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보다 어딘가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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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사람들이 조금은 쓸쓸하고 이따금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보내왔다. 고요한 낮과 거룩한 밤이 공존하는 그날의 선명한 기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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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흰눈이 내리면

서른을 맞기 직전 일 년을 파리에서 보냈다. 특별한 목적 없이 지낸 그 시절 중에서도 이따금 떠오르는 계절은 겨울이다. 너무나 축축하고 차가운 회색조로 뒤덮인 파리의 겨울은 처음 경험하는 종류의 고달픔 이었다. 줄곧 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나를 집 밖 으로 끌어낸 건 크리스마스 시즌이 뒤바꿔놓은 도시의 풍경이었다. 노란 전구의 향연, 거대한 트리와 캐 럴, 반짝이는 상점들의 온갖 물건들, 유난히 분주해진 파리 사람들의 종종걸음과 들뜬 표정. 역사, 문화 적으로 서구적인 맥락을 내포한 크리스마스 시즌은 시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가장 드라마틱한 이벤트 라는 사실을 모든 거리의 풍경이 펼쳐내고 있었다. 잠시 머무는 이방인으로서 그들과 어울릴 수 없었던 나는 기꺼이 외로움을 떠안은 채 절반은 관광객처럼, 절반은 관찰자로서 ‘크리스마스의 상점들’을 카메라 에 담으며 번화한 도로부터 아기자기한 골목까지 걷 고 또 걸었다. 어둑해질 때까지 예쁘고 알록달록한 가게들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꽤 쏠쏠했다. 새하얀 눈송이와 서리가 자욱한 쇼윈도의 디스플레이, 크고 작은 볼들의 반짝임과 움직이는 인형들, 간판마저 빨간색으로 바꿔놓은 채 손님을 맞이하며 서로를 축하하 는 그들만의 축제.

크리스마스 이틀 전, 하얀 눈이 쉼 없이 쏟아졌고 내게도 선물 같은 시간이 주어졌다. 수십 년간 신비롭고 아름다운 패션 사진을 찍어온 사라 문(Sarah Moon)과의 인터뷰를 그녀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진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다. 다시 펼친 원고의 첫 구절은 ‘창밖의 겨울은 함박눈을 맞으며 어둠으로 향하는 찰나다. 노엘 (Noël)을 이틀 앞둔 저녁에 내리기 시작한 저 흰 눈은 모두에게 축복이라는 거대한 표현을 부여받을 것이 틀림없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글을 쓰다 보니 파리에서 보낸 단 한 번의 크리스마스는 아름답도록 특별했던 것 같다. 외로움마저 포용할 수 있는 그윽한 그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테니. 글 |박선영(칼럼니스트)

베를린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생긴일

서울과 베를린의 12월 평균 기온을 찾아보면 서울은 영하 0.3도, 베를린은 영상 1도로 검색된다. 평균 기온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은 상당히 차이가 나는데, 한겨울 베를린의 일출은 보통 8시 전후, 일몰시각은 4시 전후다. 짧은 일조량 탓에 저녁이 상당히 길게 느껴지는 편이고, 여름이 습한 한국과는 다르게 겨울이 굉장히 습해서 ‘뼈가 시리도록 춥다’는 표현을 몸으로 이해했다. 만일 크리스마스 마켓마저 없었다면 더욱 우울하게 보냈을 것 같다. 보통 11월 25일부터 12월 23일까지, 약 한 달 동안 독일 각 도시에서 마켓이 열리는데, 뉘른베르크나 퀼른, 라이프치히, 뮌헨 등에서 열리는 마켓이 유명하 다. 그에 비해 베를린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명성이 낮지만, 도시의 특성상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다양한 크리스마스 마켓이 있다.

가장 큰 규모의 크리스마스 마켓은 샤를로텐부르크 성의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독일에 현존하는 궁전 중 3번째로 큰 곳이라 둘러보기에도 좋다. 도시 중심에 있는 젠다르멘 마켓은 유일하게 입장료가 있는 곳인데, 관광객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소시지 하나 주문하기도 쉽지 않다. 이 마켓은 성당과 콘서트홀로 둘러 싸여있는데, 두 성당 사이에 서있는 콘체르트 하우 스(콘서트홀)도 무척 아름답다. 브라이트 샤이트 광장에서는 전쟁으로 지붕 일부가 파괴된 채 그대로 보존된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를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 역시 규모가 큰 편이다. 2016년 12월 20일에 있었던 트럭 테러에도 불구 하고 많은 사람들이 마켓을 방문하고 함께함으로써 서로 연대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켓은 문화의 양조장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이름처럼 20세기 초까지 맥주를 생산한 양조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쇠 퇴했다가, 동독 시절인 1974년에 공장 단지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통일 이후, 문화·예술·상업 공간 등이 들어선 복합 공간으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열리는 마켓은 ‘북유럽에서 온 크리스마스 마켓’을 콘셉트로 다양한 지역의 음식과 음료를 판매하는데, 이는 베를린의 다양성을 잘 보여준다. 알렉산더 광장· 포츠담 광장·마리엔 교회 등 크고 작은 크리스마스 마켓에 들러 매일 한두 잔의 글루바인을 마시면 들뜨고 술에 취한 채로 12월이 지나가고, 12월 31일의 폭죽과 함께 새해를 맞게 된다. 글 | 신덕호(그래픽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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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톡으로 가는 기차

스무 살, 나의 크리스마스 계획은 모두 J의 아이디어였다. J가 무 사히 원하는 대학에 갔거나, 아니면 내가 대학 생활에 적응만 잘 했어도, 스무 살의 우리가 뉴욕에서 함께 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동창인 우리는 충분히 노력하면 꿈꾸는 대로 살 수 있다고 믿은 죄로, 학사 경고 두 번을 받은 낙제생과, 부모님 등골을 파먹으며 도피 유학을 떠난 유학생 신분으로 그 겨울, 뉴욕에서 다시 만났다. 12월이었고, 대형 몰마다 메타세쿼이아 같은 크기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놓여 있었다. 뉴욕 바닥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숍에서 크리스마스 이벤트와 80퍼센트를 호가하는 세일을 하고 있었으나, 우리는 할인된 20퍼센트의 가격도 지불할 수 없을 정도 로 가난했으므로 그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들 대단히 즐거운 일이 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거리를 걷고 있었고, 가야할 파티가 많은 것 같았다. 별다른 사건이 없던, 사건을 벌일 여력조차 없던 우리는 더욱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마스 당일이라고 뭐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평소에 우리를 받아주던 가게가 모조리 문을 닫는다고 했다. 우리 중 그나마 적극적인 편인 J가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바다를 보러 가는 건 어떨까.” J는 몬톡(Montauk)의 등대를 보러 가자고했다. 우리 둘다 재밌게 본 영화 <이터널선샤인>에 나오는 등대라고 했다.
“추울 텐데.” “갔다 와서 신포 우리만두에서 만둣국을 먹자. 공짜로 한 그릇 주는 행사한대.”

딱히 할 일도 없을뿐더러 공짜를 마다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으므로, 나는 J와 함께 몬톡으로 향했다. 우리가 살던 집 근처에 마침 기차역이 있었다. 매표 자판기에서 단돈 몇 달러에 몬톡역까지 가는 표를 살 수. 있었다. 1시간 정도 달려 뉴욕주의 끝자락, 몬톡에 닿았다. 바다를 볼 생각에 슬그머니 신난 우리는 곧바로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역에서 등대까지 거리가 꽤 됐고, 거의 산이나 다름없는 절벽인지라 도보로 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발만 동동 구르던 우리는, 고민 끝에 당시에 사용하던 노키아 폴더폰으로 콜택시를 부르는데 성공했으며,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등대까지 왕복 30달러를 내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 고생을 해서 도착한 등대는 실은 별로 특별할 게 없었다. 속초나 정동진에서 본 등대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등대였다. 바다는 파랗고 하늘도 깨끗했지만 그뿐이었다. 우리는 짐 캐리도 케이트 윈슬렛도 아니었고, 눈이 내리지도 기억을 잃어버리지도, 대단한 사연이 있지도 않았으며, 그저 인생에 뭔가 다른 특별한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스무 살짜리 꼬마에 불과했으니까. 몬톡의 깨질 것 처럼 아름다운 풍광은 우리에게 무엇을 꿈꾸든 삶은 그것 이하의 현실을 보여줄 뿐이라는 나름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게 다시 동네로 돌아온 우리는 한인타운의 신포 우리만두에 가서 공짜 만둣국을 먹었다. 조미료 맛이 많이 나는 국물은 인생에 다시 없이 따뜻하고, 맛있었다. 이런 뻔한 방식의 인생이 계속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들 만큼. 글 | 박상영(소설가)

기이하고 고요한 쓰쿠바의 밤

16년 전 이즈음 나는 쓰쿠바(つくば)라는 곳에 있었다. 서울에서 도쿄로 거주지를 옮기는 과정에 부득이한 사정으로 두 달여 지내게 되었는데, 나름의 포부를 가지고 시작한 인생을 건 도전이었음에도 시작부터 외딴섬에 주저앉아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조바심 드는 나날이었다. 도시는 도쿄에서 버스로 40여 분쯤 떨어진 곳에 위치했고, 쓰쿠바 대학을 중심으로 각종 첨단 기술, 우주 개발 연구소, 기관, 기업이 밀집한 대덕 단지와 같은 곳으로, 내가 거기  머물게 된 것도 한 연구소와의 사연 때문이었으나,  정작 그. 곳에서의 내 일상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도시의 풍광은 조금 기이했는데, 때때로 내가 일본에 와 있는 것인지 쇠락한 북미 공업 도시의 어느 외곽 마을에와 있는 것인지 헛갈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익숙한 한국 소도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쓸쓸하면서도 정갈한 겨울 풍경이 이어지곤 했다. 일본의 크리스마스 ‘유흥’, ‘장식’ 문화는 곳곳이 교회와 성당으로 넘쳐나는 한국보다 오히려 훨씬 화려하고 정교하다 (물론 그. 또한 이제 많이 바뀐 듯 싶지만).빠듯한 예산으로 지내던 나와 연인은그 날 하루만큼은 조금 무리하더라도 여느 일본인처럼 기분을 내보자는 생각으로, 쓰쿠바에서 손꼽힌다는 고급 양식당을 찾았다. 자리가 남아 있음을 전화로 미리 확인한 후 문을 열 고 들어서자 당황스러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정장 (正裝)-성장(盛粧)을 넘어 노벨상 시상 만찬인가 싶은 손님들의 옷차림, 큼지막한 테이블에 상대를 마주 보지 않고 나란히 앉아 식사하게 한 기이한 자리 배치, 젊은 연인들의 유쾌한 대화는 고사하고 음악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숨이 막힐 듯한 정적. 나는 여전히 철이 없었고, 돈만이 아니라 경험과 패기 또한 부족했다. 우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양해를 구하고,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와 집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 ‘로얄 호스트(ロイヤルホスト)’로 가 이것 저것 잔뜩 주문한 후 생맥주를 마셨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그날 밤을 떠올린다. 용기를 내어 그 식당에 앉아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냈다면 나의 일본 생활, 그리고 이후의 삶 또한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공상과 함께. 글 | 조태상(모임 별(Byul.org) 구성원)

피처 에디터
김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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