 생중계를 지켜본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버버리 프로섬과 더불어 어느새 런던에서 가장 기대되는 쇼를 하는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크리스토퍼 케인. “네온 색상에 푹 빠졌어요. 이제 다른 색상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라고 말한 그의 안목은 옳았다. 그는 2011년 봄을 강타할 애시드한 컬러 트렌드를 짚어내는 동시에 자신의 아이덴티티 역시 확고하게 구축한, 그야말로 성공적인 컬렉션을 선보였으니까. 다채로운 네온 컬러의 섬세한 레이스 소재(사실 가죽 소재에 구멍을 뚫고 비닐 코팅을 한 것)로 된 주름스커트에 아가일 패턴의 트윈 니트나 베스트를 매치한 룩은 젊은 날의 마거릿 공주를 연상시켰으며, 한 젊은 런던 디자이너의 헤리티지에 대한 존중까지도 엿볼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사이키델릭한 여성성에 이어서 파이핑 장식과 타투 프린트라는 동떨어진 요소의 절묘한 조합은 극적인 요소가 충돌해 빚어내는 케인식 미학을 설파했다. 한편 클레어 화이트 켈러가 이끈 프링글 오브 스코틀랜드의 쇼장 한켠에서는 브랜드의 195주년을 기념해 니트웨어 전시가 열렸다. 그녀 역시 컬렉션을 통해 브랜드의 시그너처인 니트웨어를 아카이브에서 건져내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힘을 쏟았지만 결과는 무리수. 아가일 패턴과 프린지 장식, 킬트에서 모티프를 얻은 랩스커트 등은 과거나 현대와의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클래식하지도 그렇게 모던하지도 않은 룩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또 한 명, 니트웨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마크 패스트. 그의 쇼에서 늘 볼 수 있는 것은 정교한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보디 컨셔스 실루엣의 섹시한 니트 드레스와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다. 그리고 이번 시즌, 관객들의 예상을 뛰어넘기 위해 준비한 것은 어망에 걸린 듯 반짝이며 찰랑이는 크리스털 조각과 길고 탐스러운 프린지 장식이었다.
강렬한 열대의 기운을 지닌 프린지는 그가 영감을 받았다는 아마존의 나비나 새를 연상시켰지만 그의 뮤즈는 정작 밀림이 아닌 도심의 거리를 활보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듯.줄리앙 맥도널드는 글래머러스한 여성에 대한 보다 부드럽고 은유적인 접근을 통해 로맨틱한 여신들을 앞세웠다. 나아가 레이스나 니트 소재로 만든 짧은 란제리 드레스에 캐주얼한 줄무늬 유틸리티 재킷을 매치하는 시도는 그의 컬렉션에 약간의 동시대성을 부여했다. 이번 시즌, 로맨스를 키워드로 꼽은 또 한명의 디자이너인 안토니오 베라르디. 그는 꽃잎들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듯한 드레스로 자신의 쿠튀르적인 기량을 내세웠다.“제 쇼는 대조에 대한 해석이었어요. 강하고 부드러우며, 보디컨셔스의 센슈얼함과 로맨틱함이 조화된 룩이죠.”라고 밝힌그 역시 여성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브닝드레스에 캐주얼한 아우터를 믹스 매치하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단조로웠다. 한 때 런던에서 맛볼 수 있던 기괴한 창의성은 아닐지라도 과감한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야말로 전통을 바탕으로 한 런던의 역동성을 뒷받침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두 중견 디자이너들은 될성부른 신예인 크리스토퍼 케인에게 한 수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ALL ABOUT PRINTS
영국의 헤리티지 중 하나는 바로 다채로운 프린트. 런던에선 리버티 백화점이나 빈티지 마켓에서 시대감각과 다양한 무드를 고스란히 담은 프린트를 접할 수 있다. 그러니 런던의 신진 디자이너들이 디지털 프린트에 열을 올리는 것도 생활의 유산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런던다운 창의성을 지닌 신진 디자이너로 이름을 올린 마리 카트란주는 이번 시즌 프린트를 통한3D 효과에 도전했다. 1970년대 이스트 코스트의 호텔 방을 옷 전면에 디지털 프린팅한 뒤 전등갓처럼 부풀린 스커트의 헴라인에 술 장식을 달고, 샹들리에를 연상시키는 목걸이를 더한 것. 여기에‘이것은 방이 아니다’라는 위트 있는 각주(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명을 패러디한)를 달았다.
봄/여름이면 런웨이를 흐드러지게 달구는 것이 플라워 프린트. 런던도 예외는 아니어서 에르뎀의 쇼에선 한적한 베드퍼드 스퀘어 가든을 무대로 순백의 레이스 드레스에 붉은 장미 자수나 수련 연작을 연상케 하는 프린트 블라우스를 입은 모델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니컬러스 커크우드의스트랩 샌들은 에르뎀 모랄리 오글루가 영감을 받았다는 전시 <디아길레프와 러시아발레의 황금기>의 발레리나들을 연상시켰다. 한편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서 모던한 접점을 찾은 조너선 선더스. 그는 프린트를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컬러’라는 단순한 진리를 통달한 듯 보였다. 이번 시즌, 그는‘컬러리스트’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화사한 색상을 균형감 있게 배치했고, 스프레이로 뿌린듯한 프린트로 경쾌함을 더했다. 그리고 마크 로스코의 캔버스를 보는 듯한 색과 면의 분할은‘페미닌 모더니스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편 배터시 화력 발전소로 게스트를 초대한 매튜 윌리엄슨이 표방한 것은 무인도에 표류한 여성. 트로피컬 컬러, 꼬임과 술 장식 등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고, 이그조틱 레더를 연상시키는 메탈릭한 프린트의 미니 드레스는 도심의 밤을 즐기는 여성에게도 유용할 듯 보였다. 그렇다면 런던 패션계의 대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는 폴 스미스가 애정을 쏟은 것은 무엇일까.“지미 헨드릭스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40주년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를 떠올리며 남성의 셔츠와 로큰롤 등에서 영감을 받았죠.” 그의 말처럼 로열 퍼플, 탠저린, 카키 색상의 폴카도트와 스트라이프 패턴의 셔츠, 베스트, 타이, 시가렛 팬츠가 매치되어 1960년대의 열정을 댄디하게 풀어냈다. 그리고 재킷의 라펠이나 밑단에 선보인 시그너처 꽃무늬는 머스큘린 룩에 폴 스미스만의 부드러운 터치를 가미했다.
브리티시 패션 어워드 신인상을 수상한 피터 필로토와 크리스토퍼 드보스가 이끄는 피터 필로토. 두 젊은이는 파리에서 열린 이브 생 로랑의 아카이브 전시에서 영향을 받은 듯 1970년대 이브 생 로랑을 연상시키는 실루엣에 실크스크린 프린트를 접목시켰다. 이를 통해 11세기의 비잔틴 모자이크 문양은 지극히 모던한 2011년 버전으로 진보했다. 한편 슬로건 티셔츠로 유명한 헨리 홀랜드가 선택한 프린트는 소설 <인도차이나> 속 식당의 바나나잎 무늬. 그는 이패턴을 활용한 자카드 재킷과 팬츠을 통해 스튜디오 54로 대변되는 디스코 클럽의 무드를 선보이고자 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시티 글램’보다는 열대 지역으로의 휴가에 어울리는 의상이 대부분. 런던 패션위크 기간에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나오미 캠벨을 넘어뜨렸던 원조 킬힐인 거대한 굽의 플랫폼 슈즈 등 아카이브 슈즈를 모은 흥미로운 전시를 선보인 비비안 웨스트우드. 그녀의 레드 라벨 쇼는 모래시계 실루엣과 체크 패턴, 아방가르드한 커팅과 볼륨 등 웨스트우드 여사의 아이덴티티를 엿볼 수 있는 요소로 바이어들을 만족시켰다. 하지만 펑크 정신을 패션에 접목시키며 선보인 과거의‘ 도발’이 조금 그리웠다.
대다수가 주춤하는 사이 몇몇은 파리나 뉴욕이라는 더 큰‘ 마켓’을 향해 떠나고, 누군가는 런던을 비롯한 두 도시를 오가며 분주하게 쇼를 한다. 그 행운아 중 한 명으로 웅가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출사표를 던진 자일스 디컨. 파리의 화려한 웅가로 쇼장과는 달리 한 허름한 창고를 빌린 자일스 디컨 쇼가 선보인 것은1990년대 런던의 유명 클럽인‘ 밀크 바’에서 영감을 얻은 룩. 팩맨의 애니메이션적인 패턴을 더한 페어 아일 스웨터와 폴카도트 프린트 원피스는 커트니 러브의 퇴폐적인 섹시함을 연상시켰다. 또한 1960년대의 전설적인 모델 베르슈카가 등장해 눈길을 끌기도. 한편 뉴욕 할스톤의 수장이 된 마리오스 슈왑은 자신의 런던 쇼를 통해 터프한 바이커족나 록밴드 추종자를 염두에 둔 란제리 룩의 행렬을 선보였다. 특히 영화 <트랜실베니아>에서 영감을 얻은 장미와 뱀 모티프의 타투 프린트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렇듯 관객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프린트를 통한 디자이너들의 다양한 시도는 런던 패션에 풍부한 자양분이 되었다. 에디터|박연경
SCOOP
뉴 런던 키드의 도전
이젠 영국, 필름, 패션이라는 키워드를 통해닉 나이트 다음으로‘ 팀 워커’의 이름을 거론할 차례다. 바로 지난 런던 패션위크 기간에 멀버리의 후원을 받아 그의 데뷔작인 단편영화 를 공개했으니까. 패트릭 맥그라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영화는 에블린이라는 소녀가 자신의 정원에서 한 참전 군인의 텐트를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아름답고 미스터리한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알렉사 청을 비롯해 런던의 셀러브리티와 VIP, 세계 각국에서 온 프레스들이 초대된 시사회 겸 디너 파티에는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는 텐트 세트가 마련되어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면 팀 워커가 만든 영화에 대한 감상평은? 그의 사진만큼이나 동화적이고 몽환적이며 마법과 같은 영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평.
님을 기리며
아, 님은 갔지만 우리는 그를 떠나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직 패션 피플들의 가슴속에 남은 알렉산더 매퀸. 그를 기리는 추도식이 지난 런던 패션위크 기간인 9월 20일, 고요한 아침에 거행되었다. 세인트폴 대성당이라는 장소만 봐도 알 수 있듯 전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국가적인 추도식에는 케이트 모스, 새라 제시카파커, 나오미 캠벨, 스텔라 매카트니,다프네 기네스 등이 블랙 룩을 멋스럽게 차려입은 채 등장해 뭇 사람들의시선을 끌기도. 그리고 2천5백여 명이 자리한 성당 안에서는 수지 멘키스의 추모사와 함께 날개가 달린 드레스를 입은 비요크의‘ 글루미 선데이’ 열창 등이 이어지며 다시금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니트를 향한 일편단심
195년이라는 굵은 나이테를 지닌 아이코닉한 브랜드인 프링글 오브 스코틀랜드. 적어도 시그너처 아이템인 니트웨어엔 도가 트고 지겨울법하지만, 프링글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시대를 초월한 클래식한 니트웨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 195주년을 기념해 그들이 벌인 것은 시끌벅적한 파티가 아닌 아가일 패턴과 니트 트윈 세트를 매개체로 한 지적인 컬래버레이션 전시였다. 런던의 서펀타인 갤러리와 협업한 전시에는 포토그래퍼 라이언 맥긴리와 작가 더글라스 고든 등이 참여했는데, 특히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 출신인 더글라스는 자신의 팔에 새긴 문신에서 영감을 얻은 위트 있는 타투 트윈세트를 디자인해 선보였다. 에디터|박연경
- 에디터
- 패션 디렉터 / 최유경, 최서연, 박연경
- 포토그래퍼
- Photo / KIM WESTON ARN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